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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충렬왕 제국대장 공주 (고려와 몽골 황실의 최초의 혼인)

by 365 ^^ 2021. 10. 27.

역사상 최고의 정복자 칭기즈칸과 그의 후예들은 아시아와 유럽 대륙의 드넓은 영토를 지배한다.  이른바 팍스 몽골리카 시대를 연다.

 

팍스 몽골리카 빨간색 

몽골 5대 카안 쿠빌라이는 1271년 국호를 대원으로 변경하고 남송 정벌에 이어 다음 목표 일본으로 눈길을 돌린다. 쿠빌라이는 1차 일본 원정에 앞서 고려의 태자를 사위로 맞이하기 시작한다. 고려와 몽골 황실의 최초의 혼인은 두 나라의 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고려 원종(충렬왕) 몽골 황실 혼인 제안

몽골 황실 결혼의 프로포즈는 고려에서 먼저한다. 당시 고려는 무신집권기로 고려의 왕권은 불안했고 1269년 6월 고려 무신 임연이 원종을 폐위시키고 안경공 왕창을 왕위에 옹립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때 마침 원에 머물던 고려 원종의 태자 왕심은 쿠빌라이에게 이 사건을 이야기하고 쿠빌라이의 압력으로 고려 원종은 복위된다. 

 

복위 하자마자 다시 원종은 쿠빌라이를 찾아가 군대를 주면 무신정권을 무너드리고 수도를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옮기겠다고 제안하고 동시에 청혼까지 한 것이다. 이에 쿠빌라이는 완곡히 거절을 한다. 

 

 

그러나 원종은 포기하지 않고 청혼 후 태자 왕심을 몽골의  '숙위'로 보낸다.  숙위란 몽골 황제 호위 명목으로 속국의 왕족들을 볼모로 머물게 하는 제도로  황제의 경호 임무기 때문에 몽골 황제의 츤근이 될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고려에서도 고려 왕위 후계자의 통과 의례처럼 몽골 숙위 생활이 일반화 되어있었고 숙위생활을 하던 중 쿠빌라이는 국혼을 허락한다. 

 

 

쿠빌라이가 혼인을 허락한 배경

1274년 5월 원나라에서 열린 결혼식 쿠빌라이가 45세에 낳은 딸 16세 쿠틀룩켈미쉬 공주와 고려의 태자 왕심(훗날 제 25대 충렬왕)이었다. 고려는 28년간 항쟁을 했던 나라였고 또한 몽골제국 대칸의 금지옥엽 딸은 1남 2녀를 이미 두고 있는 39살의 유부남 왕심과 결혼한 것이다.

 

당시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계획하고 있었고 일본 원정을 위해서는 고려의 원조가 반드시 필요했고 이때는 아직 남송 정복 전이였기 때문에 혹시나 있을 남송과 고려의연합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청혼에서 결혼까지 1270~1274년 4년이라는 시간 동안 고민하고 쿠빌라이도 결정한 것이다.  

 

 

이 4년동안 고려에서는 삼별초의 항쟁이 있었다. 청혼시기는 고려 무신정권 시기, 무신정권 이후 삼별초 대몽 항쟁(1270~1273)원종의 개경 환도 명령에 반발하여 삼별초 군대가 일으킨 반정부, 반몽골 항쟁이 이어지고 있었고 삼별초 대몽항쟁 종료 후 고려와 국혼을 수락한 쿠빌라이였다. 쿠빌라이는 고려의 불안요소가 사라진 후 결혼을 허락한 것이다. 

 

(몽골어로 안다=의형제/ 쿠다= 사돈) 당시 몽골은 쿠다 관계를 통해 정치적 동맹을 맺는 몽골 사회였다.  또한 몽골 입장에서 대 몽골제국의 대칸의 친딸이 타국인과 혼인한 것도 고려가 최초였다. 

 

귀국 후 고려 태자의 모습

1273년 3월 쿠빌라이에게 혼인을 허락받고 고려로 돌아온 태자 왕심의 모습을 본 고려 태자의 모습은 몽골인 그 자체였다. 몽골식 개체 변발 (앞머리와 좌우 머리만 남기고 정수리 부분 삭발)을 한 것이다.

 

당시 이 같은 태자의 모습을 본 고려의 백성들은 탄식과 통곡까지 했다고 한다. 그만큼 몽골인에 대한 저항과 부정적 인식이 강했던 것이다. 
몽골제국 역대 칸의 모습 

 

1274년 5월 쿠빌라이의 사위가 된 고려 태자 왕심은 같은 해 고려 제 25대 충렬왕으로 즉위한다. 

 

 

제국대장공주는 어떤 인물? 

본명 '쿠틀룩켈미쉬' 로 제국대장공주도 사후에 받은 시호이다. 노국대장공주, 제국대장공주등 이름에 모두 '대장' 이 들어가는 이유는 대장공주='황제의 고모'에게 붙이는 칭호로 제국대장공주 사망 후 조카인 원 무종이 올린 시호를 내린 것이다. 

 

대칸의 딸이 어떻게 두번째 부인으로 시집을 가느냐고 할수 있으나(누가누구를 걱정할까? )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의 첫 부인을 밀어내고 정비가 된다. 제국대장공주의 아들 출산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다툼이 벌어지고 이때 자신의 권력을 과시했고 1279년 충렬왕 첫째 부인의 아들을 출가시킨 제국대장공주였다. 

 

또한 제국대장공주가 어느날 충렬왕과 사찰을 방문했는데 그때 자신의 시종 숫자에 불만을 갖고  충렬왕 남편을 구타한 모습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한 사냥좋아하고 정사 안좋아하는 충렬왕에게 국정에 대한 충고까지 했다. 

 

고려에 대한 몽골의 통제

이때부터 고려에 대한 몽골의 통제가 이루어진다.  

 

▷고려의 정치 제도 2성6부->첨의부 4사 로 격하

▷왕실 용어도 태자->세자, 폐하-> 전하 격하

▷25대 충렬왕~30대 충정왕까지 충이 들어간 고려 왕들의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왕이라는 칭호로 바뀐다. 이전에는 조나 종의 묘호를 쓰던 이전 고려 왕들 태종, 세종, 세조 등등등... 그러나 이때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등 격하된 시호를 사용했다. 

 

몽골과의 혼인으로 충렬왕이 얻은 것.

황실의 사위 부마로써 충렬왕의 지위는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제국대장 공주는 쿠빌라이 대칸의 딸이자 칭기즈칸의 증손녀로 충렬왕의 지위도 몽골제국에서 높아질수 밖에 없었다. 충렬왕은 쿠릴타이 회의에 참석할수 있는 권한이 생긴 것이다.  쿠릴타이 회의에서 7위의 서열이였다. 

 

고려에 흉년이 있을때 원나라에서 쌀 10만석을 보낸 기록이 있다.

 

스스로 변발까지 해가며 충렬왕이 얻은 것은 ? 

몽골제국 부마의 지위를 이용 고려 국왕의 지위를 높이려고 했고 실리 외교를 통해 즉위 4년에 원을 방문해 쿠빌라이를 만나서 몇가지를 요구한다. 

 

▶고려 주둔 중인 몽골군 철수 

▶원이 고려 내정간섭 목적으로 파견한 관리 다루가치를 폐지 

▶고려의 호구 조사 결과보고를 요구했던 몽골이었으나 호구 조사 폐지로 세금 문제를 해결

 

충렬왕은 고려의 국왕은 나 ,고려 일은 국왕인 내게 맡기시길 ,또한 너무 무리한 요구는 들어 줄수 없다.는 것을 보였고 이러한 고려의 특수한 지위를 보여준 기록이 남아있다. 

 

원나라 황제였던 무종이 이런말을 한다.

여기서 삼한은 고려를 의미 /강대한 몽골제국을 상대로 국가 체제를 유지하면서 독립성을 유지하려던 고려의 상황을 원나라 황제가 인정한것이다. 

 

충렬왕의 아들 왕원 훗날 충선왕이 탄생한다. 충렬왕은 아들 충선왕에게 왕위를 어쩔수 없이 양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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