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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인수대비와 연산군의 갈등

by 365 ^^ 2021.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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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첫째 부인인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여러 후궁 중에서 중전으로 연산군의 어머니 후궁 윤씨를 낙점한다. 윤씨가 중전으로 간택된 이유가 성종이 맘에 들어했고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도 후궁 윤씨의 검소하고 겸손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왕실의 전폭적 지지하에 윤씨가 대비가 된다.  

 

성종과 인수대비의 총애를 받던 윤씨는 1년 정도 잘 지내며 아들 연산군까지 낳았다. 그러나 아들 연산군을 출산한지 4개월 만에 갈등이 시작된다. 며느리가 생각했던것과 달리 질투가 심해 성종의 얼굴을 할퀴어 용안에 상처를 내고만다.

 

연산군의 어머니

중전이 되고 태도가 돌변한 모습을 보자 인수대비를 비롯한 왕실 어른들의 눈밖에 나기 시작하고 시어머니 인수대비와는 고부갈등으로 관계 회복이 불가능해진 것이었고 이에 인수대비의 추진으로 폐비된 후 사약을 내려 사사한다.

 

조선왕조 최초로 중전이 폐출되고 죽임까지 당하는 사건이었다.

 

연산군은 생후 100일이 안되어 어머니와 떨어졌고 어머니 윤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정현왕후의 아들로 자라게 된다. 그러다 즉위 후 어머니 폐비 윤씨의 일을 연산군이 알게 되면서 연산군은 폭군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연산군과 인수대비의 갈등

 

 

페비 윤씨(연산군 어머니)의 일을 앞으로 백 년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게 성종은 어명을 내려지고 어린 연산군을 위로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뿐만아니라, 아버지 성종, 할머니 인수대비 모두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아무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고 인수대비는 연산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연산군 무오사화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 한 후 <조의제문>이라는 글이 문제가 된다.

 

 

<조의제문>이란 무오사화 41년전 사림파 김종직이 세조(연산군의 증조부)가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오른 것에 대해 비난한 글로 이 글을 빌미로 훈구파는 사림파에게 복수하기 위해 연산군을 부추기고 글을 김종직에 대한 벌로 김종직이 속해있던 사림파를 연산군이 피의 숙청을 감행한다. 이 무오사화로 사림파는 대거 숙청된다.

 

연산군의 갑자사화

 

그 후 6년 뒤 연산군은 훈구파 신하 임사홍으로부터 (야사)어머니의 피를 토한 옷자락과 어머니의 일을 알게 된다.

 

 

1504년 갑자년에 연산군은 마침내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다. 아버지 성종의 후궁들을 잡아 들이고 그 대표적 후궁이 엄씨와 정씨를 몽둥이로 마구 패기 시작한다. 여기서 끝내지 않고 정씨의 아들들을 소환해서 어두운 밤에 아들들한테 몽둥이를 쥐여 주고 어머니를 죄인이라고 속여 때리게 시키니 정씨의 두 아들 중 한 명은 어머니임을 눈치채고 거절하고 나머지 한 명을 어두워서 누군지 모른 채 때렸다. 

 

두 후궁은 그렇게 죽임을 당하고 그들의 시신으로 젓갈을 담가 산과 들에 흩어버렸다는 기록이 <연산군 일기>에 남아있다. 연산군은 이렇게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연산군의 인수대비에 대한 분노

연산군은 몽둥이로 엄씨와 정씨를 때려 죽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정씨의 아들 이항, 이봉(연산군의 이복동생들)의 머리채를 잡고 난동을 부리다가 할머니 인수대비 침전으로 향한다. <연산군 일기>에 보면 왕이 손에 장검을 들고 인수대비의 침전 밖에 서서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큰소리로 연달아 외쳤다고 한다. 이 행동들이 훗날 인수대비를 죽음에 이르게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에 자신의 생모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존려고 했고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가 이를 꾸짖었는데 연산군에게 어미를 폐위시키면서 연산군을 같이 폐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폭언을 하는 등 인수대비와 연산군은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왕이 하루는 인수대비 앞에서 처용무를 추었고 그후 인수대비의 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야사에 따르면 할머니를 머리로 받아 인수대비가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1504년 4월 27일, 68세의 나이로 인수대비는 승하했고 이 와중에 인수대비의 3년상도 거부, 하루를 한달로 계산해 25일상을 감행하며 유교법도를 무시하며 패륜 행위로 중중 반정의 빌미를 제공한다.  

 

 

중종 반정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연산군

 

계속된 악행으로 연산군은 결국 중종 반정으로 폐위되고 강화도의 교동도로 유배된다. 

 

 

유배지 주변에는 뾰족한 탱자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3평 남짓의 공간에 갇혀 살게 된다.(=위리안치)

 

 

결국 연산군은 1506년 11월 폐위 된지 두 달 만에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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