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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김마리아 여성독립운동가

by 365 ^^ 2021. 8. 16.

1892년생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는 강인하고 투철한 의지가 느껴지는 얼굴이다. 1892년생을 강조한 이유는 1900년대 전후 동시대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너무도 많다. 

 

 

배화여고 학생으로 3.1 운동으로 수감된 김마리아도 있고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의 아내로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항일 사수(쌍권총을 쏘던 김마리아(1903~미상),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도 있다.

 

배화여고 학생이던 김마리아(좌) 이범석의 아내이자 항일 사수 김마리아 (우)

 

김마리아의 어린시절

1892년 김마리아는 황해도 장연 만석꾼 집안 딸만 셋인 집안에 셋째 딸로 태어난 김마리아는 아버지가 일찍 기독교로 개화를 하여 예수님의 어머니 이름인 마리아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3살 때 아버지와 13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친척들의 도움으로 세 딸 모두 평등하게 교육을 받았고 모두 학업에 정진했던 개화된 집안이었다. 

 

 

2.8 독립선언의 중심에 있었던 김마리아 

1919년 2월 8일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남녀 학생들이 도쿄 한복판에서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2.8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은 3.1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선언인데 검색하면 대부분 남자 유학생만 검색된다. 그러나 당시 2.8 독립선언서를 준비했던 세력에는 여성 유학생도 많았다. 그중에 대표가 김마리아, 황에스더는 아주 큰 역할을 했던 독립운동가였다. 특히 김마리아 선생은 한국 독립운동의 전설과도 같은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 때 김마리아를 모르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김마리아 체포

2.8 독립운동 당시 남녀가 힘을 합쳐 2.8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주장했던 인물로 "나라의 독립에 남녀가 따로 있느냐 수레도 두 바퀴로 가야 잘 굴러간다" 고 말하며 독립운동에 여학생의 참여도 주장했으나 2.8 독립선언 서명은 11명의 남학생만 참여하게 된다. 도쿄 YMCA 강당에서 수백 명이 모여서 발표를 했고 경찰 출동으로 현장에서 60명이 검거, 8명이 기소가 되는데 다음 달 대표에 없었던 김마리아가 체포된다. 

 

경찰 취조 중 윤석창의 실토로 '동경여자 유학생 친목회'에서 30원을 받았고 돈의 출처를 김마리아가 잘 알고 있다고 실토해 체포되었으나 김마리아는 8시간 만에 풀려난다. 당시 일본 분위기는 여성의 독립운동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3.1 운동 당시에도 여학생들의 만세 시위에 일본은 크게 놀라 보도를 대대적으로 많이 하기도 했다.

 

당시 매일신보 여학생 만세 시위에 관련 보도

 

2.8 독립선언서를 숨겨 조선으로 

2.8 독립선언 이후 일본의 주요 감시 대상이었던 남자 유학생들과 조선 유학생에 대한 감시가 더욱 삼엄해진 상황이었지만 그에 비해 여자 유학생들은 감시가 상당히 소홀했었기 때문에  1919년 2월 17일 2.8 독립선언 9일 후 김마리아는 2.8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조선으로 향했다.

 

1919년 2월 김마리아가 입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모노는 넓고 큰 오비(기모노의 허리부분에 옷을 여며주고 장식역할을 하는 띠)가 특징이다. 오비의 길이는 평균 3M60CM~4M 20CM 너비는 약 60CM로 반으로 접어 착용한다. 오비를 풀면 기모노 자체가 해체되어 속옷이 훤히 드러난다.

김마리아는 오비에 2.8 독립선언서를 숨겨 조선으로 들어왔는데 오비를 푼다고 해도 다시 감는 것 또한 손이 많이 가는 것이라 쉽게 수색을 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해 오비 속에 숨겼던 것이다. 

 

 

3.1 운동의 현장으로

김마리아는 조선에 들어와 대구에서 고모 김순애(1889~1976 김규식의 아내)를 만난다. 그 후에 광주 서석병원에서 2.8 독립선언서를 수백 장 인쇄 후 서울에 후배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고향인 황해도로 가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3월 1일에 서울의 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을 알고 다시 서울로 온다.

 

 

또다시 체포, 고문 

그리고 1919년 3월 5일 남대문 만세 시위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1919년 3월 6일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다. 

조선 총독부 경무국으로 3.1 운동 주동자를 고문한 곳이다.

 

시멘트 바닥에서 구둣발로 머리를 차이고 대남봉으로 수차례 머리를 가격 당하는 고문이 이어졌다. 평생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는데 계속해서 머리를 때리는 고문을 당해 고막이 터지고 귀와 코에 고름이 차는 질병인 매스토이 병에 걸렸는데 이것은 평생 뼛속에 고름이 차는 병이다. 

 

김마리아의 실제 유품으로 오른쪽이 2CM정도 짧은 저고리는 인두로 고문해 오른쪽 가슴을 잃었기 때문에 저고리를 만들때 짝짝이로 저고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포스터는 김마리아를 소재로 만든 영화의 포스터이다. 현재 영화는 남아있지 않는다. 김마리아의 고문장면을 형상화한 것이다. 오른쪽 가슴을 인두로 지지는 장면등의 고문 장면이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결성

그러나 모진 고문에도 꺾이지 않았던 김마리아였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5개월간 수감되었다가 1919년 7월 24일 증거 불충분으로 임시 석방된다 그러나 김마리아는 만신창이 몸으로 또다시 독립운동을 하러 간다. 1919년 9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임시정부 지원 및 독립운동을 위해 조직된 항일 여성단체로 전무후무한 여성조직으로 전국 15개 지역 하와이, 간도에도 지부가 있었고 회원 수는 2 천명 었다. 

 

1919년 11월 1일에는 상하이 임시정부 이승만에게 2천원을 (현재가치로 약 1억원)을 보냈다.

 그러나 이 활동이 한 달만에 발각되어 52명이 체포된다. 정신여학교 동창인 오현주가 변절해 밀고로 발각된 것이다.

 

 

최초의 여성의원 활동

 

1921년 7월 대구 감옥에서 병보석으로 나왔었던 김마리아는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는 척하다가 일본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중국 상해로 망명한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김마리아를 열렬히 환영을 하고 1922년 김구와 함께 임시의정원(국회의 전신)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원으로 활동을 한다.

 

 

그 이후 1923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가 1935년 13년 만에 귀국 후 함경남도 원산 마르타 윌슨 여자신학원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1930년대는 일본의 신사 참배를 강요했던 시절이었으나 김마리아는 신사참배 반대를 선언하며 김마리아의 여전도회는 공식 모임을 없애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이다. 

 

돌아온 후 해방을 1년 5개월 앞두고 김마리아는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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