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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아나키스트 박열 , 가네코 후미코 이야기

by 365 ^^ 2021. 4. 10.

박열 이야기

 

박열은 1902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고 1919년 경성 고등 보통학교 학생으로 3.1 운동에 참여하다 퇴학을 당하고 이후 18세에 일본으로 넘어가 항일단체 의열단(의열단 아님)을 조직, 재일조선인 사상 단체 '흑도회'에 가입하고 1923년 박열은 한일연합 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해 항일활동을 전개했다. 불령사 조직에는 일본인 8명도 함께 참여했던 아나키즘 단체이다. 

 

박열 실제 모습 (본명 박준식)/ 박열로 이름을 변경한 이유는 성격이 불같아 이름도 성격에 맞게 스스로 바꾼것

* 아나키스트 뜻 ? 모든 권위에 저항하며 제국주의에 대항했던 급진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로 무정부주의자를 이르는 말이다.

 

박열이 조직한 총 21명의 반일 활동 불령사 단체

가네코 후미코 

 

1922년 박열을 만나 아나키스트 동지이자 연인으로 발전하고 박열과 함께 흑도회, 흑우회를 거쳐 불령사를 조직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던 일본인이다. 

 

신문에 실린 박열 후미코(한국 이름 박문자) 부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체포된 이유

 

관동대지진이 1923년  9월1일 발생하고 이틀 뒤인 9월 3일 박열이 체포된다. 관동 대지진을 빌미로 요주의 인물들을 제거하려던 일제는 박열을 포함한 사회주의 청년들을 대거 검거하고 조선인을 위험한 존재로 부각하려는 속셈이었다.

 

 

관동 대지진과 관동대학살 (일본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

관동 대지진 일본 역사상 최악의 대재앙으로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역 일대에 진도 7.9의 수도권 전체가 초토화되는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다. 집집마다 화재가 발생하고 불길은 목조건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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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 암살 미수범으로 체포

이에 박열은 폭탄을 구입하고 일왕폭살 계획 등을 일본이 취조하는 사건의 배후가 자신이라고 말한다. 천황 암살 미수범으로 체포된다.

 

 

박열이 자백한 이유는 대심원 관할 대역죄로 분류되는 '일왕 암살 기도'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역사에 단 4번만 일어난 사건이다. 

 

영화 <박열>

그중에 하나가 박열 후미코의 대역죄 사건으로 대심원 재판의 화제성을 이용해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고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조선인 학살 사건을 조작하고 덮으려는 행위를 폭로해 조선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릴 기회를 얻기 위함이었다. 박열은 오히려 일본 정부를 이용한 것이다.

 

박열은 재판 전 자신의 변호사 (일본인 후세 다쓰지 변호사)를 통해 몇 가지 요구를 관철시킨다. 

 

재판 전 박열의 요구사항&nbsp;
옥중 결혼 후 찍은 사진으로 셔터를 누르기 직전에 갑자기 취한 이 포즈로 인해 사진 찍는것을 허락했던 예심판사 다테마스는 사표를 썼다.

조선어 사용과 재판장과 동등한 높이의 좌석은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해 철회를 하지만 조선 관복을 입고 재판에 나서게 된다. 

 

실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한복차림

박열은 재판때 한복을 입고 사모관대 차람으로 재판에 등장한다. 가네고 후미코 역시 하얀색 저고리에 검은색 치마(일명 유관순 패션)를 입고 들어와 자신을 조선 이름인 박문자로 소개를 한다. 

 

영화 박열은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작품이라고 밝히고 있다.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은 모두 실존인물이고 박열과 후미코가 실린 신문기사와 가네코 후미코의 자서전 및 당시 사람들의 고증을 기록한 수많은 자료를 참고

화제성을 이용해 식민 지배의 부당함을 알리려 사형을 불사한 두 사람이다. 당시 박열의 재판은 엄청난 화제를 모았고 재판 2시간 전 방청석은 만석이었다. 박열은 재판장을 일제의 제국주의를 규탄하는 공연장 같은 분위기로 만든 것이다. 

 

당시 신문 보도 된 박열

처음에 박열 부부는 사형을 선고받지만 제2의 3.1운동을 우려한 일본은 이들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다. 선고 11일 후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사망(자살:23세)하고 박열은 22년 뒤 석방된다. 

 

해방 이후 1945년 10월 27일 박열(43세) 출옥 환영식 사진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에는 아직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형무소 근처에 가매장되었던 그녀의 유해는 박열의 고향 경북 문경에 안장했다가 2003년 박열 의사 기념공원이 조성되면서 그곳으로 이장했다.

 

경북 문경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
경북 문경의 박열 기념관

 

 

이치가야 형무소 터

영화 <박열> 장면 중 

 

이봉창 의사의 사형이 집행되었던 곳이자 박열,카네코 후미코가 수감되었던 곳이 이치가야 형무소이다.  영화 <박열>의 주 배경이 되는 형무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그들은 옥중 결혼도 했고 사형 선고 전까지 지내던 곳이다.

 

구 이치가야 형무소

 

현재는 형무소가 사라지고 놀이터가 들어서 있다. 

일본 도쿄 형무소 흔적만 남은 놀이터 1
이치가야 형무소 터

 

놀이터 한쪽 구석에 1964년 일본 변호사 연합회에서 세운 비석이 있다.

형사자위령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해 주기 위해 세운 비석

형사자위령비는 박열. 후미코를 변호했던 후세 다츠지 영향으로 세워진 비석으로 독립 투쟁의 역사를 간직한 위령비이다. 비석으로나마 남아있는 이치가야 형무소의 흔적이다.

 

쓰레기장 옆에 위치한 위령비

 

석방 이후 박열 

 

박열은 석방 이후에 일본에 독립운동가들의 유해 수습(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에 힘쓴다. 국내에 들어와서는 1946년 신조선건설동맹 초대 위원장과 일본 민단의 초대 단장으로 취임했다.

 

박열에 의해 독립운동가들의 시신이 효창공원에 안치

 

 1950년 6.25 전쟁 발발하고 북한의 보위부에 납북되면서 이후의 행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1968년 경 대동강변을 배경으로 찍은 박열의 모습&nbsp;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박열

 

안타깝게도 박열은 그의 아내가 후미코가 묻혀있는 곳에 같이 묻히지 못하고 1974년 1월 북한은 박열의 죽음을 발표한다. 현재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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