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과 김춘추의 복수극
의자왕 뜻
의자왕은 백제 31대 마지막 왕으로 의로울 의, 자해로울 자의 의자왕으로 '해동증자'라는 별명이 있다. 해동=우리나라 증자=공자의 제자이자 유학자로 뛰어난 효성으로 유명하다.
의자왕 즉위(641년)
의자왕은 641년에 즉위한다. 집권초기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고 사기를 북돋워주는 왕이었다. 의자왕의 어머니는 무왕이 왕이 되기 전에 지방 귀족의 딸과 만나 의자왕을 낳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의자왕의 외가는 유력한 귀족의 가문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태자 책봉 즉위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고 있다. 따라서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민심을 살피면서 한편으로는 왕권 강화에 힘을 썼던 의자왕이었다.
의자왕 신라에 복수 결심
의자왕은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 무관 도도에게 목이 잘려 죽임을 당한 백제의 26대 왕인 성왕의 고손자뻘 된다. 백제 성왕이 묻혀 있는 곳은 신라 왕궁 계단이었다. 554년 12월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왕이 성왕의 머리를 북청(궁궐 안) 계단 아래 묻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개로왕-성왕 이야기 (백제왕들은 어쩌다 전투에서 죽음을 당했나? )
그래서 의자왕은 성왕의 복수와 더불어 신라에게 뺏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한 복수를 한다.
신라의 김춘추와 김유신의 동맹
김춘추는 삼국통일의 주역이자 신라 제 29대 왕으로 선덕여왕의 친 조카이다. 그러나 김춘추는 처음부터 신라 귀족 사회에서 힘이 있었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래서 김춘추는 김유신의 동생(문희)과 결혼하면서 가족+정치적 동맹을 맺게 된다. 김춘추는 음란하다는 이유로 폐위된 제 25대 진지왕의 손자이고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마지막왕 구해왕의 후손이었다. 그 당시 김춘추는 전통 진골 귀족의 견제를 받고 있었고 김유신은 가야계 출신으로 홀대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백제 의자왕의 대야성 공격(642년)
642년 8월 백제 의자왕이 윤충 장군을 보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면서 김춘추와 김유신은 위기를 맞게 된다. 대야성의 성주는 김춘추의 사위로 이 전투에서 김춘추는 딸과 사위를 모두 잃는다.
대야성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 지역의 옛 지명으로 대야성 함락은 신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순식간에 낙동강 서쪽의 옛 가야지역이 뚫리면서 백제땅이 되어 버려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대야성까지는 140 km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까지 백제가 진출한 것이다.
신라의 요충지 대야성을 쉽게 빼앗긴 이유는 김춘추의 사위이자 당시 대야성 성주인 김품석이 자신의 부하 검일의 아내를 빼앗아 첩으로 삼으면서 백제와 내통을 해 대야성 창고에 방화하면서 신라군이 우왕좌왕하게 되고 결국 대야성이 백제에 함락된 것이다.
김춘추의 복수 다짐
김춘추 고구려와 동맹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딸을 잃고 자신의 사위로 인해 대야성 함락되자 김춘추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위기를 맞게 된다. 이런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김춘추는 고구려와 손을 잡는다. 642년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난을 일으켜 보장왕을 옹립하고 정권을 장악한 때로 연개소문과의 연합을 목표로 고구려로 향한다. (평양회담)
**642년 대표적인 사건
- 백제 의자왕 대야성 점령
- 김춘추.연개소문의 평양회담
고구려 보장왕은 김춘추에게 죽령(한강유역)을 내주면 군사를 보내준다고 하니 김춘추는 이를 거절하고 이에 보장왕은 김춘추를 바로 감옥으로 보내고 김춘추를 구하기 위해 김유신이 고구려로 진격하니 이에 고구려는 김춘추를 돌려보낸다.
의자왕의 당항성 공격(643년)
643년 의자왕은 다시 한번 신라를 공격한다. 이때는 백제 + 고구려 연합으로 현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삼국시대부터 중국으로 향하는 대표적인 교통로였던 당항성을 공격한다. 이 후로부터는 고구려 백제연합으로 신라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김춘추 + 왜 동맹 시도(645년)
645년 김유신이 비담의 난을 진압하고 있는 동안 친백제 정권이었던 왜가 무너진 틈을 이용해 김춘추는 왜와의 동맹을 모색하기 위해 왜로 갔으나 동맹에 성공하지 못한다.
신라 비담의 난 (647년)
647년 신라에는 내란이 발생한다. 당시 선덕여왕이 몸이 좋지 않았고 김춘추와 김유신은 선덕여왕 사촌 승만 공주를 다음 왕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신라 최고 관식 상대등 '비담'이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 하여 비담이 난을 일으킨다. (비담의 난) 이를 김유신이 진압하고 승만 공주를 왕으로 즉위시킨다. 그녀가 바로 신라 제28대 왕 진덕여왕이었다.
김춘추 나당 동맹 (648년)
김춘추는 648년 다시 당나라로 갔다. 당태종은 뜻밖에 김춘추를 환대했다. 여자가 왕이라고 무시하던 당나라였는데 (당태종이 수십만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침공했으나 고구려의 승리로 끝난 전투) 안시성 전투의 보복을 위해 648년 대대적인 고구려 침공 계획을 세우던 당태종이었기에 적절한 시기에 찾아간 신라 김춘추에 군사 지원을 약속한다. (나당 동맹)
이 동맹에서 고구려땅은 당나라가, 평양 이남땅은 신라가 차지하기로 약속을 한다. 또한 김춘추는 당 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로 약속하고 중국의 ‘영휘’ 라는 연호를 사용한다. 649년 봄 정월에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기까지 한다.
나당 동맹 체결후 백제의 기이한 일 속출
나당 동맹 체결 이후 백제 안에서도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사비성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했고 4월엔 두꺼비 수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여있는 모습에 주민들이 놀라 달아나다가 100여명이 죽는 참사까지 발생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6) 또한 궐 안에서 백제가 망한다는 기괴한 소리까지 들려 소리가 나는 곳을 파보니 그 안에 거북이 한마리가 발견되었고 거북이 등 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황산벌 전투 (660년)
660년 6월 나당 연합군은 백제의 사비성을 공격한다.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군은 결사항전했으나 김유신이 이끄는 18만 나당 연합군의 공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하루 만에 백제군의 패배로 끝난 황산벌 전투로 사비성이 함락된다.
의자왕 항복 백제 멸망
의자왕 또한 태종 무열왕 (김춘추)에게 항복하며 백제의 700년 역사는 막을 내린다. 18년 전 대야성에서 딸과 사위를 잃어버렸던 김춘추의 복수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백제 멸명에는 의자왕의 책임 컸다고 볼수 있다.
의자왕은 왕권이 안정되자 주색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정사를 볼보지 않았다. 나당연합군이 체결됨을 알고 충신들이 침공에 대비를 간언했지만 의자왕은 이를 무시했다. 아무런 대비책없이 안일한 대처로 의자왕은 백제를 내어준 것이다.
의자왕의 최후
항복 후 의자왕과 그의 아들 및 백제 백성 1만 2천8백7인을 당의 수도에 포로로 보냈고 당 고종이 의자왕의 죄를 용서하고 660년 석방 후 의자왕은 병으로 사망한다. (삼국유사 권 제1 태종 춘추공)
[3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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