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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무령왕 출생의 비밀 (무령왕의 아버지는 동성왕이 아니다!?)

by 365 ^^ 2021. 9. 17.

고구려 침공으로 501년 무령왕은 백제 멸망 위기에 즉위한 왕이었다. 개로왕이 시해를 당하고 문주왕이 충남 공주에서 22대 왕으로 등극한다. 그러나 웅진 천도 후 귀족들의 반란이 벌어지면서 477년 문주왕이 시해당하고 문주왕의 아들 3살 삼근왕이 23대 왕으로 2년 동안 즉위한다. 그리고 24대 동성왕 또한 시해된다. 이런 왕족들의 피로 물든 웅진 백제의 혼란을 수습한 왕이 무령왕이었다 

 

백제 왕 계보 (21대~26대) 

★백제왕들은 어쩌다 전투에서 죽음을 당했나? )

 

 

무령왕릉 발견의 의미

삼국사기에는 무령왕릉 아버지가 동성왕인 것으로 나와있으나 이 내용은 무령왕릉에서 지석이 발견된 이후 오류로 밝혀졌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역사 속 패자로 남은 백제는 역사에 대해 왜곡된 부분이 많이 있다. 웅진백제 왕권 추락, 불확실한 계보로 많은 부분을 알기 힘들었던 백제였는데 이것을 만회한 사건이 1971년 7월 무령왕릉의 발견이었다.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백제의 계보가 달라졌다. 1971년 긴 장마로 공주 송산리 6호분 배수로 공사가 진행 중인 때였다.  공사 중 인부의 삽 끝에 걸린 단단한 물체가 부딛혔다. 이것은 바로 백제왕의 무덤이었던 것이다.   

 

무령왕릉 발굴 일화

 

무령왕릉 발굴 일화 IN 송산리 고분군, 공주 (웅진) 곰나루 설화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8회] 오늘의 탐사지: 공주(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 주제: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출연자: 박찬호, 러블리즈 미주 공주의 자랑 옛날 백제 수도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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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 출생의 비밀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확인 결과 무령왕은 461년 경에 태어났고 501년 마흔 살에 즉위했다. 동성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아빠보다 나이가 더 많은 것이다. 무령왕의 계보는 중국의 기록,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의 기록이 모두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 일본서기에 무령왕의 탄생 일화가 적혀있다

 

무령왕이 태어난 곳

 

무령왕은 가카라시마라는 곳에서 태어났고 고구려의 위협에 시달리던 개로왕은 461년 그의 형제 곤지를 일본에 보내 도움을 요청하도록 했다. 그러나 일본으로 가는 길에 개로왕의 많은 부인 중 만삭의 부인을 데려가겠다고 요청했다. 개로왕은 이 요청을 수락했고 곤지와 함께 일본으로 가던 개로왕 아내는 기카라시마 섬에서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무령왕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오비야 동굴 
백제 무령왕을 위한 제단까지 갖춰진 곳이다.
일본 가카라시마 섬 오비야 동굴
캇 태어난 무령왕을 씻겼다는 우물도 옆에 있다.

 

일본 서기 기록된 무령왕 내용 믿을만한가?

이 내용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내용으로 일본서기는 720년에 완성된 일본 최초의 정사로 고대 한일관계에 관한 중요한 기사가 많지만 윤색과 왜곡이 자주 나타나는 역사서이기도 하다.  일본에 정착한 백제인들이 쓴 역사서를 참고한 부분인 '백제삼서'라고 있다. <일본서기>의 백제 관계 설명에 많이 인용된 사서<백제기><벡제본기><백제신찬> 3개의 기록은 그래도 믿을 만하다고 본다.  

 

무령왕의 아버지는 누구? 

어쨌든 무령왕 지석을 통해 <삼국사기> 오류가 발견되고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무령왕의 아버지는 곤지일 가능이 높다. 한성 백제 마지막 왕인 개로왕의 혈통임을 강조해 왕권의 정통성을 얻으려 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21대 개로왕, 22대 문주왕, 곤지는 형제이다.  문주왕의 아들이 삼근왕, 곤지의 아들로 추정되는 동성왕과 무령왕으로 백제의 계보가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 무령왕 가계도

 

백제 개로왕, 문주왕, 곤지(삼형제)는 고구려 장수왕에 맞서기 위해 문주왕은 신라로 파견해 구원병요청을 했고 곤지는 일본으로 보냈던 것이다. 곤지의 흔적은 일본 오사카에 곤지를 모시는 신사가 있다. 이것은 일본에서 곤지는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위기 속 백제가 찾은 새로운 외교전략은 백제가 귀한 동물을 일본에 보낸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와있다. 

 

일본 오사카에는 무령왕 아버지 추정 되는 곤지를 모신 사당이 있다. 

 

무령왕의 외교정책 

당시 한반도에 서식하지 않았던 앵무새를 일본에 보냈는데 6세기 백제는 고구려에 굴복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외국과의 교역을 시도했다.  중국 양나라뿐만 아니라 일본 동남아시아까지 교역 체계를 구축했다.  

 

일본서기 권 22에는 599년 9월 1일 백제가 나타 한 필, 나귀 한 필, 양 두마리, 흰 꽁 한 마리를 바쳤다 고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에서 성왕으로 이어지는 6세기 백제는 대항해시대를 열어가고 있었다. 무령왕 집권기에는 문화전파속도가 빨라졌고 문화의 고속도로를 개통한 무령왕이었다.  현재 일본인들이 즐기는 전통적인 일본문화는 백제에서 넘어왔다고 말하는 일본교수들도 있다.  불교, 기와, 탑, 회화, 음악, 미술, 약학, 국가 운영시스템등  일본의 7세기 아스카문화는 일본판 백제문화이다.  

 

당시 백제는 일본보다 인구수가 적어서 백제의 생존 전략은 고구려의 공격을 버티는 것이었으므로 군사력, 용병이 필요했고 기록에 보면 백제를 위해 싸우다 죽은 왜병, 일본에서 태어났는데 백제의 벼슬을 하고 한반도에 묻히거나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관산성 전투(544)에서 백제 왕자 여창(위덕왕)을 왜인들이 구출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관산성 전투, 성왕 위덕왕 이야기 in 백제문화단지

 

 

중흥군주 무령왕 

475년 백제 한성은 고구려의 공격으로 함락되고 개로왕 전사, 왕족 사망등 결코 잊을 수 없는 백제의 치욕이었다. 선왕들의 죽음으로 시작된 웅진 시대, 위기를 딛고 일어선 무령왕때부터 백제의 부흥기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아들 성왕의 부흥기를 열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무령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 전라도 지역을 백제 영토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전라남도 동.서쪽 영토화한 것은 무령왕때이고 521년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낸 무령왕은 이렇게 전했다. 

 

고구려에게 격파당해 쇠약애진 지 여러 해였다(...)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드려(...)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 <삼국사기> 

 

중국, 일본과의 외교와 교역으로 돌파구를 마련했던 백제였다. 

 

[3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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