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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꼬꼬무

꼬꼬무 19회 박열 이야기 (박열 아들 어떻게 되었나?)

by 365 ^^ 2022.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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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일본 역사상 유래가 없는 세계사에서 전무후무한 재판이 박열에 의해 열리게 된다. 

 

박열이야기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의 만남 

 

후미코는 박열이 자신의 개새끼로 지은 시에 반했다고  한다. 가네코 후미코가 박열의 이 시를 일본으로 교정해주면서 만나게 되어 연인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는 일본이 하는 데로 똑같이 갚아주겠다는 저항의식이 담겨있는 시로 이것을 보고 후미코는 박열에게 반했다.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의 동거서약 

 

 

박열 후미코 재판의 원인 

관동 대지진과 관동대학살 (일본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

 

관동 대지진과 관동대학살 (일본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

관동 대지진 일본 역사상 최악의 대재앙으로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역 일대에 진도 7.9의 수도권 전체가 초토화되는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다. 집집마다 화재가 발생하고 불길은 목조건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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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박열 , 가네코 후미코 이야기

 

아나키스트 박열 , 가네코 후미코 이야기

박열 이야기 박열은 1902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고 1919년 경성 고등 보통학교 학생으로 3.1 운동에 참여하다 퇴학을 당하고 이후 18세에 일본으로 넘어가 항일단체 의열단(의열단 아님)을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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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은 재판 결과 사형을 선고 받았고 이때 박열의 반응은 만세를 부른다. 그리고 사형선고를 받고 한말이다. 수많은 조선인에게 울림을 준 재판이었다. 

그런데 선고 몇칠 후 형무소로 박열의 감형 문서가 날아온다.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의도는 일본 왕실의 은덕과 정부의 자비를 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본 박열은 감형서를 바로 찢어버렸으나 신문에는 이렇게 나왔다. 

 

 

박열의 재판 후

 그 이후 박열과 후미코는 각기 다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4개월뒤 후미코는 자살했다는 비호가 전해진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흘러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이루어지고 일본 교소도의 독립 운동가 석방이 이루어졌으나 박열은 석방되지 않았다. 일본의 입장은 박열은 대역사범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박열을 내보내면 재일동포들이 박열을 중심으로 뭉칠까봐였다. 이에 탄원이 이어지자 2달이 지나 흘그머니 박열을 풀어줬다.  8091년 22녀 2개월 만이었다. 20대 청년이 40대 중년이 되어서 나온 것이다. 

 

이때 사람들이 구름때 처럼 모였다. 

이때 당시 모인 인원이 만오천명이었다. 

 

석방 후 박열의 행보

석방후 박열은 재일동포 단체를 만들고 후학을 위한 장학사업을 펼쳤다. 그리고 일본에 묻혀있는 우리 독립운동가의 유해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한명이 바로 윤봉길 의사이다. 거사 후 갖은 고문끝에 총살형을 선고 받은 윤봉길 의사였다. 박열과 유해 발굴단이 찾아 나선 곳은 정말 말도 안되는 곳이었다. 

 

▼윤봉길 의사의 말도 안되는 묘지는 어디에 있을까?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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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의 가족들

 

1949년 박열도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한다.  

박열의 아내 이름은 장의숙으로 일본에 유학가서 신문기자가 되었고 석방 후에 일본에서 활동하던 박열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박열은 재혼후 1남 1녀를 낳았고 첫째 아들 박영일씨이다

그러나 박열이 귀국하고 불과 1년 만에 6.25가 터진다.  서울이 함락된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으로 남하하자고 했던 아내의 말을 뿌리치고 서울에 남아있었고 아내와 아이들만 피난을 했다. 그리고 이것이 박열 가족의 마지막이었다.  그 후에 아내는 다시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고 나중에 들려온 박열의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박열이 강제로 납북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로 다시 16년이 흘렀고 당시 3살이던 아들이 19세가 되던 해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다. 북한에서 박열의 사진 한장이 전해져 온다.  67세가 된 박열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사진 뒤에는 아들을 나라에 바쳐라는 내용뿐이었다. 

 

아들은 이 내용을 보고 한국으로 돌아와 육군사관학교 시험을 준비하고 합격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평생의 군인의 길을 걸었다.

 

 

박열은 1974년 북한에서 사망했고 죽은후 1989년 국가에서는 박열을 건국훈장에 추서했다.

박열 건국훈장

 

 

일본인으로써 건국훈장을 받은 두 사람 가네코 후미코와 후세 변호사이다. 후세 변호사의 훈장은 외손자가 수여하였다. 

후세 다쓰지(=후세 다츠지) 일본인 최초 건국훈장 받은 인물

 

후세 다쓰지(=후세 다츠지) 일본인 최초 건국훈장 받은 인물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때 조선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변호한 일본인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후세 다츠지)가 있었다. 수많은 조선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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