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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몽골 쿠빌라이 칸 고려 덕분에! 원나라 탄생까지~

by 365 ^^ 2021. 10. 27.

[이전 이야기 ]몽골 우구데이 -구육칸 - 몽케칸 유럽 정복

 

1279년 몽골 쿠빌라이의 남송 정복이 이루어졌다. 몽골제국의 염원이었던 중국 대륙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것이다. 이때 이방인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 칸 몽골제국을 17년간 머물며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쿠빌라이를 이렇게 기록했다.

 

 

쿠빌라이는 어떻게 칸이 되었나?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 가계도

 

쿠빌라이의 형이 뭉케가 제4대 칸이였기 때문에 사실 쿠빌라이는 칸이 되기가 쉽지 않았다. 1259년 남송 침공에 나섰던 뭉케가 전염병으로 갑자기 사망한다. 뭉케칸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너무 어려서 뭉케의 동생들이 차기 칸 후보로 거론되었다. 쿠빌라이가 차기 칸 후보자로 거론되기 시작했었으나 유력한 칸 후보는 아니였다.

 

 

4대 뭉케 칸은 남송 정벌을 떠나기 전에 아릭 부케에게 자신의 울루스와 군대를 위탁했고 뭉케의 아들, 주요 귀족들이 아릭부케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릭부케가 차기칸으로 유력했다. 

 

 

 

 

그때 고려 태자는 30년 가까이 전쟁 중이던 몽골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뭉케 칸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그러나 가던 중 뭉케 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고려 태자는 다음 칸 아릭부케와 쿠빌라이 사이에서 고민하던 중 쿠빌라이를 만나 항복 의사를 표시한다.

 

쿠빌라이는 아릭부케보다 정통성면에서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업적 하나하나가 아주 소중한 상황이었다. 몽골은 고려와 약 30년 동안 복속 시키기 위해 전쟁을 이어왔으나 뚜렸한 성과가 없었다. 그렇게 저항했던 고려에서 항복을 했기때문에 칸이 될 수 있는 성과를 적립한 것이라 볼수 있었다. 

 

쿠빌라이 스스로 칸되다. 

당시 쿠빌라이는 뭉케를 따라 남송과 전쟁 중이었고 뭉케가 사망하자 모든 군대가 본토로 귀환 후 아릭 부케가 다음 칸이 되는 것이였으나 자신의 군대를 유지한채로 북쪽으로 전쟁으로 하러 갔다. 그것은 반란이었으나 이때 고려 태자가 가서 항복을 한 것이다. 그리고 수도 카라코룸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쿠빌라이 근거지 개평에서 쿠릴타이 회의를 개최한다.  쿠빌라이는 근거지에서 지지 세력만 모여 쿠릴타이를 개최 후 몽골 역사상 최초로 반쪽짜리 쿠릴타이를 통해 스스로 칸으로 등극한 것이다.  

 

몽골 최초 동시에 2명 대칸 탄생

이에 아릭부케의 반응은 쿠빌라이가 칸이 되었다는 이 소식을 듣고 한 달 후 초원에서 쿠릴타이를 열고 아릭부케도 칸이 된다. 이로써 몽골제국 역사상 최초로 대칸이 2명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260년 내전이 발발 4년간 지속된다.

 

몽골의 분열

전투는 막상막하였으나 쿠빌라이가 러시아, 중앙아시아, 중동 지역의 울루스를 포섭 후 각각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쿠빌라이를 지지하며 외교전에서 승리하게 되고 아릭부케는 고립되어 결국 쿠빌라이에게 항복하면서 몽골제국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이자 분열되는 것이었다. 

 

쿠빌라이칸 부터 몽골은 4개의 자치 울루스로 나뉘게 된다. 

 

그 후에 아릭부케는 독살당한다. 이때 고려 원종은 6가지를 요구한다. 

 

쿠빌라이는 마지막 조항만 조종을 하며 이 조건을 모두 수용한다. 몽골에 이미 들어온 고려인(친몽파)은 어쩔 수 없고 앞으로는 받아주지 않겠다고 했다.  

 

 

원나라의 시작(탄생)

1267년 쿠빌라이는 카라코룸 몽골 수도에서 새로운 수도 현재의 베이징에 '대도'를 건설하고 1271년에  몽골의 새로운 국호 '대원' 을 발표한다. 이것이 원나라의 시작이다. 몽골의 원래 국호는 '예케 몽골 울루스'였으나 이 이름은 자신이 통치할 중국인들이 인식하기 여려운 몽골식 국호여서 국호를 번역한 것이 '대원'이었다.  

 

대도는 유목민과 정주민 모두 통치 가능한 중요한 전략적 지점이었다. 바다부터 대도 성까지 이어지는 운하를 건설하여 수로를 구축했다. 

쿠빌라이는 정복 이후에 그 지역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통치할까를 고민했던 군주였다. 남송 정벌때에도 다양한 민족으로 군대를 활용했다. 다민족, 다문화를 실현한 군주였던 것이다 .

 

쿠빌라이의 다민족, 다문화 포용 정책

쿠빌라이 정책에 대한 오해로 몽골인과 다른 민족을 차별했다고 배웠으나 차별이 아니라 구별했다. 이는 각 나라, 민족의 문화를 인정하다보면 각 각의 집단이 자연스럽게 구별될 수밖에 없어 다양성이 살아 있었던 플랫폼, 몽골제국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이 그림처럼 지배층 피지배 계층을 구분한 것이 아니다. 다양성이 살아있는 민족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쿠빌라이는 정부 요직에 수학에 능통한 이슬람교도를 등용했는데 이들이 수학을 잘 했던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가 있다. 이슬람교도 들은 살라트[Salat] 하루에 다섯 번 몸을 깨끗이 하고 무함마드의 탄생지인 메카를 향해 행하는 이슬람의 예배를 위해 기도 시간, 방향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수학을 이용해 이 정보를 알아냈다. 이들이 남송정벌때 중요한 무기였던 투석기와 비슷한 회회포를 발명했다.

 

회회포 기존의 투석기는 사람들이 투석하는 방식이여서 비거리가 짧지만 이것은 중심포를 무겁게 해서 더 무겁고 더 먼거리에 돌을 날릴 수 있다. 

 

남송정벌

결국 1279년 남송은 무너졌다. 정통성 논란을 약점을 가진 쿠빌라이에게 남송정복은 큰 성과였다. 중국전체를 장악하는 것은 쿠빌라이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였고 이를 달성한 최초의 대칸인 것이다. 

 

 

중국 남송 정벌이 갖는 의미

쿠빌라이 시대때 가장 부유한 남송의 수도 임안은 현재 중국 항저우이다. 쿠빌라이는 중국 남부지역의 높은 경제력 확보가 큰 과제였다. 

 

쿠빌라이 칸 영토

중앙아시아 중동, 유럽 등 몽골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의 통치자 쿠빌라이는 몽골 제국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쿠빌라이 시대 몽골제국의 영토 3,300만 km2 로 한반도의 15배이다.

 

칭기즈칸이 몽골제국을 탄생시켰다면 몽골제국을 확장시킨것은 쿠빌라이라고 볼수 있다. 

쿠빌라이는 무역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시켰고 몽골 고유 문자를 창제했다. 칭기즈칸이 정복했던 영토보다 쿠빌라이 남송 정벌 후 영토가 훨등히 넓은 것을 알수 있다.

 

남송을 차지하면서 바다를 차지하게 된 몽골은 말을 타던 몽골인들이 바다로 나갈수 있는 길이 열었다. 몽골의 역사에서 가장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 쿠빌라이는 다양한 통치 방식을 활용하고 다민족 인재를 등용하면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라는 번영기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33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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