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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

간송 미술관 전형필이 수집한 문화적 가치 이상의 유물들

by 365 ^^ 2021.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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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간송 미술관이 재정난으로 7세기 신라 불상 금동여래입상, 금동보살입상 보물을 경매에 내놓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국립박물관에서 구입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는데 몇 대에 걸쳐 이어오고 있는 간송의 문화사업이 막대한 상속세로 인해 무너지려나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서울시 성북구 위치한 간송 미술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

 

영화 취화선의 주인공 오원 장승업, 추사 김정희,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간송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서화뿐만 아니라 청자, 백자, 국보 14점, 보물 12점도 포함 우리 문화 1500여 점에 달하는 유물들이 간송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을 수집한 인물이 간송 전형필이다.

 

 

그렇다면 전형필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수집품들을 모을수 있었나?

    

전형필은 서울 종로의 대재력가의 집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그의 집은 99칸의 대가였고 청소년 시기에 그의 열정은 도서수집이었다. 그러나 집안 어른들은 싫은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에 집안 어른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전형필은 일본 유학을 가게 된다. 

 

대학생이 되던 그 시절 전형필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대학생 때까지도 도서수집에 열중하고 있었고 이 무렵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 오세창을 만나면서 인생이 전환점이 온다. 간송 전형필은 오세창과 많은 작품들을 공부하고 감상하며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안목을 키워 나갔다. 

 

 

오세창은 전형필이 작품을 가져올때마다 가치를 직접 평가하고 정리한 글을 남겼고 식민지 조선에 대해 해야 할 일을 인지 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일본의 민족 말살 정책을 통해 조선의 언어, 문화생활양식 모든 것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에 그는 그의 전재산을 바쳐 진귀한 문화유산을 수집하는데 일생을 바치게 된다. 

 

 

훈민 정문 원본 (국보 70호)

 

간송 전형필이 수집한 유물 중에 문화적 가치 이상의 유물 중 하나는 국보 70호인 훈민정음 원본이다. 현재 단 한권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 원본을 국보 1호로 지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을 만큼 대단히 귀중한 유산이다. 이 책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한글의 제작 원리가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 책을 통해 한글 창제의 비밀을 전 세계에 내놓을 있었던 것이다.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 모음은 천지인의 철학을 담아낸 글자임이 밝혀진 것이다. 이 책으로 인해 한글의 과학적이고 우수한 글자임에 대한 근거를 댈 수 있는 너무나 귀중한 자료인 것이다. 

 

훈민정음 혜례본 (=훈민정음 원본)으로 훈민정음 창제원리, 과정등을 해설에 놓은 한문 해설서 

 

간송 전형필은 1943년 6월 우리글을 탄압하던 민족 말살 정책이 실시되던 일제 강점기에 훈민정음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집 10채값에 해당하는 만원을 지급하고 훈민정음을 보관하다 해방 후 공개한다. 현재 훈민정음 원본은 199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에서 유일하게 제작 원리가 밝혀진 글자로 인정받고 있다. 

 

 

상감청자 운학문매병(국보 68호)

 

고려청자의 백미로 꼽히는 상감청자 운학문매병(국보 68호)은 수천 마리의 학이 새겨져 있는데 고려 시대의 독창적 상감기법의 절정을 보여주고 현존하는 고려청자의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상감청자 운학문매병 독창적 상감기법의 절경을 볼수 있는 고려청자

군수 월급이 70원이던 시절 일본인들의 손에 들어가기 직전 전형필은 2만원(당시 기와집 20채 값)이라는 거금을 주고 이 청자를 구입한다. 그 후에 일본인이 이를 구입하기 위해 구입한 가격의 2배를 준다고 했으나 절대 팔지 않았다고 한다. 이일로 전형필이 단순한 이익을 쫓는 사람이 아님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 

 

 

 

 

혜원 전신첩 (국보 135호)

 

신윤복의 풍속 화첩인 '혜원 전신첩' 은  간송 전형필은 이 신윤복의 그림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고 간송 전형필은 조선시대의 걸작들을 위주로 수집을 했기 때문에 전형필의 수집품이 없다면 조선 후기 회화사 연구는 불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윤복 화첩 혜원 전신첩 총 30여점의 그림이 수록

 

 

고서적 수집

 

1932년 전형필 25세때 그는 지금의 인사동 통문관 자리에 한남서림을 인수한 후 일제에게 빼앗긴 우리나라의 고서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한다. 그때 수집된 책들은 오늘날 국학 연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좌) 금보 보물283호 : 조선시대 거문고 국악 악보  (우) 동국정운 국보71호: 한자음을 최초로 한글로 표기한 책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국보 270호)

 

전형필의 문화유산 수집품의 가장 큰 사건은 영국인 국제 변호사로 일본에 있던 존 게스비의 '청자 원형 연적'을 수집한 것이다. 비색과 어우러진 원숭이 모자의 평화로운 모습을 담아낸 걸작이다. 그는 고려청자의 모습에 매료돼 많은 대부분의 고려청자를 일본의 관리들에게서 수집했던 수집품들이라 그만큼 값비싸고 진귀한 작품이었다.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국보270호) : 고려시대 귀족이 애완용 원숭이를 길렀다는 것을 알수 있음

 

일본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게츠비는 자신의 소장품을 처리하길 원했고 전형필은 게스비의 소장품을 한꺼번에 구입하기 위해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5000 석지기 땅을 팔아 돈을 마련했다. 개스비에게서 수집한 것은 국보 3점을 포함 수십 점의 최상위 걸작품들이었다.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채 난국초충문병 (국보 294호 )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채 난국초충문병 (국보 294호 )

 

1936년 당시 전형필이 구입한 석조 3층 석탑의 경매를 주도했던 거상 야마나까와 이 조선 최고의 백자를 놓고 구입 경쟁이 붙었는데 경매 사상 최고가를 경신하며 1만 4천5백80원에 구입했다.

 

조선백자의 제작기술이 집대성된 걸작

 

 

 

 

 

간송 전형필은 해방과 함께 문화재 수집을 멈춘다.  해방되었으니 문화유산이 우리나라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의 예술사를 복원하기 위한 그의 꿈를 하나하나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후 가난한 문화예술인 후원에 힘썼고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찾아내 학술적 토대를 만들기 위해 한국미술 사학계 1세대인 김원형, 최순우, 황수영, 진홍섭과 교류하며 한국 미술사학계를 연구한다. 

 

전형필 1954년 문화재 보존위원회 위원

 

그 첫번째 작업이 바로 동인지 '고고미술'의 창간해 우리 미술사 연구에 중심이 된다. 전형필이 수집한 우리 문화유산을 통해 단지 수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유산을 보존, 연구하는 것으로 '한국민족미술 설립' '간송 문화' 발간 (연 2회) 등의 활동을 한다.  

 

1938년 보화각 (빛나는 보물을 모아두는 곳) 를 건립하는데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의 전신으로 우리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연구, 전시할 공간 마련을 위해 건립한다. 

 간송 미술관 전신 보화각 (빛나는 보물을 모아두는 곳) 1938년 건립

 

문화유산 수호에 일생을 받쳤던 간송 전형필은 57살에 세상을 떠나지만 그가 지켜낸 문화유산을 통해 우리의 삶과 정신을 찾아내고 예술과 역사를 지켜낸 인물이다.  

 

[출처 kbs 한국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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