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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칭기스칸(테무진)이 몽골의 대칸이 되기까지 ~ (몽골 통일 과정)

by 365 ^^ 2021. 7. 29.

몽골 영토 크기, 규모

유라시아 전지역으로 아메리카 대륙 빼고 거의 다 지배했다고 보면 된다.  3,300 만 km2=대한민국 영토의 약 330배에 해당하는 크기이다. 몽골인들은 한번 진격시 100km를 이동했다. 

 

1995년 워싱턴 포스트 선정 1000년 동안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뽑인 인물이 바로 칭기스칸이다. 세계 일류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칭기스칸은 그 당시 고작 10만 명도 안되는 기병으로 어마어마한 영토를 정복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정복자이다. 몽골 제국이 전세계를 석권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피의 복수였다.

 

칭기스칸의 이름 테무진(몽골어로 쇠라는 의미)은 칭기스칸의 아버지가 전쟁에서 다른 부족(타타르)을 정복 후 그 부족의 적장이름을 따서 붙여준 이름이다. (자신이 대표적인 적장을 사로잡은 것을 기리는 의미가 있다)

 

'칭기스 칸'의 의미 해석

'칸'은 군주,왕를 의미하고 '칭기스'에 대한 의미는 여러가지가 있다. 위대한, 위엄을 갖춘 이라는 의미가 있고 바다라는 의미 (바다와 같이 넓은 세계를 다스리는 군주), 새소리의 의미(칭기스칸이 칸으로 즉위를 할때 상서로운 새가 날라와 칭기스,칭기스라고 울었다는 속설)도 있다.  

 

 

칭기스칸(테무진)의 출생

칭기스칸의 아버지 '이수게이'는 몽골 부족 보르지긴 씨족의 족장이었다. 칭기스칸의 아버지 이수 게이는 메르키트 부족 장에 부인을 약탈에 온다. 그 당시 몽골 초원에서 약탈혼 풍습은 흔한 일이었다. 약탈해 온 여자는 '후엘룬' 으로 옹기라트 부족 출신으로 이 둘사이에 생긴 아이가 훗날 칭기스칸이 되는 '테무진'이다

 

 

 

칭기스칸(테무진) 태몽

칭기스칸(테무진)은 태몽부터 남달랐다. 칭기스칸의 어머니가 꿈을 꿨는데 게르에서 천장으로 새어 들어온 빛이 그녀의 배로 쏟아져들어왔고 이런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칭기스칸(테무진)이 태어날 때 오른손에 핏덩이를 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징기스칸이 세상을 정복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라는 소문이 퍼진다. 몽골에서는 현재도 핏덩이를 쥐고 태어나면 초원의 영웅, 전사가 태어났다는 좋은 징조로 받아들인다.

 

몽골의 전통 가옥 게르

 

 

당시 몽골 사회 모습

몽골 초원에는 당시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 다양한 민족에 유목 부족 집단의 사회였다. 당시에 세력이 강했던 나이만 ,카타르 ,메르키트, 케레이트와 같은 강력한 부족들과 여러개의 세력이 약한 유목 부족들이 분열 된 상태에서 함께 존재하고 있었고 몽골의 초원에서는 농사짓기가 어려워 물자 부족으로 12세기 중반 유목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격렬한 싸움과 서로를 약탈해야만 했다. 유목민은 겨울을 좋아했다. 그 이유는 강이 얼어붙어 말 타고 신속하게 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당시 몽골 부족(몽골어로 울르스) 중 주요 5개 부족 몽골, 타타르, 나이만, 메르키트, 케레이트

천고마비 유래

몽골 초원은 방어가 힘든 평야지대로 누구든 언제든 공격당할수 있기때문에 수비보다는 공격이 편하기 때문에 하늘이 높아지고 말이 살찌고 추수하는 가을이 오면  식량이 풍부해지니 유목민족이 약탈하는 시기로 유목민에 대한 두려움이 담긴 사자성어이다. 오죽하면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고자 중국이 만리장성을 쌓았다고 한다.

 

몽골을 위협하던 금나라 

칭기스칸(테무진)은 이 많은 부족 중에 세력이 약한 몽골 부족에 속해 있었다. 이렇게 세력이 약간 부족에서 태어난 칭기스칸은 몽골 초원 자체만도 통일 어려운 상태였다. 칭기스칸이 태어났을 때는 몽골 초원의 눈물이라고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으로 이런 몽골 유목민 전체를 위협하는 외부의 적인 여진족이 세운 금 나라도 있었다.

 

 

금나라의 몽골 견제 방법  '이이제이'

금나라는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군사력도 강하며 잘 사는 나라였다. 그러나 금나라는 점점 강력해지는 몽골 유목민들을 보고 위협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무자비한 방법으로 몽골 유목민들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이런 몽골 부족을 감시하기 위해 같은 민족의 타타르 부족을 앞잡이로 내세워 감시하게 하고 같은 민족을 학살했던 것이다. 금나라는 몽골 부족에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타타르 부족을 이용에 포로를 잡은 후 몽골 초원의 남자 아이들의 씨를 말려 버린다.

 

 

칭기스칸 혼인 동맹

이런 거친 야생의 땅 몽골 초원 속 혼란과 분열 속에서 생존한 칭기스칸(테무진)은 9세가 되던 해에 그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주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몽골 부족이 연합 세력을 얻기 위해 결혼 동맹이 중요했고 칭기스칸(테무진)은 9살에 다른 부족(옹기라트 부족)으로 아내를 찾으러 간다. 그리고 그들은 칭기스칸과의 혼인 약속을 허락하며 담비가죽도 선물받는다. 

 

*몽골어 사회의 인맥을 상징하는 안다(의형제)와 쿠다(사돈)

 

 

 

칭기스칸(=테무진) 아버지의 죽음

혼인을 통해 중요한 세력을 얻은 징기스칸 부족은 혼인을 약속하면 일정 기간 사돈 집에 남겨두는 몽골 풍습대로 칭기스칸(테무진)을 사돈집에 머물게 하고 칭기스칸의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의 적 타타르 부족을 만나게 된다.  칭기스칸 아버지는 타타르 부족, 즉 적의 술잔을 건네받게 된다.

 

테무진 아버지가 마신 술이 쉬밍아르히를 이용했다는 설, 아이락(말의 젖으로 만든 술로 도수는 1~3도로 아이들로 먹을수 있고 맛은 막걸리+요거트를 섞은 신맛이 강함)을 이용했다는 설이 있다. 이 술을 만들기 위해 후후르라는 통에 말젖을 넣어 수천번 저어서 만든다. 많이 저을수록 발효가 잘되기 때문이다.

 

당시 몽골에는 아무리 적이라도 베푸는 음식을 꼭 먹어야 하는 풍습이 있었다. 현재에도 음식을 대접 받으면 최소한 맛을 보는 것이 예의로 남아 있는 몽골이다. 역시나 타타르 부족은 술에 독을 넣었고 독을 마신 이수게이는 집에 돌아와서 죽게 된다.

 

* 몽골인들이 손님을 귀하게 여기는 풍습은 초원에서 자신이 손님이 되는 경우도 많고 손님은 타지의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고마운 사람으로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1206년 몽골 통일 후 테무진이 칭기스칸이 된 후 법령 제정시 '음식을 제공하는 사람은 그 음식에 독이 없는지 먼저 먹어본 다음 권할 수 있다'는 법령을 제정할 정도로 테무진에게 아버지의 독살은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칭기스칸(테무진)의 시련

아버지 사망 소식에 급히 집으로 돌아온 칭기스칸은 아버지 죽음을 슬퍼할 사이도 없이 모든 시련과 역경이 한꺼번에 밀려 온다. 몽골에서 부모없이 초원에 버려진다는 것은 사망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또한 칭기스칸(테무진)은 친척들과 부족 사람들에게까지 버림을 받고 남아있는 재산도 약탈 당하고 자신의 부족에게 버림받게 된다. (테무진에게 남은 가족은 9명이었는데 이 중에 성인 남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래서 테무진은 산속으로 들어가 들쥐, 생선등을 잡아먹으면서 연명하게 된다.  

 

포로가 된 칭기스칸(테무진)

몇년의 시간이 흐른 후 테무진 가족을 버리고 떠났던 씨족이 테무진을 잡으러 온다. 그렇게 포로 생활까지 하게 되면서 기나긴 고난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칭기스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테무진은 너무 어린나이여서 죽이지 못하고 스스로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초원에 버리고 떠났던 부족이 어느새 성장한 테무진이 복수 할 것이 두려워 잡으러 온 것이였다.

칭기스칸(테무진)은 포로가 된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기회를 엿본다. 몇 달이 지난 후에 그에게 탈출의 기회가 찾아 왔고 탈출을 하자마자 그의 아내 부르테가 있는 부족으로 찾아간다. 

 

 

메르키트 공격

얼마 후에 칭기스칸의 아내 부르테를 메르키트 부족이 약탈해 간다. 이렇게 아내를 잃게 된 칭기스칸은 아버지의 의형제였던 케레이트의 우두머리 '옹칸'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아내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또 한명 칭기스칸의 의형제 ‘자다란 자무카’ 의 도움도 함께 받아 메르키트를 공격한다. 메르키트와의 치열한 전투 끝에 자신의 부인을 찾아오고 전리품을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메르키트와의 전투 후 테무진의 명성을 널리 퍼지게 시작한다. 그리고 칭기스칸은 초원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1차 전쟁 칭기스칸 (테무진 칸) vs 자무카  : 달란 발주트 평원 전투

1186년 마침내 몽골부의 칸이 된다. 칭기스칸이 몽골 부의 칸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의형제였던 자무카의 부족 내에서 불만을 갖는 사람들이 증가한다. 심지어 칭기스칸에게 가려고 무리를 이탈하는 사람까지 발생했다. 이에 자무카는 분노에 쉽싸이게 되고 칭기스칸과 자무카 사이에 전쟁(1190년)이 일어나게 된다. 13개 부족을 모아 달란 발주트 평원 1차 전쟁에서 전쟁 경험이 많고 압도적인 병력을 가진 자무카가 승리한다.

 

자무카의 실수

그러나 칭기스칸(테무진)은 이 전투에 졌지만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전쟁에 패배했지만 자무카의 부하들은 계속 칭기스칸에게 도망을 쳤고 옛날 자신의 부하였지만 칭기스칸(테무진)에서 도망쳤던 부하 중 포로로 잡혀 있던 자무카의 옛 부하들을 끔찍하게 솥에 삶아 죽인다. 약육강식의 초원에서도 이런 극악무도한 행동은 드문 일이였다. 이런 일로인해 자무카는 자신의 세력 안에서도 인기와 신뢰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렇게 칭기스칸(테무진)은 몽골부의 세력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한다.

 

몽골에서 '팽형'은 영혼까지 증발시켜 없앤다는 의미로 최악의 극형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형벌을 자신의 부하에게 행했던 자무카였다.

 

2차 전쟁 칭기스칸(테무진 칸) vs 자무카 연합군 (쿠이텐 전투:1201년)

이에 위협을 느낀 주변 세력들은 자무카 세력과 연합하여 2차 전쟁을 칭기스칸과 하게 된다. 이때 전장 선택이 칭기스칸에게 있었는데 선택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칭기스칸은 불리한 위치를 선택한다. 당시 몽골은 전쟁 시 전쟁 지역의 위치 선택권은 약자에게 부여했다. 

 

이때 징기스칸은 산꼭대기가 아닌 언덕을 선택했고 그에 따라 새로운 전술을 구사했다. 고지를 내어준 대신 꼭대기에 있는 적을 사방을 포위하고 먹을 것도 없고 무기가 떨어지면 고립이 되기 때문에 자무카의 군대는 어떤 지원도 받을 수가 없게 되었고 1201년 쿠이텐 전투에서 지략으로 자무카 연합을 격파한 칭기스칸이었다 .

 

 

타타르 정벌

이후에 칭기스칸의 몽골부는 세력을 확장하면서 나이만 케리이트, 타타르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성장 한다. 칭기스칸(테무진)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 부족인 타타르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부하들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테무진은 전리품 배분 방식을 바꿨다. 전쟁 후 전리품을 모아 공정한 방식으로 배분했고 전사자에게도 그의 가족들에게 전리품을 배분했다. 그렇기 때문에 칭기스칸의 군대는 최선을 다해 싸웠고 몽골지역의 동부지역을 거의 장악하게 된다.

 

이에 칭기스칸(테무진)의 부하들은 전력을 다해 싸우기 시작한다. 1202년 마침내 칭기스칸(테무진)은 타타르를 정벌하고 아버지의 복수에 성공한다.

 

 

케레이트 복속

타타르에 이어 케레이트까지 복속시킨다. 특히 전쟁에서 패하고도 복속하지 않은 자들은 철저히 파멸을 시킨다. 성인들을 철저히 멸족을 시켜야 복수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체험으로 터득 했던 칭기스칸(테무진)이었다.

 

이제 나이만과의 전쟁에 공을 들이기 시작한다. 전투에 패한 의형제 자무카가 나이만으로 달아났기 때문이다 . 그런데 몽골부는 군사의 수가 수적 열세에 있었기 때문에 군사 수를 많아 보기에 하기 위해 칭기스칸은 예비마에 허수아비를 앉히고 말꼬리에 나뭇가지를 묶어서 뛰어다니게 만들었다. 

 

 

 

자무카의 죽음

이에 나이만에 숨어 있던 자무카는 다시 탈출을 시도하려했으나 자신의 부하에게 잡혀 칭기스칸(테무진)에게 자무카를 데려간다. 자무카를 포로로 넘기면 큰 상을 받을 것이라 기대했던 부하들이었다. 그러나 칭기스칸(테무진)은 자신의 주군을 배신한 부하는 용서 할 수 없다고 하여 자무카를 배신한 부하들을 처형 한다.

 

자무카 또한 처형을 해야 했다. 자무카는 귀족이였으므로 당시 몽골의 명예로운 죽음의 의미로 귀족은 땅에 피를 흘리고 죽으면 안 되는 풍습이 있었다. 이로 인해 칭기스칸(테무진)은 짐승의 털로 만든 천 펠트에 말아 말들이 밟아서 죽이게 한다.

 

 

1206년 칭기스칸되다. 

징기스칸은 강한 자만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몽골의 초원을 하나로 통일을 하고 1206년 몽골 제국의 '대칸'에 오른다. 대칸이 된 칭기스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경쟁 부족에 우두머리를 제거하고 씨족 부족 단위의 몽골 초원을 모두 해체한다. 군사 개편과 법률을 편찬하면서 다시 제편성을 한다.

 

테무진은 쿠릴타이(몽골인을 비롯한 북방 유목민 사이의 합의제도)를 열어 '세계 지배자'라는 뜻의 칭기즈 칸에 추대되었다.

 

군사 개편

15~70세 까지 병역은 필수였다. 정복 전쟁 후 전리품은 모두 그들에게 돌아갔다. 당시 유목민들에게 전쟁 참여는 남자로써 큰 자부심이었다. 원래 몽골에 군사 제도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규율을 따르고 있었는데 십호(아르반 10명의 기마병으로 구성)가 기본이었고 백호 (자군) 백명의 기마병 구성, 천호(밍간), 만호의 실제병력은 대략 6000~7000명 정도였고 , 만호장, 천호장, 백호장까지는 칭기스칸이 직접 임명하면서 모든 권력이 집중되도록 하는 중앙집권적 군 체계를 정비했다.

 

십진법 단위 부대 편성은 칭기즈칸 이전부터 유목민들 사이에 존재했으나 천호제 단위의 지휘관을 혈연관계가 아닌 충성심과 능력 위주의 임명했기 때문에 노예출신의 천호장들도 존재했었다. 

 

그러나 능력만 있다면 가장 말단에서 만호장까지도 진급이 가능했던 능력제로 운영했다. 이렇게 새롭게 재편된 군사 조직은 거대한 몽골 제국의 초석이 된다.

 

*케식(Keshik) : 천호장, 백호장 등 귀족의 아들들을 모아 구성된 칭기즈칸의 친위대가 밤낮으로 왕실 가족을 호위하게 했다. 몽골에 인질로 간 고려 왕자도 케식의 일원으로 간것이다. 

 

 

몽골의 법률 '예케 자삭'

또 다른 강력하고 무자비 한 법 ‘예케 자삭(=자사크=사형)’ 이라는 법을 만들어 민심과 군대를 장악했다.

 

  1. 여행자를 돕지 않으면 사형, (몽골에서 여행자를 돕지않으면 그사람을 죽게 버려두는 것과 마찬가지 이므로 지금도 몽골 초원에 가서 게르에 그냥 들어가도 된다, 앉으면 먹을것을 그냥 준다)
  2. 물이나 재에 소변을 보면 사형 (최대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몽골의 겨울이기 때문에 불씨는 생명과 같다)
  3. 가출한 노예나 포로를 발견하고주인에게 돌려 주지 않으면 사형
  4. 간통한 자, 거짓말한 자, 다른 사람을 몰래 훔쳐본 자, 남의 싸움에 개입해 한쪽을 편드는 자 사형 

 

 

 

칭기스칸 노래 

1979년 결성된 독일 팝 그룹 징기스칸의 징기스칸 (한글자막을 넣어 놔서 더욱 재미있네요 )~ : 유럽에도 징기스칸에대한 영향력이 엄청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룹이다.

 

 

[벌거벗은 세계사 21-1  징기스칸의 정복활동/역사저널 327회]

 

징기스칸은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나[21-2]?

 

징기스칸은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나?

칭기스칸이 몽골의 대칸이 되기까지 ~ (몽골 통일 과정) 징기스칸의 정복 전쟁 분열된 몽골을 통일 한 후 징기스칸은 정복 전쟁에 나선다. 통합 전 혼란한 시대였던 몽골은 식량부족과 가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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