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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징기스칸은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나?

by 365 ^^ 2021. 7. 29.

[21-1 ]칭기스칸이 몽골의 대칸이 되기까지 ~ (몽골 통일 과정)

징기스칸의 정복 전쟁

 

징기스칸의 몽골 통일 1206년 세계는? 

서기 1206년 분열된 몽골을 통일 한 후 징기스칸은 정복 전쟁에 나선다. 서기 1206년은 단기3539년, 불기 1750년, 이슬람력 602년 되는 해로 유럽은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을 점령해 라틴제국 세우고 2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중국은 송은 남송으로 , 여진족이 세운 금이 화북지역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 시절, 우리의 고려는 희종 2년때였다. 

 

무신정권 집권자 순서
1170년 고려 무신정변으로 정중부가 권력을 잡았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경대승이 권력을 찬탈 후 그도 서른 살에 세상을 뜨고 그 권력은 이의민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뒤이어 나타난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후 최씨 무신 정권이 10년째 이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탕구트(서하) 정벌(1207년)

통합 전 혼란한 시대였던 몽골은 식량부족과 가축의 부족으로 인해 정복전쟁을 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징기스칸의 가장 첫 정복지는 금나라와 연합할 가능성이 있던 서하 (탕구트)로 향했다. 탕구트는 실크로드의 길목이라 재화가 풍부했다. 탕구트는 결국 칭기스칸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낙타, 비단, 곡식 등을 바치고 탕구트의 딸까지 칭기스칸에게 바친 서하(탕구트) 왕이었다.

 

칭기즈칸의 침략 일지 서하 (1207년), 금나라(1211년), 서요(1218년), 호라즘 (1219년)
칭기즈칸의 침략 일지 서하 (1207년), 금나라(1211년), 서요(1218년), 호라즘 (1219년)

 

금나라 정벌(1211년)

서하, 서요까지 점령한 칭기스칸은 드디어 금나라와 전쟁에 돌입한다. 당시 금나라는 농경 유목 심지어 수렵까지 복합 경제를 갖춘 나라였고 중국의 화북 지역을 차지하면서 엄청난 세금을 거두어 드려 더욱 강력해진 금나라였다. 그렇기 때문에 금나라를 정복하면 아시아의 패권을 잡게 되는 것이었다.

 

서하 위치
서하(1038~1227) 탕구트족이 세운 나라로 '흰색의 크고 높은 나라'라는 뜻의 국명으로 한자로는 대하이지만, 송 나라에서 '서하'라 부름

 

몽골군은 보병과 달리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9만~12만 정예 기병을 이끌고 쳐들어간다. 그러나 금나라는 높은 성벽으로 완벽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 속에서 금나라는 버티기 전술에 들어갔고 성벽을 포위한 징기스칸은 금나라에 제비 만 만리와 고양이 천 마리를 잡아 넘길 것을 요구한다. 고양이와 제비 꼬리에 불을 붙여서 놔주면 귀소 본능이 있는 고양이와 제비는 자신의 고향 금나라로 돌아간다. 동물의 습성을 이용해 성 안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이런 혼란을 틈타 몽골군은 높은 성벽을 뚫고 금나라에 항복을 받아낸다.

 

 

 

호레즘 왕국 정벌 이유

칭기스칸은 금나라와의 전쟁 속에서도 철저하게 주변국의 정보도 수집했다. 같은 시기 군사 대국으로 급성장 중인 호레즘 왕국(우즈베키스탄)이 있었다. 호레즘 왕국은 정치 경제 수학 문화 등까지  발달했던  왕국으로 우리에게는 다인종 역사 속 ‘색목인’으로 알려진 민족이다. 이들은 수공업과 장사에 능하며 동서, 남북 실크로드 교역의 주인공이었다.  호레즘 왕국은 오늘날의 이란,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지역의 영토를 모두 호레즘 왕국에 속해 있었다. 호레즘을 정복하면 유럽 진출에 가능성이 열리는 상황이었다.

 

호라즘 왕국(1077~1231) 교역로
호라즘 왕국(1077~1231) 사마르칸트 중심으로 동서 무역을 독점하며 번영했으나 칭기즈칸 군에 패하여 멸망

 

호레즘에 화친 제의->거절당함.

칭기스칸은 늘어나는 재정 지출로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에 징기스칸은 호레즘에 교역을 제안하는 사신단을 보낸다. 전쟁을 하지 않은 이유는 칭기스칸은 호레즘 왕국이 군사력이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 전쟁보다는 사신단을 통해 교역을 위한 정보 수집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호레즘 국왕 또한 칭기스칸의 속뜻을 눈치채고 사절단을 몰살시킨다.  몽골 사신을 죽였다는 것은 사실상의 전쟁 선포였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다시 한번 화친을 제안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사신단을 참수했다.  

 

 

호레즘 정벌 (1218년 :아르빌 전투) 

이에 칭기스칸(당시 60세)은 1218년 호레즘 원정 결정을 하고 군대를 움직였다. 그러나 호레즘은 칭기스칸의 전술을 간파하고 징기스칸에 대응하는 수성전(성을 지키는 전술)을 펼친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금나라 전투에서 얻은 공성 무기와 기술을 적극 활용했다. 또한 전선, 심리전을 활용했다.

 

징기스칸 모습
징기스칸 정책

 

누구라도 항복하면 그의 처,자식과 집안 사람들을 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처와 자식은 물론 친족을 다 몰살시킬 것이다 라고 공포심을 불어넣는 작전을 펼쳤다. 이에 호레즘의 많은 도시들이 항복을 하기 시작한다. 항복한 도시는 약속한 대로 모두 살려 주지만 반면에 항복하지 않은 지역은 흔적 없이 초토화시켜 버렸다.

 

징기스칸의 강력한 복수 

투르크메니스탄 메르부, 아프가니스탄 해라트, 이란지역의 니샤프르에서 엄청난 사람들을 학살한다.  칭기스칸의 사위가 참전한 이란 니샤푸르 전투에서 칭기스칸의 사위가 전사한다. 전사 소식이 분노한 징기스칸의 아들 톨로이가 니샤푸르를 점령해서 이 도시에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죽인다. 이슬람 역사 기록에는 도시마다 1,000,000명 이상 학살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징기스칸의 사신단을 몰살한 호레즘의 이날축에게도 눈과 귀에 끓는 은을 부어 죽이는 형벌을 내린 것이다. 자신의 사신을 살해한 것에 대한 강력한 복수였다.

 

투르크메니스탄 메르브아프가니스탄 헤라트이란 니샤푸르
투르크메니스탄 메르브/아프가니스탄 헤라트/ 이란 니샤푸르

 

호레즘의 국왕은 백성을 버리고 도주했고 징기스칸은 무하마드 샤 국왕을 잡기 위해 3000km 추격하지만 국왕은 카스피의 작은 섬에서 굶주림으로 인한 폐렴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몽골군은 호레즘의 왕을 추격하면서 흑해연안의 조지아를 지나 조지아 옆 아제르바이잔이 항복, 서쪽으로 크림반도 일대까지 공략 후 북쪽의 러시아까지 추격하게 된다. 추격 중 몽골군과  러시아군이 격돌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조지아 왕국
스탈린이 조지아 출신이고 인류최초의 와인생산국이자 커피도 유명한 바로 그곳 조지아 왕국이다. 이 시기의 조지아 왕국은 기독교 국가로 몽골은 처음으로 기독교 국가와 만난 것이다.

 

 

 

몽골 제국 최초의 유럽 침공

 

칼카강 전투 (러시아 vs 몽골) 

호레즘 국왕을 추적하던 몽골 추격대는 남러시아 일대를 정찰하게 된다.  단순히 정찰과 정보 수집을 위한 목적이였다. 그러나 몽골군의 출현에 러시아가 깜짝 놀라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착각해 연합군을 모아서 칼카강에서 선제공격을 한다. 이때 몽골군 천명정도를 죽이게 된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경험이 많은 몽골 군대였기에 약 3만 명의 병력으로 약 8만 명에 대군을 무찌르게 된다. 이 싸움에서 러시아 군이 전멸한다. 이때 몽골군의 승리로 인해 유럽 전역에  징기스칸의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몽골 군대에 대한 두려움이 싹트기 시작한다.

 

 

몽골군이 세계를 정복 할수 있었던 이유

 

▷ 뛰어난 기마전술

오랜 시간 말과 한 몸처럼 지낸 몽골군은 활을 뒤로도 쏠 수 있었는데 이 기술은 적을 유인하는 동시에 공격이 가능했던 기술이다. 이를 위해 ‘등자’가 발명이 되었다. 

 

몽골인의 말타는 자세
몽골의 활을 복합궁이라 부르는데 다양한 재료들을 조합해 만든 활이다.  활 안쪽은 나무, 중간은 소의 뿔, 바깥 쪽은 소의 힘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강한 탄성이 만들어진다. 올림픽 양궁 사거리는 70M정도인데 몽골의 활 사거리는 500m~700m 이다.  등자 : 말을 탈때 발을 디디는 기구로 기원전 4 세기 북방 유목민에서 처음 개발되었다.
마름쇠 모양
마름쇠:  4개의 갈고리가 있는 것으로 사람과 말의 이동을 저지하기 위해 지면을 설치 하는 방어용 무기,로 달리면서 마름쇠를 뿌리면 말이 이를 밟아서 넘어기게 하는 것이다. 몽골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많이 사용했던 무기이다. 특히 후퇴시에 적의 추격을 늦추기 위해 사용한다.

 

▷보급물품이 필요 없었던 몽골 부대

 

몽골인들은 자신의 식량인 육포 또는 고기를 안장 밑에 넣어 이동하기 때문에 보급부대가 따로 필요가 없다. 말등의 온기로 고기가 익게 된다. 또한 몽골 군대에는 예비 말을 같이 데리고 다녔다.  예비 말을 포함한 몽골군 한명이 전투와 보급을 겸한 하나의 군대나 마찬가지였다.

 

몽골인의 음식주머니타타르 스테이크
  햄버거 안의 패티 또한 타타르 스테이크에서 유래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몽골의 전투식량

 

보르츠- 병사 10명당 양 3마리 분량

말젖-병사 1명당 5~8마리의 말젖 섭취

마유분말-겨울용식량

 

몽골식 육포 '보르츠'
몽골식 육포 '보르츠' 가 있었는데 양고기 or 소고기를 바람에 건조해 말린 고기를 소의 방광에 넣어서 말 안장 밑에 넣고 다녔다. 그러면 고기가 눌려서 고기는 부드러워진다.

 

▷군사들이 목숨 바쳐 싸울 수밖에 없는 강력한 법

 

전우가 죽거나 포로가 됐는데 혼자 돌아오면 사형, 이 법은 전우와 군대의 결속적을 다지기 위한 조치였다. 적군일지라도 신뢰를 지킨 자에게는 상을 아군일지라도 배신한 자에게는 징벌을 했다. 모든 군사를 동등하게 대우했으며 지휘관도 병사에게 함부로 못하도록 조치 했다. 13세기 이미 몽골군은 열린 군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탕구트(서하) 원정 (1227년)

이렇게 강력한 군대로 서방 국가를 정벌하고 온 칭기스칸에게 꼭 처리해야 될 문제가 생긴다. 칭기스칸에 항복했던 탕구트가 호레즘 정복 전쟁에 군사를 보내지 않았고 이렇게 칭기스칸 자신의 명령에 불복종한 탕구트(서하) 원정을 나선다.

 

 

징기스칸의(칭기즈칸) 죽음 (1227년)

탕구트(서하) 원정 중 낙마 사고로 다치게 되고 64세의 나이에 또 다시 전투에 참가한 칭기스칸은 부족한 전투 말을 확보하기 위해 직접 야생마 포획을 하던 중 놀란 야생마가 칭기스칸에게 돌진하게 되고 이에 말에서 떨어진 칭기스칸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후계자를 지목하고 유언을 남긴다. 당시 서하의 왕은 투항 의사를 밝혔고 서하 원정 승리를 몇일 남겨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징기스칸의 무덤

칭기스칸은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고 이에  칭기스칸의 죽음과 무덤은 1급 기밀이 된다. 칭기스칸 무덤의  도굴 위험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조치였다. 

 

칭기즈칸의 유언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적이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절대로 곡을 하거나 애도하지 말라"

 

또한 이를 위해 비밀 유지 방법으로 칭기스칸 무덤을 건설했던 건설 인부 1000 명을 몰살시킨다.  칭기스칸의 무덤은 고향인 부르칸 칼둔 산으로 예상되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징기스칸의 출생지 부르칸 칼둔 산
칭기스칸의 무덤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세계의 여러 고고학자들(미국, 영국 등)이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칭기즈칸의 관을 운반할때 마주친  모든 피조물을 죽였고 무덤 조성 후 수백마리의 말을 달리게 해서 그 봉분을 평탄하게 만들었고 나무를 심어서 숲을 만들어 버렸다. 심지어 장례식을 지켜본 사람을 모두 죽이고 그들을 죽인 친위대 50명을 죽이고 또 다른 친위대가 그들을 죽여서 그 누구도 무덤의 위치를 모르게 했다.

 

 

2대 대칸 우구데이'

칭기스칸의 죽음 이후 왕위를 계승한 건 셋째 아들 ‘우구데이’ 였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몽골 제국의 영토를 확대시킨것은 칭기스칸의 아들 ‘우구데이’부터이다. 1229년 우구데이 카안이 대칸의 자리에 오르면서 동시 다발적인 전쟁으로 세력을 확대한다.  한쪽에는 고려를 침략하고 다른 한쪽에는 러시아 동유럽을 점령한다. 몽골 세력 확장의 목적은 독점적 실크로드 시스템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유럽으로 향한 몽골
몽골의 유럽 진출 지도

 

 

리그니츠 전투 (본격적 유럽정복)

몽골 제국의 성장의 위협을 느낀 서방국가들은 몽골 제국와 유럽 연합 군의 격돌인 본격적인 유럽 정복에 시작인 리그니츠 전투가 벌어진다. 당시 우구데이는 자신의 아들 구육(장남), 바투(칭기스칸 첫째 아들 주치의 장남)을 총사령관으로 동유럽 원정을 보냈다.  강력한 공성 무기들과 신속한 기병대로 현 우크라이나 일대 남러시아를  정벌할수 있었다. 뒤이어 바로 동유럽까지 진출을 시도했다. 

 

그 당시 헝가리 국왕 벨라 4세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고 신속하게 진격한 몽골 15만 군대는 리그니츠에서 전투가 벌어지는데 갑작스러운 침공에 놀라 서둘러 연합군을 조직한 폴란드는 중기병대를 중심으로 선제공격을 시작한다.  유럽 연합군의 선제공격으로 수세 몰린 몽골 군대이었고 이에 유럽 연합군은 더욱 적극적으로 공격을 했다. 결국 몽골 군대는 후퇴하기 시작하며 이에 유럽군대가 몽골 군을 뒤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몽골군의 고전적인 전술이었다. 약하게 보이고 도망가는 기만 전술로 적을 속인 다음에 도망가면서 독화살을 유럽 연합군에 쏘아 적을 공격하는 전술인 것이다.

 

연합군 군대가 전멸한 장면으로 그 당시 헝가리 폴란드 지휘간의 목을 잘라 창에 꽂아 행진을 했고 수많은 포로들의 귀를 잘라 행진을 했는데 그 수가 아홉 자루나 되었다고 한다. 이에  유럽의 많은 국가는 몽골 부대의 잔악한 모습에 극한의 공포를 느끼며 혐오와 공포를 뼛속 깊이 남기게 된다. 

 

우구데이 카안 사망

우세한 전황 속에 몽골 군대는 현재 오스트리아 빈까지 진격 했다가 갑자기 퇴각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몽골제국 2대 대칸인 우구데이 카안의 사망 때문이었다. 재위 12년만에 사망한 것이다. 우구데이 카인이 재위 12년 만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구육 카안이 2년 재위, 칭기스칸의  막내아들의 아들 뭉케 카안이 재위 8년 , 그리고 그 동생 쿠빌라이 카안이 5대 대칸으로 즉위한다. (원 세조)

 

몽골의 카안
몽골의 카안

 

 

마르코 폴로의 기록

쿠빌라이 카안에 의해 남송이 정복되면서 중국영토 전체를 장악했다. 몽골 제국 최대이자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토의 탄생이었다 .이 시기에 사방으로 연결된 몽골 제국의 글로벌 교역로 실크로드가 완성된 것이다. 이 시기 쿠빌라이 때 몽골 제국으로 온 마르코 폴로는 17년 동안 쿠빌라이 카안곁에서 경험한 다양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 책이 바로 동방견문록이다. 

 

대여행의 시대

그렇다면 어떻게 이탈리아인 마르코 폴로가 몽골제국까지 올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실크로드 때문이었다. 몽골은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역참을 만들었는데 역참은 국가의 행정 민 외교 통신 업무를 수행 하기 위해 마련된 호텔같은 체인 시스템이었다. 역참은  다음 역참까지 40km 정도로 역참과 다음 역참을 한참이라 했고 한참가야 된다는 뜻은 몽골의 역참에서 나온 것이다.

 

몽골의 통합된 교통로
몽골의 통합된 교통로

 

몽골은 20 개가 넘는 부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로 기존 세력의 권위,문화,  습속, 언어들을 인정했다. 또한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며 그로 인한 분쟁을 원천 봉쇄했다.  이에 한반도 부터 지중해까지 다양한 문화와 언어의 교류와 소통을 하게 된다. 이를 대여행의 시대라 부른다.

 

칭기스칸 덕분에 글로벌 시대가 열렸다고 볼수 있다.  [21-2]

 

칭기즈칸 후계자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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