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나혜석은 조선 여성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여행가이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 예술가였다. 신여성 1세대라고 불리고 조선 최초 여류 서양화가이자 글쓰기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였다. 또한 그녀의 독특한 성격과 까칠함, 당당함 틀에 박힌 관습을 거부하며 자신의 재능을 펼친 예술가였다.
나혜석 어린 시절
1896년에 나참판댁 둘째 딸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한다. 4남매 모두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15세에 나혜석은 서울 진명 여학교로 진학한 후 최승우 성적으로 졸업했고 더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결심한다. 나혜석 행보에 불만을 품은 아버지와 심한 갈등을 빚게 되는데 다행히 작은 오빠가 적극 지원을 해주어서 1913년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때 나혜석 나이는 18 살이었다.
일본 유학에서 도쿄 사립 여자 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한다. 도쿄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나혜석은 주목의 대상이었다. 도쿄 유학 중 여름방학 당시 귀향한 나혜석에게 아버지가 결혼을 강요하게 된다.
집에서 대학 등록금을 주지 않자 결국 휴학을 하게 되고 여주 공립 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게 되고 그렇게 유학자금을 모이기 위해 일을 시작하고 아버지의 결혼 강요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바로 <경희>이다.
나혜석의 첫사랑
나혜석의 첫사랑은 유학시절 만난 최승구로 이 둘을 이어준 이는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이었다. 최승구는 시인으로 함께 예술을 논하며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최승구는 조선에 본처가 있는 유부남이었고 본처와 이혼을 극구 반대한 최승우 집안과 나혜석의 집안 또한 정해놓은 이와 결혼을 반대하던 상황으로 두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그 당시는 양반가의 자제로 어린 나이에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혼이 진행됐다. 그렇게 힘든 연애를 하고 있던 두 사람이었는데 패 결핵으로 건강이 악화된 최승구는 귀국한 후 고향으로 가고 열흘간 최승구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병간호를 하던 나혜석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5일 뒤에 최승구는 세상을 떠났다. 첫사랑을 떠나보낸 이후 나혜석은 신경쇠약에 걸리고 최승구는 26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두 번째 사랑
그 후에 새로운 사랑이 찾아보는데 그의 이름은 김우영이었다. 나혜석 둘째 오빠 나경석의 친구였던 그는 나경석의 권유로 나혜석을 만나 반하게 되는데 집안도 좋고 능력도 좋은 남자지만 아직 죽은 첫사랑을 잊지 못해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은 나혜석이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도록 김우영의 구애는 계속되었고 6년이란 시간 동안 한결같이 이어진 김우영의 구애로 결혼을 하게 된다.
나혜석 결혼 4가지 조건
그러나 단 조건이 있었다. 총 3가지였다.
1. 일생을 두고 자신만을 사랑해 줄 것, 그 당시 축첩이 흔한 시절이었고 나혜석의 아버지 또한 첩이 많아서 결혼 조건에 평생 나만을 사랑해야 한다고 첫번째 결혼 조건으로 둔 것이다.
2.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3. 시어머니와 김우영 전처의 딸과 자신을 따로 살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제안을 모두 받아들이고 김우영과 나혜석은 결혼을 한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첫사랑의 고향인 고흥으로 가자고 요구하며 비석도 세워줄 것을 나혜석은 요구했다.
결혼 1년 뒤 남녀 통틀어 서울에서 최초로 서양화 개인전을 열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조선 1호 서양화가로 화려하게 데뷔를 한다. 작품 <신춘>은 350원에 팔리기도 했다. (현재 가치로 3천5백만 원 가치)
출산의 고통을 표현
이렇게 서양화가로 이름을 알린 후 1921년 남편 김우영과 결혼 후 첫 아이를 갖게 된다. 나혜석은 아이의 이름을 김나열 지었다. 남편 성 김, 나혜석의 성인 나 , 두 사람의 기쁨이란 뜻의 기쁠 열, 당시 부모성을 함께 사용했다. 당시 여자의 이름은 없었다. 나혜석도 개명 전까지 나아기였다. 나간난은 동생이름일 정도로 여자를 존중하지 않는 시대였다.
**여자이름 중 언년이 뜻
언=어긋나다. 년=여자
아들인줄 알았는데 딸이라 기대에 어긋난 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출산 후 글을 하나 발표한다. 산고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며 그 글이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을 표현하며 모성은 본능적인 감정이 아니라 아이를 보살피고 키우는 과정에서 갖게 되는 것을 지적하고자 했다.
독립운동가 나혜석
선진 문물을 배우며 성장한 나혜석은 진취적인 자세로 김마리아와 같이 삼일 운동에도 참여하고 만세운동을 위해 비밀 회합에도 참여했다. 이로 인해 나혜석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5개월간 수감을 하게 된다.
황옥 경부 폭탄 사건
혜석은 남편과 함께 중국에 간다. 중국 안동의 외교관(부영사)으로 부임한 남편 김우영과 함께 나혜석은 야학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만난 의열단을 만나게 되고 중국 안동에 무기를 가진 의열단원들이 드나들었다. 그들의 무기를 숨겨주고 남편 김무영의 외교관 신분을 이용해 기차에서 검문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실제 나혜석의 활약이 영화 <밀정>의 모티브가 된 것이다.
1923년 황옥 경부 폭탄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협조한 나혜석이었다. 상하이에서 만든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려고 당시 의열단이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이었던 '황옥'과 협력해 폭탄 밀반입을 시도하다 발각된 사건으로 이 과정에서 나혜석은 의열단을 적극 지원하게 된다.
여성 최초 세계일주
변병의 외교관 근무자에게 베푸는 관례적 특전인 세계 여행(유럽과 미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2남 1녀의 자녀가 있었던 나혜석은 아이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과감히 20개월 동안 세계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때의 여행담을 담은<구미유기> 기행문을 신문, 잡지에 출간하며 주목받게 된다. 시베리아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러시아-독일-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영국 경유- 미국을 가로질러 다시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오는 일정이었다. 무려 1년 9개월의 대장정이었다.
나혜석과 최린의 연애, 이혼
1928년 법학을 공부하기를 원했던 남편과 그림을 공부하기를 원했던 나혜석은 떨어져 지내게 된다. 파리에 남길 원했던 나혜석, 법공부를 위해 독일로 가기를 원했던 김우영, 남편은 나혜석의 뜻을 들어준다. 김우영은 평소 친분이 있던 최린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 에게 아내를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생활비가 없었던 나혜석은 최린에게 연락을 하며 이에 분노한 김우영이 간통죄로 나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그러나 당시 김우영도 이혼 전 다른 여자와 서울에 살림까지 차린 상황이었으나 그에게는 어떤 비난도 없고 조선시대 남자가 첩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제강점기 간통죄는 오직 여성만 처벌하는 법이었다. 그렇게 결국 파리행은 부부의 파국으로 끝나게 됐다. 이렇게 1931년 11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던 1920년이었는데 30년대부터 급격하게 달라지기 시작한 나혜석의 삶이었다.
이혼고백장 파문
나혜석은 자신의 이혼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글을 쓴다.
조선 남성들은 참 이상하오
자기들은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소
하지만 여자도 사람입니다.
위의 글로 사회적 비난이 일었고 나혜석은 다시 한번 글을 쓴다. 정조는 개인의 취향이라 각자가 선택하는 것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당시 정조는 목숨과 같다고 여기던 때로 이 글로 인해 경성 발칵 뒤집힌다.
당시 같이 바람을 피웠던 최린에게는 그 어떤 사회적 지탄도 없었다. 그리고 정조 유린에 대한 위자료 청구 소송사건이 일어난다. 원고 나혜석, 피고 최린으로 나혜석은 정조를 유린당했다며 최린에게 위자료를 청구한다. 이 사건은 신문에 보도되지만 조간신문에 실린 기사가 최린의 압력으로 석간 신문에는 삭제된다. 이로 인해 나혜석의 투쟁은 원천 봉쇄된다.
사회적 존재감 사라지는 나혜석
결국 최린과는 합의하여 소송 취하로 마무리되지만 이렇게 이혼녀가 된 나혜석은 잔혹한 주홍글씨가 새겨져 사회적 활동이 마비가 된다. 화가이자 작가로서 사회적 존재감이 사라져 간 나혜석이었다. 나혜석이 이렇게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고 있었지만 최린은 친일에 앞장서며 오히려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고 남편이었던 김우영 또한 승승장구 출세의 길을 걷고 있었다. 친일보다 여성의 외도가 더 살아남지 못할 일이었던 시대였다.
나혜석의 죽음
이혼 고백장이 발표된 이래 충격을 많이 받아 수전증이 찾아와서 그림을 그리기 힘들었고 설상가상으로 그림을 보관했던 창고에서 화재가 나면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고 4명의 자식 또한 보지 못하게 시댁에서 막았고 여러 악재가 겹쳤다.
1948년 12월 10일 8시 30분 서울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한 행려병자는 영양실조와 중풍(파킨슨병)으로 사망했다. 소지품 하나 없이 쓸쓸하게 죽음을 맞은 이는 53세의 나혜석이었다. 생을 마감한 나혜석이었다.
현재 나혜석의 유화는 40여 점이 전해지고 있으나 출처와 소장 경로가 확실치 않아 진위 논란이 많다. 나혜석은 글을 쓰며 세상에 끝까지 도전했고 개인적인 삶만을 위한 것이 아닌 동시대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듯했다. 여성들의 공감과 연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기대했던 나혜석이었는데 100년이 흐른 지금에야 나혜석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꼬꼬무 11회/출처 선녀들 마스터 11회, 역사저널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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