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 방송 리뷰

병인양요 외규장각 이야기

by 365 ^^ 2021. 5. 20.
반응형

외규장각이란? 

정조때 세워진 외규장각은 왕실의 귀중한 물건을 보관하는 보물창고로 쓰였고 의궤들도 모두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다 1866년 병인양요때 강화도를 침입해온 프랑스 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만다.

 

 

 

 

 

* 의궤란? 의식과 궤범의 합친 의미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 이라는 뜻이다.  중요한 국가 행사를 진행할때 시행착오를 줄일 목적으로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행사를 그림과 함께 기록으로 남긴 보고서와 같은 것으로 행사에 동원되는 사람 수, 각종 물품, 재료 등이 그림과 함께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인천 강화도 외규장각/ 병인양요 당시 불타 없어진 것을 2002년 복원

 

병인양요(1866)

 

1866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천주교 신도 프랑스 신부들이 처형됐다. 이를 빌미로 프랑스는 병인양요(1866년 10월 11일)를 일으킨다.  프랑스군은 1866년 10월 11일 7개의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를 침입했다. 

 

당시 천주교 신부 처형 모습
19세기 한국에서 순교하신 9명의 외방전교회 신부님들 초상 그림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군인으로 참전했던 사람은 1400여명이고 당시 함대를 이끌었던 사람은 구스타프 로즈 제독이었다. 7대의 함대를 이끌로 강화도로 침공했고 당시 군사적 요충지였던 갑곳을 통해 강화도로 들어왔다. 당시 갑곳은 김포와 강화를 오가던 배들이 있던 나루터였다.

 

병인양요 당시 참전한 병사들

프랑스 함대는 도착 후 함포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3일만에 강화행궁을 점렴했다. 당시 강화 행궁안에는 왕실 도서관 별관인 외규장각이 있었다. 

 

당시 프랑스 해군장교이자 화가였던 주베르가 그린 그림으로 외규장각 건물앞을 지나는 프랑스 군대 모습 

 

 

 

왜 강화도에 외규장각 건물을 세웠을까? 

 

정조 6년때 만든 외규장각 건물이다. 조선은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사고가 불타 없어지면서 여러 사고에 실록들을 나눠 보관했다. 서울에서 책을 보관하는 것보다는 의외의 장소인 강화도에 중요한 물품을 보관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강화도 외규장각에는 왕립 도서관의 역할로 왕실의 주요 행사, 내용을 정리한 의궤 그 중에 왕이 보는 어람용 의궤들을 보관하였다. 

 

 

외규장각 내부 모습 

 

1857년에 작성된 '외규장각형지안' 은 외규장각 소장품 목록이 기록되어 있는 책으로 외규장각 물품의 명칭과 숫자 보관 위치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외규장각 내부 한가운데는 봉안장이 있었다. 안에는 금보, 옥책, 어필 등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었다. 

 

봉안장 안 금보, 옥책, 어필

  • 금보 -임금의 인장
  • 옥책- 왕과 왕비의 책봉 사실을 옥에 새겨 기록한 것
  • 어필- 왕의 친필

 

북쪽에는 큰 탁자가 두개 있었는데 이곳에 의궤를 보관하던 곳이다. 

 

이 안에는 총 5607권의 도서가 보관되어 있었다. 

당시 이곳을 점렴한 프랑스 군대는 물품들을 보고 수거한다. 

 

병인양요 당시 로즈 제독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약탈 물품은 359점에 달한다.

 

조선군과 프랑스군의 마지막 전투

 

조선군과 프랑스군의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곳이 정족산성이었다. 이때 프랑스 군이 물러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것은 양헌수 장군이었다. 

 

루베르의 그림 정족산성

양헌수 장군은 제주목사로 있다가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강화부를 관장하는 천총에 임명되었고 병인양요가 발발한 10월 11일부터 52일 간의 일을 기록한 병인일기를 남겼다. 병인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침입한 다음날인 10월 12일에 약탈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군이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을 도착했고 11월 9일  160명의 병사를 이끌고 프랑스 군대는 정족산성 공략에 나섰지만 매복해 있던 조선군의 공격에 6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조선군 사상자는 5명 뿐이였다. 프랑스 군이 패하면서 다음날 관가와 민가에 불을 지르고 갑곳 나루터를 통해 철수했다. 

 

불타고 있는 외규장각

당시 프랑스군의 방화로 귀중 도서 804종의 4730권이 소실되고 이중에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일본 수백 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화유수부에 있는 강화동종 (보물 제 11호)

이 강화 동종은 병인양요때 프랑스 군이 탈취해 가기위해서 갑곶나루까지 운반해가다가 조선군이 추격을 해보기 시작하자 너무 무거워서 포기하고 도주하면서 남겨놓은 동종이다. 

 

 

이렇게 약탈된 문화재에 대한 큰 관심없이 지내다가 박병선 박사에 의해 약탈되어 갔던 외규장각 의궤가 프랑스 도서관에 있다는 것을 알고 반환 운동이 일어났다.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고속철도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약탈도서 하나를 들고와서 협상에 임했고 의궤 중 하나인 휘경원원소도감의궤(상)을 돌려주었다.  외규장각 의궤 이전에 이제까지 약탈 도중에 돌아온 것은 이 1권이 유일하다. G20 정상회담(2010년 11월 12일) 에서 프랑스가 외규장각 반환을 약속했고 145년 만에 2011년 4월 14일 드디어 반환되어 돌아왔다. 

 

[출처 역사스페셜]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