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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잉카 문명 멸망 이유 '프란시스코 피사로'

by 365 ^^ 2021.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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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잉카제국  The Inca Empire (1463~1532)

아메리카 대륙의 마야, 아즈텍문명과 더불어 또 다른 문명 잉카문명이 있었다. 잉카문명은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고원에 형성되었던 강력한 제국으로 잘 정비된 도로, 계단식 농토, 태양신을 숭배하던 문명이었다. 당시 잉카제국도 인구 9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대단히 큰 문명이었다. 뛰어난 건축 기술(마추픽추)과 황금 공예로도 찬사를 받던 문명이었다. 

 

잉카문명 위치( 남북으로 4000km 뻗어나간 대 제국)  해발 3400m에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가 있고  
마추픽추 잉카문명( 잘 정비된 도로, 계단식 농토, 태양신을 숭배하던 문명)

 

잉카문명을 몰락시킨 '피사로'

이런 잉카문명을 몰락시킨 이는 ‘프란시스코 피사로’ 라는 이름의 스페인 출신 정복자로 코르테스에게 영감을 받아 잉카제국을 침공한다. 잉카를 공격하기 위해 말 30필, 정복자 160여 명으로 코르테스보다도 적었던 피사로 일행이었다.  

 

(1471~1541) 1531년 쿠스코를 점령하고 잉카의 마지막 황제를 속여 처형했다. 피사로는 13년전 스페인의 코르테스가 아즈텍 문명을 어떻게 멸망시켰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잉카인들은 아즈텍 제국이 사라진 사실도 알지 못할만큼 유럽인들에 대해 정보가 없었다. 

 

당시 잉카의 지도자 아타우알파는 이복형제와의 내분을 수습 중이었다. 수도 쿠스코가 아닌 카하마르카에 군대와 함께 있던 중이었고 이때 피사로는 통역사 및 신부와 함께 아타우알파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신의 말씀을 따르고 기독교를 받아들이라고 하니 피사로를 만난 아타우알파는 신부의 성경책에 관심을 보였다.

 

영화 <아귀레, 신의 분노(1972)> 중 / 1532년 아타우알파 잉카 지도자왕의 첫 대면 

성경책을 보여달라고 하니 신부는 성경책을 닫힌 채로 건네주었고 성경을 펼쳐주려고 다가가자 '아타우알파'가 격노해 신부의 팔을 내리쳤다. 신부는 피사로에게 성스러운 책을 땅에 던졌다. 이것은 전쟁의 신호탄이었다. '신성모독'이라고 해서 숨어 있던 피사로의 병력과 대포가 일제히 공격하며 기습 공격에 많은 잉카인이 죽고 아타우알파는 포로가 된다.  (1532년 11월)

 

인질로 잡힌 아타우알파 자신을 풀어주면 자신이 있는 이 방을 모두 금으로 채워줄 것을 약속한다. 그 후 속설에 따르면 방을 금으로 채우는 데만 8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왕을 석방시키기 위해 피사로에게 바쳐진 금이 24톤정도였다. 

 

그래도 왕을 풀어주지 않자 이에 까하마르카에서 대 접전이 벌어진다. 잉카군대 6천명이 넘었지만 160명의 피사로 군대에게 전멸당한다. 잉카의 반란을 두려워한 정복자들은 1533년 8월 29일 아타우알파를 카톨릭으로 개종시키고 목을 졸라 죽인다. 피사로의 침입 2년 뒤 잉카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잉카 문명 멸망 이유 

 

매우 적었던 정복자 집단이 어떻게 다수의 인구가 있는 원주민을 멸망시켰을까 ?  말을 처음 본 잉카인들은 충격에 빠졌고 또 다른 원인은 잉카인들의 무기는 청동무기와 스페인의 철제무기 등 무기의 차이였다. 

잉카인들의 청동 무기들 
스페인의 철제 무기와 갑옷 그리고 이들에게는 총이 있었다. 

그리고 유럽인들이 가져온 천연두 같은 질병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로인해 많은 원주민이 죽었다. 종합적으로 전염병, 발달된 무기 ,원주민의 분열이 한꺼번에 찾아온 것이 정복자들에게는 많은 운이 따라줬던 결과라고 볼수 있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에 금,은 등의 자원을 가져가고 천연두와 홍역을 전해주었다 

 

이후에 아메리카 원주민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고 메스티조(백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의 혼혈)은 늘어갔다. 


 

유럽의 기술적 군사적 우위가 아메리카 정복을 가능케 했다? 그것은 정복은 불가피한 역사의 흐름이었다?고 말할수는 없다. 기술적 우위가 있다고 해서 모두 침략에 나서지는 않는다.  그것은 당시 유럽인들의 소유와 팽창 욕구가 주 요인이었고 현세 지향성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볼수 있다. 지금도 약자에 대한 정복과 팽창을 유럽 중심의 관점에서 당연시 한 것에 대한 반성을 해야 할 때이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가치는 서로의 문명을 존중하는 마음이고 공존과 조화는 되돌아봐야 할 삶의 태도이다.  

 

 

 

[20-1]콜롬버스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과정, 의미

 

[20-2]아스테카(=아즈텍문명) 멸망 원인 스페인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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