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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꼬꼬무

대구 지하철 참사 범인 방화 이유 기막히네.. 진짜 원흉은? [27회]

by 365 ^^ 2022. 5. 7.

대구 지하철  참사 

대구 지하철 화재 발생 과정
2003년 2월 18일은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대구 지하철 대참사가 일어난 날이다. 이날 50대의 운동복 차림의 한 남자가 지하철을 탔는데 옆에 있는 약수통을 만지작 만지작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라이터를 끄집어 내서 불을 켰다 껐다 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이에 그 남자의 주변에 있던 사람은 담배를 피우려는 줄 알고 화를 냈다.

 

 

그리고 열차가 중앙로역에 들어설 무렵 갑자기 남자의 바지에 불이 붙었고 몇 사람이 힘을 합쳐 그 남자의 불을 끄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생겼다. 그 남자가 앉았던 자리와 바닥에서 불길이 활활 올라오고 있었다. 그 남자가 가지고 있던 약수통에는 기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1079호 열차 화재

불길은 점점 옆 좌석으로 옮겨 붙었고 화재 발생 1분만에 첫 신고가 접수되었다. 불길이 붙는 속도는 기다릴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승객들은 탈출하기 시작하고 불이 난 열차는 1079호 열차였다. 첫번째 칸에서 불이 나서 계속 옆칸으로 옮겨 붙고 있는 상황이었다.

 

열차가 있는 승강장은 지하3층으로 탈출을 하려면 승강장 계단을 올라가서 개찰구를 지나 지하 1층 상가구역으로 올라간 후에 다시 지상출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지하 3층에 있던 사람만 최소 200명이었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시커먼 연기가 먹구름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1080호 열차 화재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들어온다. 불이난 승강장 반대편으로 1080호 열차가 들어 오고 있던 것이다. 당시 1080호 열차의 손님은 중앙로역에 불이 난것을 모르고 엄청 평온했다.  열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검은 연기가 빨려 들어왔다.  그리고 내릴 사람은 내려주고 급히 문을 닫고 승객들은 열차가 곧 출발할 것이라고 생각해 열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실제 승객들의 모습


그러나 열차가 출발을 하지 않고 있었고 옆을 보니 1079호 열차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나가려니 위험할 것같고 기다리고 있자니 연기와 냄새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고 전기는 켜졌다. 꺼졌다는 반복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1080호 열차로 불이 옮겨 붙기 시작했고 승객들은 119로 전화하기 시작했고 20분 동안 150통이 넘는 신고가 접수되었다.

 

 

 

방화범이 불을 낸 이유 

방화범 김대한(당시 56세) 씨로 건강 악화를 비관하여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구입 후 지하철에 탑승한 후 불을 지른 것이다.

 

방화범 김대한
현장 검증

 

 

화재 진압의 난관

 

연기

대구 전역의 소방차, 구급차가 총출동을 했다. 그러나 제일 큰 난관은 연기로 인해 시야확보가 되지 않았다. 팔을 뻗으면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계단을 덤듬어 내리가다가 발에 치이는 것이 사람이였고 그렇게 한명씩 구조해 나왔다.

 

 

열기
또 다른 난관은 열기였다. 벽, 바닥은 물론 공기까지 뜨거운 상태였다. 그 열기를 뚫고 쓰러진 사람들을 옮기고 또 옮긴 구조대원들이었다.  그러나 다시 내려갈적마다 점점 더 쓰거워지고 더 캄캄해졌다. 결국 열차가 있는 지하 3층은  진입 불가가 되었다. 방화복을 입었는데도 너무 뜨거워 접근을 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화염은 계속 치솟아 무려 1시간 40분 동안 계속되었다. 승강장 진화 작업은 그 이후에나 가능했다.  이미 지하 3층은 탈데로 다 타버린 상황이었고 열차 안에는 사람의 뼈만 있었다.

 

 

탑승객 숫자의 파악 어려움
더 큰 문제는 지하철이라 탑승객 숫자를 알수가 없었다.  화재로 인해 신원 확인이 불가능 했고 가족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이병원 저병원 찾아다녔고 그래도 가족의 생사를 확인할수 있는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 했다. 이 상황보다 더 기막힌 상황은 가족의 생사조차 확인할수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고 후 연락이 두절되었는데 어디에서도 가족을 찾을수 없었던 것이다.

 

 

사상자/ 사망자 수 통계
1080호 열차 안에는 온전한 시신이 단 한구도 없었다. 열차 안에 남아 있던 것은 유골 일부분과 타다 남은 소지품들만 존재했다.  심지어 수많은 유해가 뒤엉켜서 누가 누구인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수백명의 실종자 가족들은 실종자의 마지막 소지품 목록을 적어야 했다. 

 



이날 지하철 참사의 사상자는 무려 350명에 이르렀고 사망자만 192명이었다.  전체 사망자의 74%가 처음 방화가 일어났던 열차인 1079호가 아니라 뒤늦게 들어온 1080호에서 142명이 사망한 것이다. 1079호의 사망자는 없었고 사망자는 1080호에 집중되어 있었다.

 

1080호 열차 사망자 집중 이유 

 

지하철 종합사령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9: 52분 
지하철의 종합사령실은  22개의 모니터로 모든 열차를 실시간 감시하는 곳으로 기관자들을 이 사령실의 지시에 따라 운행을 하는 것이었다.  1079호에 불이난 시간은 오전 9 : 52분이었다. 사령실 모니터에 불이나고 시커먼 연기가 뒤덮는 장면이 1분 30초 동안 포착이 되었다. 그러나 종합사령실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작동이라 생각하고 어떤 조취도 취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 사령실 모니터 화재 장면

 

9시 55분

결국 화재사실을 알게 된것은 화재 발생 3분 후였다.  이때가 9시 55분이었다.  그 시각에 1080호 열차는 아직 이전 역에 있었다. 중앙로역으로 들어오기 전이었다. 그리고 사령실에서는 화재가 발생했으나 조심히 들어오라는 지령을 내린다. 119에 신고도 하지 않고 1080호에 대한 별도의 대처도 없었다. 

 

실제 종합사령실 교신 내용

 

9시 56분

1080호 기관사의 판단은  승강장에 진입하니 연기를 발견하고 별도의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불이난 중앙로역에 정차했다.  이때가 9시 56분으로 불이 나고 4분이 지난 시간이었다. 손님들은 자리에 차분이 앉아 있었다. 곧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차에 전기가 끊겨버렸다. 이때 사령실과 기관사는 전기가 끊기는 상황에서 열차 출발시키는데에만 몰두를 한 것이다.

 


그렇게 허비한 시간이 무려 5분이었다. 그 사이 전기가 아예 끊어지고 사령실과 교신이 되지 않았다.  뒤 늦게 열차 출입문 개방문을 열었으나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대로 열차에 갖쳐버린 승객들이었다. 

 

 

1080호 기관사만 탈출
80호 열차는 이미 암흑천지와 열기로 가득차 있었다.  5번칸에서는 승객 몇명이 유리창을 깨고 탈출에 성공했고 4호칸은 마침 역무원이 승객으로 타고 있어서 수동으로 문을 개방해서 탈출했다. 그러나 수동으로 문을 연 일반승객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렇다면 1080호 기관사는 무었을 하고 있었을까? 1호칸 출입문 몇개만 열고 자신은 탈출해버렸다. 

 

 

그러나 겨우 빠져나온 승객들도 탈출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참사만큼이나 더욱 황당한 일이 있었다. 

사건 은폐의혹
1080호 기관사의 행방이 11시간 동안 묘연했다. 그들은 대책 회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고 직후 지하철 공사 간부들이 1080호 기관사를 소환해 식당, 다방 등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재 다음날 중앙로역에 군인 200명이 와서 화재 다음날 중앙로역 정상화를 위한 청소를 해버린 것이다.  이들은 잔해들을 싹 쓸어담고 물청소까지 했다. 

 


그렇게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서는 사망자들의 신체 일부분과 소지품 150여점이 발견돼었다.    

 

대구 지하철 참사의 진짜 원흉은?

그러나 대형참사를 일으킬수 밖에 없던 원흉은 따로 있었다. 지하철 자체였다. 사실 방화범이 뿌린 휘발유는 고작 2L였다. 휘발유 2L에 전동차 2대가 불이탄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었고 옆 칸으로 옮겨 붙었다는 것도 말이 전혀 되지 않았다.

 


당시 지하철 안전기준은 불에 타기 어려운 재질=난연재에 대한 세부기준이 명시되지 않았고 유독가스에 대한 기준은 단 한줄도 없었다 . 사고 이후 지하철 모형에 실시한 화재 실험에서 천장 내장제까지 모두 실험을 해봤으나 전부 활활 타올랐고 그 중에서도 가장 잘 탔던 것은 지하철 좌석이었다. 대구지하철은 개통 이후 방염처리를  한번도 한적이 없었다.

 


불연재를 만드는 기술은 충분했다. 그러나 전동차를 만들던 회사는 같은 전동차를 해외에도 납품을 했으나 가격 차지가 있었다. 해외 수출용은 16억 , 국산은 6억이었고 이것은 소재의 차이였다. 

 

 



대구 지하철 참사 처벌
대구 지하철 참사로 사법처리 된 사람은 총 10명이다.  방화범은 무기징역형을 받았고 1080호 기관사는 5년 형을 받았다. 그러나 불쏘시개 전동차를 만든 책임은 누구도 지지않았다.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수감 중 1년반 뒤에 사망함.
기관사 두명과 운전 사령관은 징역 4년 선고받음

 

 

유해수습 
이때 희생자 유류품 전시회를 열어 가족들이 지목한 유류품으로 유해를 대조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678개의 유류품 4000장의 사진이 가족을 찾고 있었다.  유해를 수습하는데 총 3개월이 걸렸다.  생존자를 대부분이 정신적인 고통을 여전히 겪고 있고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가장 큰 고통이다.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이후 모든 전동차가 불연재, 극난연재로 교체가 되었고 지하철 화재를 위한 화재대비 매뉴얼도 마련이 되었으며 승강장 문제 발생시 비상정지 시킬수 있는 버튼도 구비되었다. 

 

 

대구 시민안전테마파크 
대구지하철 참사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 공원, 추모비는 없다. 당시 희생자 유가족, 대구시민들의 성금으로 5년뒤 마련된 공원의 명칭은 시민안전테마파크이다. 추모공원, 추모비가 혐오 시설이라는 이유였다. 훗날 명칭 변경을 약속하고 건립되었지만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안전은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인 것이다.

 

유가족에게 사람들은 이제는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잊으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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