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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녀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멕시코 천재화가 이야기]

by 365 ^^ 2020.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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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1회]

오늘의 탐사지: 멕시코 
주제: 멕시코 천재화가 프리다 칼로의 일생
 

 

멕시코의 대표적인 두 천재 화가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는 부부사이였다. 


멕시코 화폐 500페소에 있는 
앞면 디에고 리베라의 <칼라꽃을 끌어안고 있는 누드여인(1944)> 그림뒷면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1940) 과 <우주, 대지(멕시코), 디에고, 나, 세뇨르 솔로틀의 사랑의 포옹>
 
 
멕시코의 천재화가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 1886~1957)
 

 

 

디에고 리베라는 멕시코 벽화미술의 대가로 알려진 천재 화가이다. 

 

 

 

멕시코 시티 관광의 중심지 소칼로 광장 근처에 대통령궁=국립궁전이 있다. 이곳에는 멕시코 역사를 한눈에 볼수 있는 디에고 리베라가 그린 벽화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8개의 테마로 이루어져 있다. 멕시코 원주민의 삶, 스페인 침략에서 부터 독립의 역사를 볼수 있으며 후세의 이야기를 그리도록 하기 위해 한쪽 벽면을 비워놨다고 한다. 

 

 

1920년대 활동 했던 디에고는 그 당시 멕시코 문맹률이 높아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벽화  그리기 운동이 일어났고 그 중심에 디에고 리베라가 있었다. 

 

 
국립 궁전 2층에 디에고 최대의 역작인 1921~35년 사이 그린 벽화를 감상할수 있는 곳이다. 
 

 

 
프리다 칼로 
(1907, 7월 6일 ~ 1954, 7월 13일)
 
 
멕시코의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이다. 사회주의자였고 항상 멕시코 전통의상과 악세사리를 착용했지만 여성을 억압하는 관습을 거부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의 우상이기도 했다. 
 

 

 

 

 

프리다 칼로 박물관 

 

남편 디에고와 함께 살았던 집을 개조해 박물관을 만들었다. 

 

 

 

지금은 멕시코시티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자리잡았다. 

 

 

박물관에는 프라다 칼로의 일생과 그녀의 작품등을 감삼할 수 있다. 

 

 

사진을 찍으려면 포토티켓을 따로 구매해서 마련해 놓은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

 

 

프리다 칼로의 인생

 

프리다 칼로의 인생은 육체적 정신적 비극으로 얼룩진 삶 그 자체였다. 

 

 

6세에 이미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했고 1925년 18세때 전차사고로 온몸이 부셔졌으며 회저병으로 다리 한쪽을 달라내야 했다. 또한 결혼 후에는 남편의 끊임없는 외도가 있었다. 

 

이 모든 아픔이 그녀의 그림에 담겨 있다. 

 

 

"나는 아픈 것이 아니라 부서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

 살아있음이 행복하다."

 

-프리다 칼로

 

부서진 기둥 1944년

 

 

프리다 칼로는 국립예비학교 학생 시절 벽화를 그리고 있는 디에고를 보고 첫눈에 반해 열열히 사랑한 끝에 1929년 21살에 디에고와 결혼을 한다. 그 후에 남편의 외도로 2번이나 이혼한다.

 

 

디에고는 상당한 거구였고 프리다는 작은 체구였기에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이라고 했다. 

 

 

결혼식 즈음에  프리다가 그린 두 사람의 실제 모습

 

프리다는 남편 디에고의 아이를 가지고 싶었으나 3번이나 유산을 한다. 

<핸리포드 병원(1932)> 

유산의 아픔을 그림 작품

 

 

프리다 칼로는

  " 내 인생 두번의 대형사고가 있었는데

 하나는 전차사고였고 

다른 하나는 디에고를 만난것이다. 

두 사고를 비교하면 디에고가 더 끔찍했다.

 

라고 말했다. 

 

가혹한 운명(1932)

 

남편 디에고는 여성 편력이 극심한 바람둥이 남편이었다. 급기야 프라다의 친여동생과 불륜을 저지르고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이상하게도 

한 여인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많은 상처를 주고 싶다. 

프리다는 

이런 나의 역겨운 성격으로 인한

희생양 중에 가장 대표적인 여인일 뿐이었다.”

 

이에 극심한 상처를 받고 프라다는 자신의 심정을 그림으로 그려 디에고에게 보낸다. ▼

1935년 <단지 몇 번 찔렸을 뿐>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했지만 그 이후에 교통사고를 심하게 당하면서 강철봉이 옆구리로 들어가 척추와 자궁을 관통해서 다리까지 박힌 온몸이 부서졌던 운명을 바꾼 사로고 전신 깁스를 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프리다 칼로 전용 침대

 

 

프라다 칼로가 자화상 그림이 많은 이유 ?

 

이 침대로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계기가 된다.  이 침대에서 거의 1년 넘게 전신에 깁스를 하고 누워 있었다. 

 

 

유일하게 두 손만 자유로웠고 침대 위에 설치된 거울을 보며 그녀의 자화상들 많이 그렸다고 한다. 
 

 

그녀에게 있어 그림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녀가 삶을 견뎌낸 유일한 희망은 그림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그림들

 
죽기 전에는 다리까지 자르는 최악의 상황 속 그녀가 그린 마지막 유작은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작품 

 

 

<Viva la Vida>

"인생이여, 영원하라 " 

 

 

 
수박이 인생과 무슨 상관이
 

 

수박의 과육 빨간색은 인생은 피투성이 같고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다. 
 
 

 

 
프리다 칼로는 1954년 7월 13일  폐렴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1984년  그녀가 죽고 난 30년 뒤 프리다의 모든 작품이 국가 보물로 지정됐다. 

 

그녀의 마지막 말 

 

 

 

"I hope the exit is joyful and I hope never to return."

 

-Frida Kah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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