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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태종 이야기 (조선 3대 왕,세종대왕의 아버지, 아들바보 )

by 짱신나^^ 2021.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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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회]

태종 이야기 

 

태종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왕위를 갖기 위해 정도전, 남은 등 조선의 개국 공신 대대부분을 숙청했던 인물로 태종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이복동생 방석을 제거, 친형 방간을 유배시키며 왕위에 올랐고 잔혹함, 권력욕, 킬러본능의 상징이었던 인물이다. 

 

태조 이성계 가계도 (태종=이방원)
태종의 가계도 (태종의 19명 부인과 자식 31명으로 조선왕조에서 가장 많은 후궁을 둔 임금이다) 

 

태종의 의외의 모습 

 

태종은 무예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뛰어났는데 이성계 태조의 아들 중 유일하게 문과에 합격한 이가 바로 태종(17세)이었다. 

 

 

살아서 왕위를 넘긴 태종

 

조선 왕조 역사에 선위는 몇번 있었다. 대표적으로 단종이 세조 수양대군에게 선위했던 일이 있지만 다른 왕들과 달리 태종은 충녕(세종)에게 자발적 선위를 한 것에는 아주 특별한 경우라고 말할수 있다. 조선시대 실질적 권력을 가진 왕이 선위한 건 태종이 유일하다. 

 

선위=양위(왕이 살아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

 

아들 세종 32년간 통치를 했는데 태종의 재위 기간은 18년으로 그렇게 길지 않았음에도 태종 나이 51세에 선위했던 것이다. 14년간 세자였던 양녕을 폐위하고 충녕이 세자된 지 두달 만에 선위를 한다. 영문도 모른 채 태종에게 세종은 어보를 건네 받고 태종은 어보를 건넨 후 거처까지 옮긴다. 거듭된 세종의 선위 철회 요청도 거절하고 이틀 후 다시 태종의 거처로 간 세종에게 태종은 세종의 즉위식 의미 익선관을 씌워준다. 

 

축제분위기 속 세종의 즉위식

대부분의 선왕이 사망 이후 다음 왕 즉위를 하기 때문에 새 왕의 즉위식보다 선왕의 장례식이 더 중요한 행사인데 조선왕조에서 최초이자 유일한 아버지가 살아계실때 즉위식을 하므로 아주 성대한 축제와 같은 분위기였다. 선왕과 상왕이 함께하는 축제적인 즉위식이었다. 

 

 

 

용의 눈물 (눈물이 많았던 태종)

 

태종은 장남 양녕의 비행으로 우는 일이 많았고 아들들에게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했던 태종이다. (자신이 겪었던 골육상장의 비극 떠올리며 눈물을 많이 흘렸다) 태종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 넷째 성녕대군이었으나 14세이 홍역으로 사망하고 60일이 지났는데 하루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날이 없다고 할 만큼 아들들 앞에서는 울보였던 태종이였다. 

 

태종의 아들 사랑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에서 네아들 양녕, 효령, 충녕, 성녕이 있었고 첫아들 양녕을 낳기 전에 아들 셋이 요절한 후 얻은 귀한 아들이 양녕이었다.

 

태종(이방원)과 원경왕후 사이에 네아들 태종은 원경왕후와는 사이가 틀어지고 그 후 20년간 총 19명의 부인을 두었던 태종이었다. 심지어 원경왕후 몸종 사이에서도 아이를 낳은 태종이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양녕을 몹시 아꼈던 태종은 8세에 왕세자 교육을 양녕에게 시킨다. 양녕은 11세에 왕세자 책봉14세에 사신으로 명나라를 다녀온다. 학문보다는 무예에 관심이 있던 양녕을 강무(조선시대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에 데리고 가기도 했던 태종이었다. 

 

 

양녕대군 스캔들

 

▶양녕은 17세에 봉지련이라는 기생을 궁중으로 들여 태종에게 발각되었고 봉지련을 옥에 가뒀는데 양녕이 식음을 전폐하면서 단식투쟁을 한 것을 보고 비단까지 하사하면서 사면했다. 이후에도 기생들과의 스캔들로 문제를 일으켰던 양녕이었다. 

 

▶1415년 또 한번의 스캔들이 있었다. 양녕의 큰아버지 상왕 정종을 모시는 기생 초궁장과 스캔들을 일으켜 쫓겨났었다. 

 

▶또 다른 스캔들은 사대부의 첩 '어리'에 홀딱 빠진 양녕은 강제로 세자궁으로 납치해왔다. 어리에게 결국 아이까지 임신시킨 양녕은 태종 몰래 아이를 궁에서 낳기까지 했다. 

 

▶다른 여성들은 기생이여서 어느정도 용납이 되었지만 어리는 중추원 부사 관선의 부인이었다.  이에 태종은 반성할 기회를 준다. 그래서 1417년 종묘에 가서 반성의 제사를 지낸다 . 그리고 어리가 출산한 해가 1418년이다. 둘의 만남을 도와준 사람이 양녕의 장인 김한로였다. 이에 격노에 양녕의 폐위까지 언급했던 태종이다. 그러나 다시 이성을 찾고 양녕의 잘못을 장인 김한로에게 떠넘기면서 김한로의 유배로 얼렁뚱당 마무리된다. 

 

 

 

양녕 대군을 폐위 시킨 결정적 이유

 

이에 양녕이 태종에게 상소문을 쓴다. 그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참고 있던 태종도 이 상소에서는 무너졌다. 

 

태종은 조선 왕들 가운데 후궁이 가장 많았던 왕으로 양녕은 아버지도 후궁이 많은데 자신을 질책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상소를 올린 것이다.(태종 실록 35권 태종 18년 5월 30일 기묘 1451년 5월 30일 )

 

그 동안 세자 양녕을 보호하려고 그렇게 노력했던 태종이지만 이 상소를 보고 태종은 양녕을 포기하고 상소를 올린 4흘뒤에 세자를 폐위하는 교서를 내린 후 강화도로 유배를 보낸다. 냉혹한 군주의 이면에 아버지로써의 태종은 최고였다. 이에 마음이 아팠던 태종은 양녕에게 100칸 자리 집을 제공했다. 폐위 후에도 끝나지 않은 양녕의 기행은 회암사에 머물던 양녕이 그곳에서 고기를 구워 먹은 일이다. 

 

병권을 놓지 않았던 태종

 

세종 즉위년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

1418년 11월 25일 세종 즉위년 영의정이자 세종의 장인 심온에게 체포 명령이 떨어진다. 명나라 사신으로 성공적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된 심온이었다. 모진 고문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왕의 장인이었고 심온의 가족들은 관노비로 전락했다.  세종이 즉위 중이었음에도 가족들의 비참한 비극을 지켜봐야만 했던 왕비 소헌왕후였다. 

 

태종은 아들 세종을 위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세종에게 위협이 되었던 세력을 제거한 것이다. 세종의 비 소헌왕후는 태종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가족들의 비극을 겪었던 인물

 

이 모든 일은 상왕 태종의 뜻이었다. 태종이 상왕으로 물어난 후에도 태종은 병권은 놓지 않았다. 모든 군사적인 문제는 자신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병조참판(국방부 차관급)이었던 강상인이 태종에게 직접 보고하지 않고 군사 관련 문제를 세종에게 보고한다. 이에 강상인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배후에 심온이 연루돼 있다는 의혹을 만든 것이다.

 

심온 사신단이 출발할 때 환송식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에 태종의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심온의 위세에 대한 태종의 경계로 심온을 엮어 제거한 것이다. 심온의 위세대한 태종의 경계로 심온은 죽게 된다. 

 

 

형제와 측근을 죽인 태종

이런 일은 이전에도 있었는데 자신의 조강지처였던 부인 원경왕후의 동생들을 모두 숙청했던 태종이었다. 원경왕후와 혼인을 했을때 태종의 나이16세, 원경왕후18세였다. 그때부터 물심양면으로 남편을 내조했던 원경왕후였고 1차 왕자의 난 당시 무기를 제공하는 등 태종의 궐기를 도운 원경왕후의 동생들이었다. 태종이 왕이 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태종10년 1410년 3월 17일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사사된다. 그리고 1416년 나머지 두 형제도 교수형에 처해 제거했다. 이들을 죽인 명분은 1406년 당시 세자 양녕에게 선위의 뜻을 밝힌 태종이었는데 그때 이들의 얼굴빛이 좋았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였다. 이렇게 외척에 대한 경계가 유난히 심했던 태종이었다. 감정적인 면도 많았던 태종이지만 본질적으로 왕권에 위협세력이면 가차없이 제거하는 냉혹한 군주의 모습도 보였다. 

 

 

 

 

신덕왕후 강씨와 태종의 갈등의 상징

광통교

 

태종은 아버지 태조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신덕왕후가 적장자를 제치고 아들 방석을 세자로 옹립하는데 성공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신덕왕후 강씨와 태종의 갈등의 상징이 청계천에 있다. 

 

태종은 청계천을 최초로 정비한 왕으로 청계천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다리를 흙으로 만든 청계천 광통교였는데 비가 많이와 무너져서 다리 정비를 위해 돌이 필요했던 태종은 신덕왕후 무덤의 돌을 갖다 쓰도록 했다. 그렇게 신덕왕후 무덤에 있던 돌을 이용해 광통교 석축을 만들었다. 
심지어 거꾸로 밖아 놓은 돌들도 있을만큼 마구잡이로 사용했다.

 

태종의 업적 

이렇게 양녕을 폐위하고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줬던 태종이지만 병권을 장악하고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장영실도 태종이 발탁한 인물이다.  

 

태종의 제도 개혁

  • 6조 직계제
  • 호패법
  • 사병혁파
  • 팔도개편

 

태종의 대마도 정벌

14199년 세종 1년 왜구들이 서해안에서 약탈을 일삼자 세종과 조정은 고심에 빠지고 이에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감행한다. 세종이 아무리 머리가 좋은 아들이여도 국왕수업을 2달뿐이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친정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일단은 왕으로 세워 안정을 시키고 국왕수업을 받으면서 세종즉위4년까지 세종의 뒤에서 실질적인 국정운영을 했던 태종이었다. 

 

세종 즉위 1418년~1422년 4년간은 태종의 시대로 볼수 있을 것이다. 세종의 대표적 업적에 대마도 정벌이 있지만 실질적 주도자는 태종이었다.

 

뚝섬 유래

 

태종이 강무를 위해 자주 갔던 장소는 뚝섬이었는데 왕이 등장을 하면 둑기를 올리는데 거기서 유래되어 섬 이름이 뚝섬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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