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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스카이잭 선데이 사건/ 검은 9월 사건 (52-2)

by 365 ^^ 2022.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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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 탄생과 확장 (52-1)

 

스카이잭 선데이 사건

 

1970년 이전까지는 팔레스타인 해방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국제 사회였는데 PLO 산하의  PFLP 가 저지른 테러로 인해 국제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 중에 하나가 9.11 테러가 있기 전까지 사상 최악의 항공기 납치 사건을 벌인다. 1970년 스카이잭 선데이 사건을 벌이게 된다. 때는 1970년 9월 6일 유럽 각지에서 뉴욕으로 향하던 비행기들은 PFLP 단체에 납치된다. 이들의 비행기 납치 목적은 PFLP 조직원 석방을 요구하며 PFLP가 납치한 비행기는 무려 4대였다.

 


4대의 비행기는 모두 뉴욕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항공 테러를 실행하던 중 PFLP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이스라엘 항공기 EL AL 219편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 비행기에 사복경찰이 있었고 이들의 테러범 제압으로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에 비상 착륙한 것이다.  테러범 1명 사살, 한명은 검거되었다. 그러나 팬암 93편은 폭파 , 남은 비행기 2대를 끌고 간 곳이 바로 요르단이었다.

 

 

PFLP는 자르카의 사막지대에 있는 자신들이 이름붙인 혁명공항에 비행기 2대를 납치, 강제 착륙시켰다. 그리고 3일 후 9월 9일 다시 PFLP는 승객 116명이 탑승한 영국 비행기를 노려 추가 납치한다.

 

 

영국을 지목한 이유는 9월 6일 사복경찰에 의해에 체포되어 납치 실패한 비행기 납치범 레일라 칼레드 석방을 위해 영국인 인질이 필요했던 PFLP였다. 요구 조건을 밝힌 후 미국과 스위스, 독일, 이스라엘, 영국 국적 외에 다른 인질들은 모두 석방시킨다.  인질 교환이 가능한 국적의 탑승객들만 납치한 것이다.

 

레일라 칼레드 최초의 여성비행기 납치범

 

먼저 협상에 나선 국가는 영국과 스위스였다.  그러나 미국은 테러와의 협상은 없다고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미국이 군사적 대응에 나서겠다고 엄포하고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영국과 스위스마저 시간을 끌자 이들을 압박하기 위해 PFLP가 선택한 방법은 비행기 3대를 폭파시켰다. 이 장면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가장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나라는 영국이었다. 다음날 영국은 아랍어로 그들이 요구했던 레일라 칼레드를 석방할 것이라고 발표한다.

 

당시 요르단 전체 인구의 60%가 팔레스타인 난민일 정도로 요르단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많은 국가였다. 요르단은 이스라엘 영토에 항상 관심이 많았고 팔레스타인은 자신의 민족이 많이 살고 있는 요르단에 자신의 나라를 만들고 싶었고 급기야 요르단 국왕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3번 암살까지 시도했다.

요르단 후세인 국왕


비행기 납치 5일 전에 국왕의 차량에 총격을 가했지만 암살은 실패했고 비행기까지 폭파하고 있는 PFLP 를 가만히 두고 보고 있는 요르단 국왕을 비난하기에 이른다. 이해 분노한 국왕은 PLO를 대상으로 1970년 9월 16일 요르단 후세인 국왕 계엄령을 선포한다. 

 


검은 9월 사건

검은 9월단 출현

PFLP가 속해 있는 PLO를 요르단에서 제거하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요르단과 PLO의 전쟁이 시작된다.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plo와 전면전이 벌어진다. 폭격으로 도심 전체가 무너지고 최소 4천명~1만 5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도심 한가운데서 벌어진 내전으로 무고한 시민들만 죽어갔던 것이다. 내전이 극심해지자 주변 아랍국가들의 개입이 이뤄지고 결국 전쟁은 끝났으나 이집트의 중재로 PLO본부를 레바논으로 옮기는 휴전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이렇게 plo가 암만에서 쫓겨나는 치욕적인 결과를 맞게 된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1년 후 1971년 11월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PLO 요르단 총리 와스피 앗탈을 암살한다. 그리고 범인들은 자신들은 "검은 9월단" 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피의 보복이 시작된다.   

 

 

PFLP-EO 창설
그리고 PLO 산하 PFLP도 레바논으로 본부를 이동 항공기 납치를 했던 PFLP는 더 이상 항공기 테러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지만 PFLP 소속 와디 하다드는 의견이 달랐다. 그래서 그는 PFLP를 나와 PFLP-EO 조직을 하나 창설한다.

 

이스라엘 로드 공항 테러 사건

그리고 1972년 5월 30일 이스라엘 로드 공항에서 입국 소속을 밟는 세 남자가 바이올린 케이스에서 AK자동소총을 꺼내 테러를 했고 이 사건으로 26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망자 대다수는 성지 순례차 이스라엘을 찾은 민간인이었다.  이 사건은 전에 없었던 PFLP의 무차별 살상극이었다. 


일본 적군파? 
이스라엘 국제 공항 테러범의 정체가 밝혀진 후 전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국적은 일본이었다. 사건 발생 직후 범인 1명은 사살,  범인 1명은 수류탄으로 자살, 그리고 현행범으로 체포된 사람이 바로 오카모토 고조 (당시 24세) 로 일본사람이었다. 

 

로드 공항 테러범 일본인 오카모토 고조



1969년에 결성된 좌파 테러단체 일본 적군파는 폭력 제일주의를 추구하는 단체로 이 단체의 여단장 시게노부는 팔레스타인의 제안을 받아들인것이다. 시게노부를 선봉으로 해외에 운동 거점과 동맹군을 만들려던 일본 적군파가 레바논에서 적군파 아랍위원회를 결성하고 각종 국제테러에 협력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1972년 5월 30일 이스라엘 로드 공항 테러 사건이 이들이 저지른 첫번째 테러였던 것이다. 그 배후에는 일본 적군파 지도자 시게노부 후사코가 있었다.

 

일본 적군파 여단장


테러범 오카모토 고조는 사건 이후 그는 1985년 이스라엘과 PFLP의 포로 교환 협정 (지브릴 협정)으로 석방된다.  13년 복역 석방 후 레바논에 도착한 오카모토가 팔레스타인의 영웅 대접을 받는 모습이다.

 




뮌헨 테러-엔테베 작전(공항테러 최초의 성공 작전)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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