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자선당
경복궁 근정전에서 동쪽에 위치한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빈의 거처이다. 비현각은 세자가 공부하며 정무를 보전 외전에 해당한다. 세자는 새로 떠오르는 태양을 의미하기 때문에 동쪽에 왕세자의 거처를 배치했다.
조선 초에는 동궁은 궁궐밖에 위치했었으나 궐 안에 동궁전으로 자선당을 짓기 시작한 것은 세종(1427) 9년때이다.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되어 1876년 재건된다.
19세기 말 경복궁의 건물 수는 총 509동(6,806칸)이었으나 20세기 초 남은 건물 수는 총 40여동 (857칸)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469칸이 사라져 버린것이다. 이는 1910년 전각 총 6,806칸 중 4000여 칸을 경매에 붙였으나 1914년 자선당, 비현각 등 15동 , 문 9개 소 등을 공매했다.
그 후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 개최를 구실로 1914년 동궁 일대를 완전히 철거했다.
수난의 자선당
1914년 자선당은 경복궁 철거에 앞장 섰던 일본인 '오쿠라'에게 경매로 팔려 그의 집 뒤뜰에 옮겨진다. '조선관'이라는 이름의 개인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23년 일본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서 목조 건물이었던 자선당은 결국 화재로 소실이 되고 만다. 오직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자리에 오쿠라호텔이 들어섰다.
그리고 석축만 남아있는 상태로 이후에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그저 방치되었다.
이 석축(=유구) 기단은 원래 자선당 자리에 있어야 한다. 본래의 자선당 기단에 복원하는게 정상이나 불에 타서 금이 가고 깨진 석축은 너무 약해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해 환수된 후 석축 위에 자선당을 복원하지 못하고 건청궁 뒤뜰에 옮겨 놓은 것이다.
도쿄대학에 객원 교수로 있던 김정동 교수님이 자선당이 어디로 반출되었지 찾기 시작했고 오쿠라 호텔 정원에 버려져 있던 불에 탄 자선당 기단과 주춧돌들을 1993년 발견하고 그의 노력으로 마침내 1996년 경복궁으로 환수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곳 건청궁 뒤뜰 자선당 유구가 있는 이 자리에 더 가슴 아픈 일은 을미사변(1895년)때 명성황후 시해 후 황후의 시체를 바로 이곳 뒤뜰에서 불태운 것이다.
어머니는 불타고 아들의 집도 불에 타버린 아픔의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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