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과 판박이다. 베트남은 한국과 같이 오랜시간동안 프랑스의 식민지로 독립전쟁 끝에 마침내 해방이 되었으나 그 이후 곧바로 미국과 소련이 개입해서 17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나눠졌다. 그래서 북쪽엔 공산당, 남쪽엔 친미정권이 들어선다. 그러다 베트남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 이때 남한, 북한 모두 참전을 했고 베트남전쟁을 제 2의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돌아오지 않은 안학수 하사
우리군은 1964년 베트남으로 파병을 가게된다. 안학수는 하사의 계급으로 베트남 파병을 간 군인이었다. 그리고 2년의 복무를 마치고 드디어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러나 안학수 하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월북한 안하사
집안 식구들은 걱정을 하면서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고 그렇게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라디오에서 안학수 하사의 목소리가 들리고 북한으로 월북했다는 소식이었다. 집안 식구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식구들은 보안사(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에 끌려갔고 식구와 내통을 하는지 간첩활동을 하는지 등을 조사를 한다는 명목하게 고문과 협박을 일삼았다.
보안사는 군사정보 휴식과 수사를 목적으로 창설된 국방부 직할의 군 수사 정보기관으로 그 이후로 수시로 보안사 요원들은 집으로 들이닥쳐서 온 집안을 뒤집어 놓고 갔고 안학수가 월북했기 때문에 잠재적 간첩 즉 빨갱이 간첩이라고 했다. 얼마 후 가족들은 빨강이 가족이라는 프레임이 씌워 아버지는 교장선생님으로 있던 학교에서 쫓겨났고 동생은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결국 온 가족이 달동네로 이사를 가게되었다.
안학수 보고서에는 안학수 하사의 집안 계보가 적혀있고 친척포함 무려 42명 즉 집안 전체를 감시한 것이었다. 학력, 직업, 직장, 주소, 월급 등을 모두 조사했고 이런 감시는 1993년까지 무려 26년간 지속되었다.
안학수 하사의 월북 이유
아버지는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어머니는 지병을 앓게 되었고 가족들은 온전한 정신으로 살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족들이 이해할수 없었던 것은 학수가 월북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안학수 하사는 가족들에게 효심과 귀향하고 픈 마음이 담긴 편지를 보냈었고 베트남에서 성경을 읽었을 만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종교의 자유가 없는 북한으로 절대 월북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안하사의 부모님은 정부에 재차 확인을 요청했고 정부는 월북자가 아니라는 증거를 가져오라는 답변만 계속돌아왔다.
그렇게 또 다시 30년이 흘러 2000년이 되었고 끝내 아들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다음해에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리고 3달뒤 아버지도 눈을 감으셨다.
유언으로 안하사의 일을 해결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에 안하사의 동생은 국방부, 청와대에 민원을 계속 넣었고 신문사, 방송사를 찾아다니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안학수 하사의 사라진 그날
그렇게 8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안하사의 동생은 외교부 출입기사로 부터 전화 한통을 받는다. 기밀 해제된 문건이 있는데 확인을 위해 400장되는 문서를 이메일로 보내왔던 것이다. 베트남전 당시 외무부가 국방부, 청와대 등과 주고받은 문서로 안하사를 포로로 판단한다는 문건이었다.
안하사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날은 귀국 일주일 전 1966.09.09일 부대일로 출장을 나갔다가 행방 불명되었던 것이다. 당시 남베트남에는 베트공(=공산단 게릴라 조직)이 활동하고 있었고 베트공에게 납치되어 북한으로 강제로 끌려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증언자 유종철 등장
당시 유종철 국군도 베트콩에게 포로로 붙잡혔는데 국군의 정보를 케내기 위해 고문을 일삼았고 무려 1년 동안 퉁퉁부은 맨발로 정글 속을 계속 끌려다니다가 북한으로 끌려갈뻔 했으나 그 직전에 전쟁이 끝났던 것이다. 그래서 석방되었다.
안학수 하사 총살
그러나 더욱 충격적인 것은 1976년 귀순자의 증언이 있었다. 안학수 하사는 북한을 탈출하려고 하다가 잡혀서 총살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모든 내용을 보안사는 다 파악하고도 사망 소식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총살 정보 입수가 1976년이었는데 가족을 1993년까지 가족들을 17년간 계속 사찰을 했던 보안사였다.
정부는 왜 방관했던 걸까?
베트남 파병갔던 국군이 돌아오는 날 성대한 개선식이 열렸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환영식을 했다. 또한 한국군 사령관이 귀국 보고도 했다. " 우리는 각하와 국민 여러분의 지원과 격려로 용감히 싸웠고 그 결과 한국군 포로는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 라고 보고한 것이다. 당시 미국군 포로의 수만 591명이었다.
그러나 개선식이 끝나고 1주일 만에 1년간 포로로 끌려갔던 유종철 일병이 나타난 것이다. 그때 유종철 일병을 본 정부의 반응은 엄청 예민했다. 한국 도착시 동선과 멘트를 일일이 지시했다. 대한민국 도착하면 옆구리를 찌르면 대한민국 만세 3번만 외치고 입을 닫도록 지시했고 언론 접근을 차단하고 한달간 가족 면회 조차 금지시키며 조사를 했다.
단 한명도 없다던 국군 포로와 돌아오니 국군 포로가 더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기 시작한 국민들에게 유종철 일병이외에는 일절 국군포로는 없다고 부인을 했다. 그러나 외무부 기밀문서에는 안하사말고도 2명이나 더 있었는데 정부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베트남 파병을 결정한 이유
사실 베트남전 파병을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6.25 전쟁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왜 남의 나라 전쟁에 우리 청년들을 내보내냐는 반대여론이 엄청 일어났으나 월남 파병안은 결국 국회를 통과했다. 야당은 불참한 상태에서 여당이 단독으로 밀어붙여서 통과시킨 것이다.
미국의 협박과도 같은 요청이 있었다. 한국이 파병을 하지 않으면 한국의 주한미군을 빼서 베트남에 파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60~70년대) 보릿고개로 너무 가난했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 라는 말의 어원이 보릿고개 때 배가 고파 소나무 속껍질을 삶아 먹거나 흙을 물에 개어 쪄 먹기도 하면서 잦은 배탈로 겪었던 고통으로 유래된 말이다.
그래서 당시 정부의 지상 과제는 경제 성장이었고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은 돈이었고 미국이 더 많은 군인을 전쟁터로 보내면 더많은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비전투 부대만 파병을 했다. 이후 청룡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 등 전투부대를 투입시켰고 그렇게 8년 반동안 연인원 32만여 명을 투입시켰다.
외화벌이로 이용된 사람들..
베트남전에 참전한 나라중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한 것이 바로 우리나라였다. 당시 주한미국 대사가 미 국무부로 보낸 전문의 내용이 있다. 한마디로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한국군 5만 여명을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알라딘의 램프로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정부는 한국군을 파병하고 미국에 끊임없이 소원을 빌고 있다는 것이다. 그 소원은 돈이었다.
베트남 파병으로 얻은 이익은 무려 50억 달러로 당시 우리나라 1년 수출 총액이 1억 달러 미만이었다. 이말은 50년 치 수출액을 8년 만에 벌어들인 셈이다. 이때 민간인들도 6만여명이 이용되었다. 군수물자 운반, 도로, 기지건설등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목숨을 건 청년들의 외화벌이로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파병군인들 개개인은 얼마를 벌었을까? 일병 기준의 일당은 1.7달러로 미군의 1/4도 안되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같이 출전한 태국, 필리핀군보다도 턱없이 낮은 보수였다.
돈을 주는 미국입장에서는 한국군이 많을수록 완전 땡큐였다. 당시 미 대통령 특보가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면 미군이 한국군에게 지급하는 물자와 자금의 총비용은 비슷한 수의 미군에 투입하는 양에 비하면 땅콩값 정도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껌값이라는 말이었다. 싼값에 한국 군인들을 써먹었다는 내용이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국군 32만 4천여 명 중(연인원) 1만 962명이 부상 5099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덕에 한강의 기적을 이뤄 잘 살게 되지 않았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나라가 가난해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면 국가의 도리는 국가를 위해 목숨바친 이들을 끝까지 책임을 져야하는 것인데 죽고 다치는 것은 어쩔수 없다고 쳐도 실종돼서 포로로 잡혀갔으면 최소한 찾아내려는 노력이라도 해야했다.
살아돌아온 유일병의 유해는 누구의 것인가?
당시 포로를 위한 당시 정부가 했던 노력은 유일병은 전투중에 총에 맞고 실종되었는데 불과 10일 만에 전사처리를 했고 시신 확인도 하지 않고 가족에게 전사통보를 알렸다. 그러나 정말 황당한 것은 유일병의 유해가 국내로 송환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합동 장례를 진행 후 국립묘지에 안장까지 시킨 상태였는데 죽었다던 사람이 살아돌아 온 것이다. 그렇다면 국립묘지에 묻힌 유해는 누구인가?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것이 누구의 유해인지 알지 못한다. 유 일병이 돌아온 이후에 쥐도새도 모르게 유해는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그 유해도 누군가의 아들이었을 것인데 ...
유 일병은 엄청 운이 좋게 베트콩 장교와 포로를 교환하자는 베트콩의 요구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무사히 귀환했다. 베트콩이 포로 교환 요구를 안했다면 안 하사처럼 강제 북송되었을 수 있던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이렇게까지 국군포로를 외면한 것일까? 엄청난 비난 여론을 뚫고 파병을 했던 상황이라 포로가 생겼다면 정부에 쏟아질 비난과 원망을 막아버리기 위해 국군 포로의 존재를 지우려 했던 것이다.
미국이 포로를 대하는 자세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블랙다크호크>같은 그런 영화를 보면 최후의 한 명까지도 지키는 모습처럼 실제로 미국은 전장에 나간 병사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전쟁포로 실종자 인식의 날' 이라는 국가기념일도 있다. 그리고 미국방부는 전쟁포로 실종자 확인국이라는 부서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
미국은 '베트남전 참전 실종 미군'을 지금도 찾고 있고 2년 전에는 베트남 인근 바다 밑에서 유해를 발견했고 최신 해저 로봇을 동원하여 수색했고 무려 53년 만에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죽었다 살아온 사람을 호적에는 어떻게 적어놨을까? 부활이라고 적혀있다.
안하사의 동생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안학수 하사는 병적기록을 "탈영/월북자" 에서 "국군포로" 로 변경되었다는 통지를 받아냈고 이것은 실종된지 43년 만의 일이었다. 안하사를 포함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우리군은 17명으로 추정되고 그 외에 민간인 근로자 10명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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