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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서울 속 6.25 전쟁 흔적들/한강다리 폭파의 진실/단장의 미아리고개 의미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2회]

by 365 ^^ 2020. 9. 11.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2회]


오늘의 탐사지:  남대문

주제: 6.25 전쟁 당시 서울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출연자: 설민석 성유리


 1.4후퇴를 중점적으로 다뤘던 부산 탐사 [선녀들 21,22회]
 서울 중심으로 [42회]


남대문 (숭례문) 국보 1호로 1398년 건립됐고 무수히 많은 역사를 지켜봤을 숭례문이다.  

숭례문에도 6.25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숭례문 뿐만 아니라 독립문에도 총탄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당시 숭례문으로는 소련재 탱크 T-34 가 들어갔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숭례문을 지나 남쪽으로 이동했다. 


전쟁 발발 하루 전 

남과 북으로 갈라져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 있었던 38선 근처에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전쟁 발발 이틀 전 1950년 6월 23일 비상 경계령 해제 후 24일 전군의 1/3 전방 사단이 대규모 휴가를 갔는데  25일 새벽 선전포고 없이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의 기습 남침을 한다.

3일 만에 서울 점령 

북한군은 포천, 동두천,의정부를 점령하고 단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3년간 이어진 6.25전쟁의 시작이었다. 


서울로 진입하기 위한 길목이 미아리 고개였는데 북한군의 당시 전술의 특징은 전쟁을 오래 끌면 불리하다고 생각하고 미군이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고자 한 북한이었다. 북한의 최우선 목표는 서울 점령이었고 사실상 서울 진입을 막는 최종 방어선인 미아리 고개가 뚫리면서 전쟁 발발 3일 만에 주인이 바뀐다. 


그 당시 국군은 한 대의 전차도 소유하지 못했다. 1950년 6월28일 서울 시내로 진입한 북한군은


옛 조선총독부 중앙청에 게양되는 인공기 


<단장의 미아리 고개> 
노래의 의미 


단장은 장을 끊는다는 의미로  <단장의 미아리 고개> 작사가 반야월 선생이 직접 겪었던 6.26 이야기로 본인이 겪은 가족 간의 이별을 가사로 쓴 노래이다. 전쟁이 나자 가족들에게 뒤따라오게 하고 사정상 먼저 부산으로 피란을 갔으나 고작 3일 만에 점령 되어 버린 서울에 남은 가족들은 결국 고립된다. 고립된 가족들의 삶은 너무 비참했다. 당시 5살이었던 반야월 선생의 둘째 딸 수라는 배고픔에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전쟁 통에 제대로 장례도 치르지 못해 호미로 땅을 파고 입고 있던 옷 그대로 딸을 묻고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야 했다고 한다. 


이 노래는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을 함께한 노래이자 미아리 고개는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강제로 납치한 사람들을 끌고 가던 길이기도 하다. 피랍된 사람들의 가족들이 기약 없이 이별을 해야 했던 곳이 미아리고개였다.


한강다리 폭파 

한강철교 아래 노들섬


한강철교 


6월27일 새벽 국회 긴급 비상 소집
북한군의 남하를 막으려면 당연히 지리적인 필수 관문인 한강다리, 한강대교를 막아야 했다. 당시에도 교통의 중심지였던 한강인도교=한강대교는 북한군에 의해 순식간에 포천.의정부를 점령 당하고 서울로 들어오는 입구 미아리도 점령 당할 위기에 결국 6월 27일 새벽 국회 긴급 소집하는데 당시 210명의 국회의원 중 174명만 참석한다.  

모든 국회의원은 서울을 사수하자고 결의를 하고 보고 하기 위해 경무대(청와대)로 간다. 그러나 대통령이 없었다. 국민들은 알지 못했던 대통령의 남하  
 


그래서 국회 의원도 서둘러 가족들과 짐을 싸서 피란을 간다. 육군 총 참모장을 비롯 국방부 장관도 도망을 갔다. 전체 국회 의원 중 70%는 남하하고 남은 국회의원 30%는 서울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데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인데 이미 한강 인도교를 넘어 이미 남하한 남측 지도층과 뒤늦게 부랴부랴 피란길에 오른 서울 시민들

1950년 6월28일 새벽 2시30분경 계속되는 북한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다.


그때 피란을 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다리 위에 있었다. 새벽 2시30분경 한강 인도교 폭파 되고 약 800여 명의 민간인과 군인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강 인도교 폭파로 인해 적군을 막는 동시에 아군의 퇴로도 끊기고 서울 시민 약 140만 명이 고립됐던 상황이 된다. 

한강인도교 폭파를 서두른 이유
전쟁 당시 제 3사단 공병 대대장이었던 박기석 소령은 한강 인도교를 너무 일찍 폭파한 것이라고.... 
28일 오전 8시경 북한군 전차가 서울 시내로 들어온 후 오전 11시30분 경 북한 주력 부대가 도착했는데 왜 서울은 새벽 2시에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을까? 그것은 판단 미스였다. 

미아리를 통해 서울로 진입한 북한군 전차부대가 미아리고개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북한군이 서울 시내로 들어왔다고 잘못 전달해서 급하게 한강 다리 폭파를 지시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엄청난 민간인 희생은 물론이고 서울에 있던 엄청난 전쟁 물자들과 군인, 서울 시민들 전체가 고립이 되었다. 이는 결국 북한에게 전쟁 물자를 내어준 셈이 되었다. 당시로서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던 것이다.

결국 비난을 피할 수 없었던 정부는  당시 가장 하위의 실무 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최창식 대령을 1950년 9월 21일 부산에서 총살시켰다. 당시 군사작전의 총 책임자였던 육군 총 참모장은 1950년 7월 하동 전투에서 전사를 했기 때문에 누군가의 희생양을 필요로 했고 결국 모든 책임을 떠안고 적진에서 적을 이롭게 했다는 적전비행의 죄목으로 총살 시켰다. 그 후 최창식 대령은 1964년 무죄를 선고 받는다.


국민들을 더 빨리 대피 시킬 수는 없었을까? 

그 당시 소식을 전달 받을 수 있던 것은 라디오가 전부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에서 특별 방송을 한 것으로 추측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남하한 상태에서 라디오에 적군이 다가오고 있으나 미군이 참전하여 빠른 시일 내에 도착할 것이다. 국민들을 안심 시키려는 메세지를 전달했고 그 말을 믿고 국민들은 서울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대포 소리가 미아리 고개 너머에서 들리는데도 서울을 사수할 테니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방송이 나왔다. 너무나 미숙했던 당시 정부의 대처였다. 

대부분의 전쟁가요에 1.4후퇴가 들어가는 이유는 ?


한강 다리의 총탄 흔적들 



서울 점령 후
북한이 한일 

서울을 점렴한 후 자유 독립의 상징 독립문에  김일성과 스탈린의 사진을 걸고 중앙청 정문에 인공기를 꽂은 북한.


점령 이후 북한은 방역을 하고 사회주의 이념 실현을 위한 토지 무상 분배, 행정.치안 관리 등 생각보다 우호적인 북한의 정책에 시민들은 마음을 놓았는데 그때부터 인민 재판이 시작된다. 친일파. 지주 종교인 등 사회주의에 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가해진 인민 재판이었다. 

정확히 3개월 뒤 1950년 9월28일 서울 수복을 하자 북한은 그나마 갖춰 놓았던 핵심 시설도 파괴하고 후퇴한다.

노량진 영등포  가장 치열했던 
한강방어선 전투

우리군은 1950년 6월 28일~7월 3일에 걸쳐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막기 위해 노량진 영등포에서 가장 치열했던 한강방어선 전투를 벌인다. 미군이 도착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김홍일 장군 부대가 6일 동안 버티면서 결사항전을 했다. 



숨은 영웅 
김홍일 장군 

김홍일 장군 덕분에 미군이 도착할 결정적 6일의 시간을 확보해낸다.  


김홍일의 아버지는 1910년 일제 치하에 있을 때 만주에서 독립 운동을 했고 그 후 다시 국내로 돌아 온 뒤 김홍일은 비밀단체 신민회가 만든 정주 오산 학교에서 공부하고 당당히 수석 졸업을 한다. 3.1운동 이후에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1931년부터 무기를 만드는 상해 병기창 주임으로 근무한다. 

이듬해인 1932년  김홍일은 김구의 소개로 이봉창을 만나게 되고 이봉창에게 폭탄을 디자인한 사람이 김홍일이다. 그러나 이봉창이 아쉽게 일왕을 죽이지는 못했고 의거 실패 뒤 자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봉창 의사가 예상보다 일왕에게 가깝게 접근했던 것이다. 먼 거리에서 던질 것을 예상하고 폭탄을 가볍게 만들었는데 가볍게 만들면 화약이 덜 들어가 약한 폭발력으로 실패하고 만 의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뒤 또 다른 청년 윤봉길에게 수통 모양의 폭탄을 만들어 주게 되며 의거를 성공 시킨다. 

윤봉길 의사 의거 18년 뒤 북한군까지 막아낸 김홍일 장군이다. 

춘천전투 
육군 제 6보병사단

당시 북한군은 한강의 강북을 점령하면 국군이 후퇴해서 강남에 모일 것을 예상해서 6월 25일 서울 공격과 동시에 북한의 또 다른 부대는 춘천을 치고 수원을 점령한 다음 수원에서 치고 올라온다는 것이 북한의 작전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이 시작되고 3일 만에 점령 된 서울이었는데 문제는 춘천에서 틀어졌다. 

춘천을 점령하는 것은 하루정도 예상하고 어렵지 않게 뚫릴 거라 예상했는데 춘천이 쉽게 점령 되지 않았다. 그때 춘천에는 북한의 최정예 부대인 2사단이 있었고 춘천의 옥산포 보리밭을 지나는데 보리밭 옆 우두산에서 대한 민국 육군의 포탄 공격이 시작되었다. 춘천에서 큰 피해를 입은 북한군 2사단은 일단 후퇴를 한다. 


6.25 전쟁 한 달 전부터 춘천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이미 진지 구축을 해놓은 것이었다. 적군이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적군의 경로를 예상하고 이에 대응하는 훈련을 평소에도 열심히 했던 것이다. 


북한군은 일단 후퇴를 한 후 다음 날 만반의 준비를 해서 재진입을 시도했으나 우둔산에는 아무도 없었다. 국군은 이미 우둔산에서 소양교로 진지를 이동한 것이다.  

1950년 6월 26일 소양교를 건너려는데 다시 쏟아지는 포탄에 북한군의 이동을 저지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렇게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소양강 북쪽에 있던 포탄 5000여 발을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학생과 공장에 다니는 젊은 여성들 모두 동참해서 강 남쪽으로 옮겼고 춘천 전체가 북한군의 남진을 막겠다는 각오가 대단했다고 한다.  


춘천 전투는 금방 점령 될 것이라 예상했던 곳이 3일 이나 지연 시킨 덕분에 굉장히 북한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준 전투였다. 




6.25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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