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대 영도 등대에서
영도대교 = 영도다리
6.25 전쟁 당시 대통령이 내려와 있고, 임시수도에 미군이 지원해주고 안전한 곳을 찾아 남쪽으로 몰려든 480만 피란민들은 부산과 영도를 잇는 다리 영도다리에 모여 자신의 가족들을 찾았다. 당시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가 영도다리였기에 난리통에 헤어진 가족들은 부산 영도다리에서 만나자는 다급한 약속을 하고 헤어졌던 것이다.
동래구 수안역
동래 읍성 임진왜란 역사관 (수안역 안에)
수안역 안에는 동래읍성 전투에 관한 역사를 배울 수 있고 그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았다.
임진왜란 초기 격전지였던 동래읍성은 당시 성을 이끄는 이각 이라는 육군 책임자가 있었으나 왜군이 쳐들어왔다는 소리를 듣고 도망을 간다. 이에 뒤 이어 책임자로 부이한 사람은 동래 부사 송상현이였고 동래읍성 전투에서 끝까지 일본군에 저항하다 전사한다.
용두산 공원
초량왜관 (조선후기)
태종 때 무질서한 왜구들을 통제하고자 조선정부의 허가하 공식적으로 교역할수 있게 만든 무역처가 바로 왜관이다. (상업도시)
그러나 일본인들이 들어와 이 왜관에 일장기를 걸어 놓는다. 그 당시에는 동래안에 부산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발전되지 않았던 부산에 왜관을 만들고 이 지역을 일본인 거리로 만든다. 초기 왜관은 약 11만평 정도였으나 강화도 조약 이후 약 500만평으로 점차 확장되었다.
왜관에서 우리나라 기밀을 빼가는 일이 많았는데 임진왜란 당시 총 사령관 역할을 했던 유성룡이 남긴 기록인 징비록을 가져가고, 동의보감도 가져갔다. 우리도 일본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우리의 스파이도 왜관을 통해 일본으로 침투했었다. 이곳 왜관은 첩보원들의 소리 없는 격전지였다.
왜군과 왜구의 차이점
왜구와 왜군은 다르다. 왜군은 일본의 정규군이다.
왜구는 우리나라와 중국 해안에서 약탈을 하던 일본의 해적으로 도시 전체를 약탈한다.
용두산 타워= 부산타워
그러나 내려다 보이는 해안선은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해안선이다.
원래 우리나라의 해안선에 간척 사업을 통해 매립을 해 토지를 넓혀 지금의 부산 해안선이 만들어 졌다.
식민지 근대화론
한국의 성장이 일제 식민지시대 덕분이라는 관점이다. 하지만 너무 힘들고 고된 노동으로 많은 사람이 다치고 비참하게 죽어나갔다.
인천항 축항 공사 노역을 했던 김구 선생님은 강제 노역이 너무도 괴로워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불과 반일에 어깨가 붓고 등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하게 된다.
-백범일지 중-
조선통신사 역사관
200여 년의 역사 조선통신사의모습을 재현해 놓은 전시관
일본의 경우 무관들이 통치를 했다. 일본의 무신 정권 막부의 수장을 쇼군이라 부르고 새로운 쇼군이 등장 할 때 마다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려면 외국에서 손님이 방문해야 권위가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요구로 우리 나라에서 파견해준 사절단이 바로 조선통신사로 일본의 의중 파악과 포로 송환의 필요성, 양국 간 문화.예술 교류 등으로 양국의 평화를 위해 일본의 요청에 응한 해서 조선에서 통신사를 보내게 된다.
1607년~1811년까지 통신사가 파견되었는데 임진왜란 이후에는 12차례의 통신사를 파견했다. 왕복 약 4,000km 소요 시간 10~12개월의 대장정이였지만 조선통신사를 통해 200년간 국서를 주고 받았고 양국의 평화와 문화 교류에 힘썼고 한 차레의 전쟁도 없이 평화의 시대를 유지했다.
부산 역사 관련 내용▼
☞6.25 전쟁 흥남철수 작전과 대한해협 해전 in 부산 유엔평화기념관
☞6.25전쟁 1.4후퇴 이후 피란수도 부산에는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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