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 1,2회]
연산군의 아버지 조선의 9대 임금 성종은 3명의 왕비, 10명의 후궁이 있었고 자녀가 총 29명이었다. 그중에 첫째 아들이 이융, 바로 연산군으로 조선의 제10대 왕이 된다. 성종의 첫째 부인인 공혜왕후가 일찍 죽고 여러 후궁 중에서 윤 씨가 중전으로 간택된다.
그리고 성종과 윤씨 사이에 아들 연산군을 낳았다. 중전이 된 윤 씨는 질투가 심해 성종과 갈등이 심했다. 당시 귀인 정 씨와 엄 씨를 성종이 총애 하자 윤 씨는 그들을 질투하여 중전 윤 씨가 몰래 비상과 방양서(굿하는 방법을 담은 책)를 숨기고 음해하려다 발각되어 단숨에 쫓겨나기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빈으로만 강등이 된다.
그리고 윤씨는 생후 4개월 된 아들 연산군과 생이별하게 된다. 당시 연산군은 생후 100일이 막 지날 무렵이었고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를 정현왕후로 알고 어머니 윤 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라게 된다. 질투의 화신 윤 씨를 향한 불신이 쌓인 성종 말이 씨가 되듯 성종의 부정적 예언이 충족됨으로써 (자기 충족적 예언) 윤 씨와 성종의 관계는 더욱 멀어지고 이렇게 별거를 하기 시작한다.
조선 최초 중전 폐출 ,사사된 사건
이후 윤씨와 성종과의 관계가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별거 약 2년 후 중전 윤 씨의 생일날에 잔치를 취소하라는 중종의 어명이 떨어지고 생일 선물로 옷감을 선물하고 끝내버린다.
중전의 생일 날 성종은 후궁에게 간다. 이 사실을 알고 중전 윤 씨가 참지 못하고 후궁의 처소로 직진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 시대 왕실의 법도를 넘는 절대로 하면 안 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분노를 참지 못한 중전 윤 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자 이것이 중전 윤 씨를 폐위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 된다.
이 일로 폐비 윤씨는 폐서인으로 강등되고 사가로 유폐되었다가 승지 이세좌라는 사람을 보내서 사약을 내려서 1482년 8월 16일 폐비 윤 씨는 사사된다. 이것은 조선왕조 최초로 중전이 폐출되고 죽임까지 당하는 사건이었다.
성종은 폐비 윤씨가 죽고도 완고한 태도를 보인다. 폐비 윤 씨의 사후 예우에 대한 규정도 고치지 못하게 하고 다시는 폐비 윤 씨의 이야기를 언급하지 못하도록 했다.
사랑받지 못한 연산군
그러나 그런 행동의 가장 큰 피해자는 아들 연산군이었다.
학구파 아버지 성종과 달리 무예, 말타기등을 좋아하는 아들 연산군은 성종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또한 할머니 인수대비 또한 연산군을 좋아하지 않아 연산군과의 갈등 속에서 병상에 누워 있던 할머니에게 고함을 치고 행패를 부려 끝내 인수대비는 사망한다. (훗날 이런 패륜행위가 폐위의 씨앗이 된다.) 이렇게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모두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의 외모와 성품
연산군의 실제 외모는 풍채가 있는 몸매가 아닌 마른 체구에 하얀피부의 배우 이종석 배우와 비슷하다고 하고 성격은 간지럼증도 심하고 두드러기도 많이 나는 등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왕이 된 연산군
성종이 38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1494년 어렸던 연산군 19살이 되던 해 조선 10대 왕으로 조선 최초로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갖게 된다. 그렇게 핏빛으로 물든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연산군은 왕이 돼자 아버지 성종에 대한 증오가 본격적으로 표출이 된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사슴 사건으로 성종이 승하하자 성종이 아끼던 사슴을 활로 쏴버린 후 그 고기를 먹었던 일화가 있다. 그 후에도 사슴 혀, 사슴고기 등을 진상하도록 하여 즐겨먹었다고 한다.
연산군 제위 1년 후 연산군은 우연한 계기에 아버지의 묘지문을 보다가 폐비 윤 씨의 존재를 알게 된 연산군은 윤기문에 대해 묻게 되고 그는 생모 윤 씨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결국 폐비 윤 씨의 존재를 알게 된다. 우연히 알게 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조사한 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 후 연산군은 돌변해 버린다.
아버지 성종은 재야의 젊은 인재를 등용하고 신하들과의 소통에 능하였고 의견 대립이 있을 때는 양보하며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가 활발하게 돌아가도록 했으나 아들인 연산군은 삼사 체제를 능상(윗사람을 능멸함)으로 취급하여 삼사가 기능하지 못하도록 엄포했고 이에 훈구파 대신들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최초의 사화 무오사화
사림파의 충언을 그저 능상이라 여겼던 연산군에게 사림파는 연산군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것을 이어갔고 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져 무오사화의 시작점이 되었다. 그때 사화의 불을 댕긴 김종직의 글이 발단이 된다. 세조 때 김종직이 썼던 <조의제문> : 세조에 의해 쫓겨난 단종의 죽음을 슬퍼하는 내용.
그 내용을 연산군 때의 사관이자 사림파인 김일손이 보관하다 역사 자료집 사초에 옮겨 적어 연산군에게 전하게 된다. 왕권 견제 역할을 했던 사림파 삼사의 충언이 못마땅했던 연산군은 사림파를 대거 숙청하는 무오사화가 일어난다.
연산군의 폭정
그동안 왕권을 견제하던 사림파를 제압한 상태에서 연산군은 왕권 강화를 꾀한다. 그 이후 연산군의 폭정은 극에 달한다.
- 술을 따라줬는데 술을 먹지 않는 신하를 국문
- 연산군 앞에서 웃음을 보인 내관 곤장 100대
- 시 한수 지어 보라고 했는데 두 수 지었다고 처형
- 잔칫날 철갑 입은 무장이 철갑에서 낸 소리가 시끄럽다 처형
- 금표를 세워 사냥을 위해 서울 인근 민가를 강제 철거(2만 명 이상 이주)
- 여성 승려들에게 몹쓸 짓을 저지른 연산군
권력을 잡은 연산군은 권력이 강화될수록 향락을 탐닉한다. 전국의 수백수천의 여성을 선발해서 성적인 탐닉하게 되고 권력을 얻기 위해 여성을 바치고 연산군의 만행을 부추긴 간신들(권간들)이 있었다.
당시 연산군에게 끌려간 여성들만 만여 명에 달했다. 이렇게 나랏일은 뒷전으로 향락과 유흥에 빠져 살게 되니 이런 사치로 국정은 파탄에 이르게 된다.
♧ 만여 명 중 선발되어 입궁한 여성들의 칭호는?
연산군이 흥청으로 인해 망했다는 뜻의 '흥청망청' 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흥청'에서 가장 돋보였던 흥청은 장녹수였다. 이렇게 연산군이 아끼는 흥청이 되면 집안은 탄탄대로였고 관직을 받고 악행을 저질러도 용서받았던 흥청의 가족이었다.
♧ 연산군의 폭주에 방아쇠를 당긴 두 사건은?
이세좌 사건
왕의 명령으로 폐비 윤 씨 (연산군 어머니)에게 사약을 들고 갔던 승지 이세좌를 처형시킨 사건이다. 1503년 연산군은 인정전에서 양로연을 열었다. 이때 갑자기 이세좌를 불러 술을 건네준다. 이세좌는 긴장한 나머지 손을 떨어 연산군의 용포에 술을 흘리게 된다. 잔치가 끝나고 얼마 뒤 조정에서 연산군은 술을 엎지른 자를 국문할 것을 명령한다. 이 사소한 사건을 빌미로 이세좌를 귀향시키고 그 이후 자결할 것을 명하니 이세좌는 스스로 목매달아 자결하였다.
홍귀달 사건
예전에는 궁궐에 여인을 들일 때 최고 명문가 여식들을 뽑아서 검토 과정을 거친 뒤 입궐시키는 과정이 있었다. 1504년 조선 전기 문신 홍귀달의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연산군의 명이 있었고 손녀가 아파 입궐이 힘들다고 의사표현을 했으나 이에 왕명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장형을 받고 유배된 후 처형했다.
갑자사화의 불씨를 댕긴 인물 권간 임사홍
홍귀달 사건을 시작으로 임금에게 어명에 불충한 이들을 도륙하는 갑자사화의 불씨가 일어난다. 연산군과 간신들의 술판이 벌어지던 1504년 3월 19일 권간 임사홍은 연산군의 신임과 권력을 얻기 위해서 연산군에게 폐비 윤 씨의 일을 소상히 폭로하게 된다. 야사에는 폐비 윤씨의 피 묻은 적삼을 가져와 보여줬다는 기록이 있으나 조선왕조 실록에는 없는 기록이다.
연산군 피의 복수 갑자사화
연산군은 어머니 죽음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피의 복수를 시작하게 된다. 어머니의 죽음과 연관된 정 씨와 엄 씨를 찾아가 그들을 몽둥이로 마구 패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고 정 씨의 아들 이항, 이봉(연산군의 이복동생들)을 소환시킨다. 그리고 자루에 묶어 놓은 어머니를 죄인이라 속여 때려죽이게 시켰고 두 아들 중 한 명은 어머니임을 눈치채고 통곡하고 한명은 그것을 모른 채 몽둥이로 내리쳤다.
그 후 사람을 시켜 갖은 참혹한 짓을 하여 마침내 엄 씨. 정 씨는 맞아 죽었다. 그리고 정 씨의 아들 둘의 머리채를 잡고 난동을 부리다가 할머니 인수 대비의 침전으로 향한다. 인수대비에게 왜 어머니를 죽였냐고 소리를 지르며 이로인해 인수대비는 병을 얻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에 분이 풀리지 않았다. 야사에 의하면 엄씨 . 정씨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갈을 담가 산과 들에 흩어버렸다고 한다.
그 후 폐비 윤 씨 사건에 관련된 신하들을 찾아서 피의 숙청을 시작한다. 유배형 이상을 받은 신하들은 총 239명에 이르고 사형당한 사람만 100여 명에 달했고 주변인 포함 실질적 피해자를 모조리 제거하는데 공포를 극대화시킨 형벌 부관참시(무덤을 파서 시체를 훼손시키는 극형), 쇄골표풍 (사형 후 뼈를 빻아 날려 보내는 형벌), 연좌제로 처형 당사자뿐만 아니라 죄 없는 주변인 8촌까지 연대 책임을 지워 처벌을 시킴으로써 갑자사화는 참혹하고 거대했던 사화였다.
연산군을 폐주라고 불렀던 가장 큰 이유는 삼사의 기능을 무력화시켰을 뿐 아니라 역사의 기록을 담당하는 사관의 역할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사관은 왕의 행적을 세세하게 기록해야 하는데 최소한의 사실만 기록하도록 하여 사실상 실록 편찬을 통제하는 언론, 역사 기록을 모두 탄압한 왕이었다. 이는 왕으로써는 절대로 하면 안 될 악행을 저지른 연산군이었다.
조선 최초의 탄핵 중종반정
연산군은 2명 이상 대화 금지하는 우어 금지법과 신언패를 달게 함으로써 왕에 대한 험담을 금지시키는 등 절대적 왕의 통제는 결국 부작용을 낳았다. 결국 박원종을 중심으로 한 반정군에 의해 연산군이 폐위되고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이는 신하가 왕을 몰아낸 조선 최초의 탄핵이었다.
연산군은 자신의 폭정의 끝을 예상이라고 한 것처럼 속수무책으로 반정군에 포위되자 '턱이 떨려 말을 잇지 못했고 왕비에게 달려가 벌벌 떨며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뉘우치는 말을 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반정 후 하루도 안돼 맥없이 쫓겨나게 되고 저항 없이 유배길에 오른 폭군의 허무한 최후였다.
연산군의 죽음
재위 12년간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무너뜨렸던 폭군 연산군은 교동도에 위리안치 형벌을 받고 유배 후 두 달만에 사망한다. 똑같이 폐위됐지만 광해군은 유배지에서 10년 넘게 살았던 것에 비해 연산군은 너무 이른 죽움이었다. 그렇게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은 1506년 11월 6일 31세 나이로 숨을 거둔다.
어린 시절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연산군의 삐뚤어진 마음이 엄청난 폭정으로 이어졌고 결국 파국으로 끝나버렸다. 연산군 옆에 진심으로 도와줄 사람이 있었다면 역사는 바뀌지 않았을까? 연산군의 불운한 어린 시절로 엇나기기 쉬웠던 상황 속에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군주가 얼마나 위험한지 역사를 통해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같은 상처를 받았으나 전혀 다른 결과를 보였던 왕이 있었으니 조선의 22대 왕 대표 성군 정조가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