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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양녕대군 폐위 과정 (양녕대군이 세종을 위해 양보했다?)

by 365 ^^ 2021. 9. 5.

[154회] 

 

적장자 양녕대군 

태종의 맏아들로 14년간 세자의 자리를 지키면서 조선왕조 최초의 적장자 계승이라는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던 양녕대군은 폐위되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이 왕위에 오른다. 그렇다면 양녕대군은 어떻게 폐위가 되었을까? 

 

태종 가계도: 태종(이방원)은 12남 17녀가 있었다. 정실부인에서 난 아들은 '대군' /후궁에서 난 아들은 '군'/ * 적장자-정실부인이 낳은 맏아들이 양녕대군으로 적장자 승계 원칙에 의해 세자가 되었던 것이다. 

 

태종이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지 않았던 이유

양녕대군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나 큰 문제가 없으면 왕의 후계자 자리가 보장되었던 위치였다. 태종이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지 않았던 이유는 조선의 첫 번째 왕 태조 이성계가 승계의 원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형제를 죽이고 권력을 잡았던 태종은 혈육까지 죽였던 왕자의 난을 '적장자 승계 원칙'이라는 정치적 명분으로 합리화시켰기 때문에 이 문제를 반드시 지켜야 했던 태종이었다. 

 

 

 

 

 

적장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것은 태종에게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카드였다. 그래서 태종이 왕이 되자마자 태종 2년에 양녕대군을 원자로 책봉했던 것이다. 당시 양녕대군은 9살 , 충녕대군은 6살이었다. 충녕대군의 뛰어난 자질을 알아보기도 전에 이미 적장자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고 태종에게 적장자 양녕은 정치적으로 필요했었다.

 

 

양녕대군 VS 충녕대군

 

양녕대군 자질

양녕대군은 체격도 크고 세자 시절에도 중국 사신으로 가서 임무를 잘 완수하고 와서 태종을 흡족하게 했었다. 또한 글씨를 잘써서 숭례문 현판글씨도 양녕대군이 썻다.

양녕대군이 쓴 숭례문 현판

그러나 양녕대군이 공부를 게을리해서 자신의 밑에 있던 내관이 대신 매를 맞는 일도 흔했다. 공부에 취미도 특기도 없었고 양녕은 보통사람보다도 공부를 게을리했기에 스승들(세자빈객들)과 항상 사이가 나빴다.  

 

대학연의: 주자학의 기본 경전인 대학을 송나라의 학자 진덕수가 알기 쉽게 풀이한 책으로 6개월정도에 읽어야 할 책을 6년만에 마친 양녕대군이었다.

 

태종은 17세에 과거에 급제한 문관 출신이자 고려 최고의 무인 이성계의 아들이기도 했다. 무예실력도 출충해서 사냥을 정말 좋아했고 특히 매사냥을 좋아했다. 성수기때는 일주일 동안 매사냥만 했던 태종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따라 아들 양녕대군도 그렇게 매사냥을 좋아했다.

 

충녕대군 자질

그에 반해 충녕대군은 몸이 아플때도 책을 계속 읽어 태종이 내시를 시켜 책을 모두 거두어 오게 했는데 책 한 권이 병풍에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그 책을 백번을 넘게 읽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충녕대군의 자질을 알아보게 된 태종으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도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은 없었던 태종이었다.

 

양녕의 친할머니이자 신의왕후 한씨의 기일에 형제간 사건이 발생한다. 태종의 친어머니 신의왕후 한씨는 태종에게는 각별한 존재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각별한 친할머니 제사 기일에 양녕대군은 바둑을 두었던 것이다. 이에 충녕대군이 이런 철없는 행동에 대해 충고하자 충녕을 잠이나 자라고 충녕을 무시했다. 

 

갈수록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의 갈등의 골이 심해지자 태종은 이를 염려해 대군의 시종들을 감축시키며(세자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뜻) 적장자 양녕의 편을 들어줬던 태종이었다. 

 

 

 

 

 

 

 

 

양녕대군의 스캔들 

양녕대군의 스캔들 또한 대단했다. 매해 양녕대군은 사고를 쳤다. 

 

태종 10년 명나라 사신 앞에서 춤을 추던 기생 봉지련에 반해 양녕대군 (17세) 
태종 11년
태종 12년
태종 13년 그 후 20세 때는 소앵이라는 평양기생을 불러 궁에서 몇일씩 머물게 했다.
태종 14년
태종 15년 22세때 초궁장이라는 기생은 큰아버지 정종의 애첩이었다. 실록에는 모르고 초궁장을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도덕적 지탄을 받지 않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세자 폐위의 도화선이 된 어리 사건 

사대부 박선이라는 퇴직한 관리의 첩인 어리를 만나 아기까지 낳으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태종의 반대로 헤어지게 된 어리인데 태종의 눈을 피해 다시 어리를 찾은 양녕대군이었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다 어리에게로 갔고 주위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어리는 자살을 한다.   

 

이때 양녕대군은 어리 사건은 충녕대군이 아버지에게 고자질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충녕대군을 만나서 충녕이 고자질했냐고 따져 물었으나 충녕은 아무 대답 없이 듣고만 있었다. 충녕대군이 어리 사건을 태종에게 말했다는 기록은 없다. 

 

기록에 따르면 원경왕후(어머니)가 두 딸과 수다를 떨고 있는데 (정순공주, 정경 공주) 태종이 그 자리에 오게 되고 그때 정경 공주가 세자궁에서 유모를 구한다고 알리자 이에 놀라 태종이 알게 되고 이것이 일파만파 번져서 큰일이 된 것이다. 

 

 

 

양녕대군의 상소 그리고 폐위

그러나 위태롭던 부자관계에 파국으로 치닫게하는 일이 발생한다. 어리를 못만나게 하는 태종에게 양녕대군이 상소 하나를 올린다. 

 

아버지는 그렇게 첩을 많이 들이면서 자신은 왜 안되냐는 항의 상소였고 효도할 사람은 자신이다 라는 내용으로 이때 양녕의 나이는 25세였다. 양녕은 아버지가 자신을 폐위하지 못할 것이라고 오판한 것이다.

 

1418년 5월 30일 양녕이 상소를 올리고 3일 뒤 양녕대군은 폐위된다. 14년간의 세자 생활을 마치고 양녕대군은 폐위된 것이다. 폐위 조서를 받을 때만 해도 담담했던 양녕은 한양을 떠나갈 때 비로소 눈물을 보인다. 반면 충녕대군은 세자가 된 지 두 달 만에 왕위에 오른다.

 

 

충령 대군을 왕위에 올린 방법

적장자 상속 원칙에 따른다면 양녕의 아들(적장자)이 책봉되어야 한다. 태종의 입장에서 적장자 원칙을 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이미 태종의 마음이 충녕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어진 이를 고르는 택현을 건의했다. 이에 태종은 이렇게 말한다.

 

**태종은 신하들의 말을 따르는 형식을 통해 정치적인 논리를 완성한 태종이었다.
충녕대군의 작은 행동도 칭찬하는 태종의 모습을 보고 신하들은 태종의 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태종 왜 둘째 효령대군을 선택하지 않았나? 

태종에게 효령대군은 술을 전혀 하지 않고 너무 잘 웃는다고 해서 일찌감치 왕위계층에서 제외시킨 듯하다. 그러나 효령대군도 처음에는 왕위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양녕이 폐위되고 나서 아버지에게 자신이 잘 해보겠다고 했으나 태종이 분수를 지키라고 거절하는 기록이 있다. 이에 왕에 대한 기대를 접고 불교에 올인한다. 조선시대 왕세자 중에 가장 불교행사를 지원하고 후원한 사람이 효령대군이다. 효령대군은 불교에 귀의한 후 채식, 소식, 금주,운동, 마음의 평화등의 얻어 91세까지 장수한다. 

 

장수의 아이콘 효령대군 

 

양녕대군은 스트레스를  덜받고 살아서인지 69세까지 세종보다 오랜 산다. 원래 왕의 형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역모의 구심점이되는 존재로 언제나 왕위를 두고 형제간에 칼을 겨누는데 양녕과 효령이 장수할수 있었던 것도 세종의 인품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양녕대군이 세자 양보설  

양녕대군이 충녕대군(세종대왕)의 기질을 알고 양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충녕대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양녕은 태종이 충녕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태종에게 “충녕은 심약해서 왕의 그릇이 못됩니다”라고 견제를 했고 계유정난 후에도 안평대군 척결하는데도 앞장섰고 단종 복위 운동 때 단종 처단을 주장했던 인물이 양녕대군이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가면 지덕사라는 양녕대군 사당이 있다 .지덕의 의미는 양녕이 동생을 위해 왕위를 양보했다는 미담을 강조한 사당이다.

 

이것으로 봐도 권력에 대한 욕망은 있었으나 뜻대로 이루지 못한 인물인 것이지 양녕대군이 왕위를 양보했다고는 볼 수 없다. 양녕대군은 공부를 게을리했고 공부보다는 매사냥에 열중했고 무엇보다 여색을 탐했던 이유로 폐위가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세자의 자리를 놓아버린 것이라고도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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