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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이동녕 선생 독립운동의 최고 어른

by 짱신나^^ 2021.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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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들 리턴즈 25회 일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최고 어른으로 조선의 독립에 대부분을 참여하셨던 인물이다. 안중근의 멘토 최재형 있었다면 윤봉길의 멘토 김구 선생이 있었다. 그런 김구 선생님의 멘토가 바로 석오 이동녕 선생이다. 

 

독립운동가 석오 이동녕 선생님

 

1932년 비밀리에 진행됐었던 윤봉길, 이봉창의 의거 또한 김구 선생이 이동녕 선생의 의견을 구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만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였던 분이다. 임시정부의 살림꾼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장강일기>에는  아버지 같은 분으로 김구 선생도 많이 의지하고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대한 민국 임시정부 신년식 속 이동녕 선생
이동녕 선생 1
이동녕 선생 2

 

이동녕 어린시절

 

이동녕 선생은 (1869) 임시정부의 어른 중 어른으로 김구 선생(1876)보다 7살 많다. 지방군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지방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알게 된다. 현명하고 영민해서 조언을 많이 해주었기 때문에 '작은 진사'라는 별명이 있었다. 대과 시험에 붙었는데 갑오개혁으로 과거시험 폐지되어 나라를 위한 길은 교육밖에 없다며 광성 학교 설립하셨다. 

 

 

 

 

이동녕 업적

▷광성 학교 설립

독립협회 활동

만민공동회(평화시위)

요즘은 촛불을 들고 평화 시위를 하지만 조선시대는 한 곳에 모여 연설하며 평화 시위를 했다. 이곳에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른다. 

1905년 11월 연좌시위. 을사늑약 때 부당함에 분노해서 경운궁(덕수궁) 앞에서 1인 시위-> 옥고를 치름

▷1906년 서전서숙 설립, 북간도로 이동해서 헤이그 특사의 이상설 선생님을 만나서 서전서숙을 설립 후 민족교육 실시. 

▷1907년  신민회 조직 

국내에서 안창호 선생님과 항일 비밀 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만들어 국권 회복을 위해 국민이 스스로 새로워져야한다는 의미로 실력 양성을 주장

1911년 신흥 강습소

신흥 강습소는 신흥 무관학교의 전신으로 신흥 무관 학교 출신들이 1920년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의 출발점이 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선생님과 대한 광복군 정부 수립.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 의장 이동녕 선생 업적

 

이동녕 선생의 죽음

 

1940년 3월, 치장현에서 열렸던 3.1절 기념식에 임시정부 식구들과 참여하러 오셨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날따라 굳이 외식하자고 우기셔서 식구들과 함께 국수 한 그릇을 먹고 귀가했는데 저녁에 밤새 앓다가 열흘 동안 곡기를 끓고 71세의 나이에 광복을 보지 못하시고 폐병으로 돌아가셨다.

 

이동녕 선생의 장례 사진

 

이동녕 선생의 유언

8년의 이동시기를 거쳐 이곳 치장에 오셨는데 이동녕 선생이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나라를 뺏긴 상태에서 우리끼리도 당을 나누고 분열하는 모습이 가슴 아팠다 (대표적 사건: 난목청사건). 돌아가시기 직전 '이제 그만 분열을 딛고 대동단결해주시오.'라고 남기셨다.

 

그래서 실제로 충칭에서 한국독립당+한국 국민당+조선혁명당 3당 합당이 이루어져 한국독립당으로 다시 태어난다. 진정한 통합과 단결을 알려주신 어른이다.

 

 

이동녕 선생 거주지

80년 전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으나 현재는 개인 소유이다.  

 

이동녕 선생의 거주지 현재 (좌)/ 옛날모습 (우)

 

주변이 모두 개발이 이루어졌고 중국 정부는 보존을 위해 매입하려 했으나 집주인이 집값을 너무 올려서 매입에 실패하고 현재 이렇게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옛날모습으로 보존되어 있지만 
방치된 이동녕 선생 거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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