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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

관동 대지진과 관동대학살 (일본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

by 365 ^^ 2021.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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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 대지진 

일본 역사상 최악의 대재앙으로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역 일대에 진도 7.9의 수도권 전체가 초토화되는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다. 집집마다 화재가 발생하고 불길은 목조건물로 만들어진 일본 가옥에 빠르게 번지면서 45만여 가구가 전소되고 10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관동대지진 때 도로 파괴된 모습 

관동 대지진 위치

관동 대지진 위치

일본의 관동 지역(간토 지방)은 도쿄가 위치해 있는 지역으로 관동대지진은 간토 지역과 야마나시 현, 시즈오카 현에서 발생했던 지진이다.

 

관동대지진 규모

우리나라 2016년 경주, 2017년도 포항 지진의 규모는 진도 5.4 정도였고 관동 대지진의 규모는 7.9로 지진 규모 1(리히터) 차이는 32배의 에너지 차이가 난다. 7이 넘어가면 사람이 서있기 힘들고 땅이 갈라지고 솟아나거나 꺼지는 정도로 파괴가 된다.  

 

사망자 피해액

피해액은 전년도 국민총생산 약 1/3 의 손실로 현재가치 (약 46조 원)이었다. 베트남전 미군 전사자가 참전 9년동안 5만 8천여 명 정도였는데 관동 대지진 한번에 사상자가 10만여 명이니 상상초월의 끔찍한 재앙이었던 것이다. 

 

파괴된 가옥 모습 

관동대학살 배경

그런데 지진이 발생한 직후 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이 마을에 불을 지른다, '등의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한다. 

 

유언비어에 현혹된 일본 민간인이 '자경단'을 결성해  9월1일부터 6일까지 군경과 공조한 자경단이 학살을 주도해 재일 조선인 6661명이 죽게된다.(독립신문 집계 숫자)

 

정부의 방조 하에 군인 경찰까지 가담하면서 처참하고 관동 대학살이 일어난것이다. 

자경단이 조선인을 구별했던 방법은 납작한 두상, 큰키, 긴 머리카락 같은 어이없는 기준을 포함, 일본어 발음 구사능력으로도 구별했는데 기미가요, 도도이츠(일본 전통 노래), 이로하(일본어 자모음 배열) 등의 조선인이 발음하기 힘든 발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죽창을 든 자경단이 불시 검문후 살해했다.

 

 조선인 범죄자 및 무고한 조선인까지 구금.보호되어 있는 일본의 나라시노 수용소가 있었다. 문제는 이 수용소에서 조선인 사람들을 오픈을 시키고 자경단에게 배급, 살인, 방조를 했다. 

 

 

 

주동자 미즈노 렌타로

관동대학살 유언비어 조작 및 학살 주동자로 일본 내무대신인 미즈노 렌타로가 있었다. 

 

미즈노 렌타로 관동대학살 유언비어 조작 및 학살 주동자

그는 관동 대지진을 빌미로 조선인을 위험한 존재로 부각시켜 요주의 인물들인 재일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를 한 번에 제거하려던 일제는 박열을 포함한 사회주의 청년들을 대거 검거한다. 

 

처참하고 잔혹했던 학살의 현장 

 

[일본인 학살 목격자 증언들]

 

참살당한 조선인들의 시체가 뒹굴었고 많이 저항한 모습으로 손이 잘려 있었고 돌을 들고 시체에다 던지기도 했으며 사람들은 거의 발가벗겨 손을 뒤로 묶은 채로 끌려와서는 불속에 던져졌다. 구덩이를 파서 총살하면 바로 떨어졌다. 시체를 태우려 장작으로 덮었으나 장작만으로 타지 않아 휘발유를 뿌렸다. 여자든 아이든 상관없었다. 

 

일본인 학살 목격자 증언
 학살된 조선인 사진 1
학살된 조선인 사진 2
 학살된 조선인 사진 3
 학살된 조선인 사진 4

 

학살이 가장 심했던 아라카와 강변

 

아라카와 하류가 흐르는 이 지역 일대는 당시 도쿄 시내의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이 가장 격심했던 곳이다.

 

관동대학살 당시 수많은 조선인들을 다리 위에서 살해 후 아라카와 강물로 던저졌던 곳으로 이 강물 밑에는 아라카와 강 부근에서만 집계된 것만 약 120 명 사망이 확인되었고 영문도 모른 채 무참히 살해된 조선인들은 추정된 희생자 수가 6000여 명이지만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정부가 방조한 마녀사냥이었다.

 

 학살이 가장 심했던 장소 아라카와 하류
1982년 한국인 희생자 유골 발굴 작업이 이루어 졌다. 

 

관동대학살 추도비

 

관동대학살이 일본의 잘못이라는 것을 일본사람이 인정하고 세워놓은 추도비가 아라카와 강에서 얼마떨어지지 않은 주택가에 위치해 있다.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비석으로 반대 세력에 의해 훼손당할 것을 우려해 사유지에 추도비를 건립한 것이다. 모금을 통해 마련한 땅에서 소중하게 지켜온 추도비이다.

 

개인 주택에 추도비가 있다. 
관동대학살 추도비 

비석을 세운 단체의 이름은 '봉선화' 이다. 봉선화로 이름을 지은 이유는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애창가 봉선화였는데 그런 봉선화에 빗대어 민족의 부활을 꿈꾸게 한 노래로 봉선화를 부르며 망국의 한을 달래던 노래였고 1940년 일제에 의해 가창금지령이 내려졌던 곡이다. 자신들의 운동도 언젠가 꽃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관동 대학살에 대한 1100명의 증언을 모아 책 출간 
관동대학살의 참상을 알리고 있는 일본인 니시자키 마사오 

관동대학살에 대해 한국정부는 일본에게 공식적인 진상 규명과 항의를 하지 않았고 국회에서도 진상 규명 법률안 입안도 진행되지 않다. 6661명의 희생자수 조사도 1923년 임시정부가 조사한 것이 유일하다.  관동대학살로 중국인 650여 명도 포함되어 있었고 10여 명의 사회주의 일본인도 희생되었다. 

 

중국의 관동대학살 희생자 일본에 공식 항의

이에 중국정부는 1923년 정식으로 일본 정부에 항의 문서를 전달했고 20만 엔의 배상금과 함께 사과를 받아냈다. 정작 학살의 주희생자인 조선인에게는 사과는 커녕 자신의 국가에서 조차 잊혀지고 있다. 

 

[출처: 역사저널 그날 218회, 선녀들 4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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