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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조선 총독부 폭파, 철거와 광화문 역사 이야기

by 365 ^^ 2021. 3. 15.


Q. 경복궁 파괴가 최고조였을 때는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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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조선물산 공진회를 개최할 때였다. 

경술국치 (국권을 빼앗긴 5년 뒤) 1915년에 일제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제는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에서 식민통치 성과의 전시장인 박람회를 개최한다. 이 박람회는 조선인들을 최대한 많이 오게 하기 위해 교통비 지원 및 단체 관광 등의 홍보를 이용해 1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아와 보게 했다. 그때 경복궁은 박람회를 기점으로 근정전 등의 일부 전각을 제외하고 90%가 훼손되었다.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

경복궁 훼손 진행 순서

원래 경복궁은 500동의 건물이 있었고 1910년 주권을 빼앗긴 후 건물을 거의 부숴버렸다. 경복궁 안 건물을 모두 뜯어서 선대 임금의 어진을 모시던 경복궁 안 선원전은 이토 히로부미 사찰 건물로 가져가고 옛 집현전과 세자 집무실은 일본 기생집으로 이용됐었다. 

 

1910년 이전 모습
1910년 300여 채 전각 헐림
1912년 흥례문 철거
1915년 박람회 개최를 위한 공터 마련을 구실로 경복궁 내 건물을 매각후 자선당, 비현각 철거
1918년 강년전, 교태전 해체
1927년 광화문 해체

 

조선 총독부의 역사 

이렇게 경복궁은 1910년부터 22년 동안 일본에게 철저히 훼손된 후 일반인에게 매각된 후 일제는 조선의 정기를 끊어버리기 위해 경복궁 안에 조선 총독부를 세워 일제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했다. 경복궁 광화문에서 근정전까지 조선 총독부가 세워져 있는데 조선 총독부는 정면으로 배알 하기 위한 남산 신궁이 정면에 위치했다. 

 

 

조선의 정궁 근정전의 중심축을 끊기 위해 3.5도 정도 기울어진 채로 건물을 지었으며 총독부 건물 안지하에는 15CM의 철문이로 되어 있는 고문실도 있었다. 

 

경복궁 안 조선 총독부 위치 (조선의 가장 핵심 건물을 가로막고 있는 조선 총독부)

해방 후 조선총독부는 일장기를 철거하고 태극기 대신 미국의 성조기를 올리며 미 군정 3년 동안 미군정청 '캐피탈 홀'로 사용되었다. 대한민국 수립 후에는 캐피털 홀의 이름을 한글로 번역해 중앙청으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3년 동안 태극기가 올려졌다 내려졌다를 반복했고 이후에도 이 건물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다가 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중앙 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조선 총독부


그 당시 일본이 한국을 통치 한 적은 있지만 그것이 식민지 지배는 아니었다는 무라야마 총리의 망언과 계속된 역사 왜곡이 조선 총독부 철거 결정에 불을 짚었다.

 

일본 총리들의 계속된 망언 

1993년 김영삼 문민 정부가 들어서면서 역사 바로 세우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철거를 결정하고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에 세워졌던 조선 총독부 건물을 없애면서 50년 만에 일제의 잔재를 지웠다.

조선 총독부 중앙 돔 첨탑 해제 작업
허물어진 조선 총독부

 

철거 후 재활용이 가능한 자재는 중앙 첨탑 등은 독립기념관에 이전 보관하고 나머지는 산업폐기물 관리법에 의거해서 폐기 처리되었다.  철거 전에 철거 대신 이전을 제안하며 일본이 비용을 지원해 준다는 제안도 했으나 그냥 철거해 버리기로 우리 정부는 결정을 했다. 

 

 

 

광화문의 역사

궁궐을 들어갈 때는 3개의 문(광화문-흥례문-근정문)을 지나서 중심 건물 근정전까지 들어가게 되는데 그 첫 번째 문이 광화문이고 경복궁의 정문이다. 1927년 일제 강점기 때 조선 총독부 건물을 가린다며 일제가 광화문을 경복궁 동문 옆으로 이전한다

 

(왼쪽) 광화문이 총독부 건물 가린 모습 (오른쪽) 광화문 이전 위치 

일제는 총독부를 가리는 광화문을 아예 철거를 하려고 했지만 일본의 민예 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광화문 철거를 반대하는 <사라져가는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을 발표했고 조선인과 일부 일본인 등의 반발로 일제의 철거 계획은 무산됐고 광화문은 경복궁 동문(건춘문) 위로 옮겨진다. 

 
그러나 광복 후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광화문의 목조 건축은 모두 소실되고 석축만 덩그러니 남아 있게 된다.

 

석축만 남아있는 광화문 모습 


석축만 남아있던 광화문을 1968년 박정희 대통령 때 복원했지만 목조건물이 아닌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다. 

 

박정희 때 콘트리트로 세운 광화문 모습


그 당시 외교 사절들이 왔을 때 식민지의 상징인 일본 건축물 조선 총독부 건물을 보고 감탄하며 칭찬을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우리 국민들의 비통한 심정이었지만 우리나라의 사정이 일제 강점기와 전쟁으로 가난했기 때문에 건물을 허물 수도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광화문 뒤 조선 총독부 모습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리는 방법을 택했다. 원래 자리보다 14.5m 뒤쪽에 복원을 했으나 논란이 많아지면서 2006년 재건한 광화문을 다시 철거했다.

 

광화문 옮겨진 위치


2010년에 마침내 8월 15일 지금의 광화문을 재건하게 된다.

현재의 광화문 모습

경복궁은 1990년부터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2045년까지 200동을 더 복원해 원래 모습의 80% 이상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조선 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천안 독립기념관)

 

일제의 만행을 기억하자는 뜻을 담아 1998년에 조선 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을 천안 독립기념관에 조성했다.

조선 총독부를 철거하고 첨탑을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옮겨 공원을 조성하였다.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 공원: 첨탑으로 갈수록 움푹 파인 구조인데 죽음을 의미하는 무덤 모양으로 첨탑 돔을 가장 아래에 전시했다.
 (좌)전시 공원이 독립기념관 서쪽에 조성 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지는 해 방향이기 때문이다 기념관 동쪽(우)에는 통일 영원에 동산이 조성 되어 있다.
 일본 제국주의는 끝났다는 의미이다. 또한 늘 위로 올려다 보았던 첨탑을 이제는 우리가 내려다 본다 의미도 포함된다.

 

여기저기 흩어진 부자재의 의미 일본의 제국주의의 몰락을 의미

 


 [출처 EBS 지식채널 e, 나무 위키, 선녀들 리턴즈 1회 일부, 선X마 17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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