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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뮌헨 테러-엔테베 작전(공항테러 최초의 성공 작전) 52-3

by 365 ^^ 2022.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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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테러는 어떻게 일어났나? 

 

뮌헨 올림픽
1972년 8월에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고 1936년 히틀러가 개최한 스포츠 대회 이후 36년 만에 올림픽을 개최한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즐겁고 행복한 스포츠 대회를 만들려고 심혈을 기울였고 전 세계 최초의 위성중계된 뮌헨 올림픽이었다.  이렇게 심혈을 기울인 올림픽 대회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뮌헨 올림픽

 

1972년 9월 5일 새벽 4시9분 대회 선수촌 개막 5일째 새벽 4시경 캐나다 워터 폴로 국가대표팀이 외출 후 선수촌에 돌아오는 길에 담장을 넘고 있는 뮌헨 대참사의 테러범들와 마주친다. 그러나 서로 담을 넘고 있는 모습에 선수로 착각하고 캐나다 선수들은 그들이 담을 넘는것을 도와주기까지한다.

 

 

테러범 잠입 성공
손쉽게 선수촌을 잠입한 이들은 곧바로 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후 코놀리 슈트라세 31번 건물 , 이스라엘 선수단의 숙소로 향했다. 이스라엘 코치, 심판, 사격 펜싱 선수 역도 레슬링 선수 팀닥터 선수단 단장이 지내던 곳이다.  이들이 제일먼저 찾아간 곳은 이스라엘 코치와 심판의 숙소였다.

 

 

문이 잘 열리지 않아 딸깍거리는 소리에 레슬링 심판이 깨고 레슬링 심판은 문을 열고 들어오려는 테러범과 대치를 하게 되고 역도 코치가 그 소리에 놀라 깬 후 창문을 깨고 가까운 숙소로 도움을 요청하러 달려갔다. 그 숙소가 바로 대한민국 대표팀 숙소였다. 그가 만난 선수단은 배구팀 최이식 감독과 전호관 코치였다.  

 

 

테러단의 요구조건

레슬링 심판과 이스라엘 선수단은 인질이 되었다.  저항하던 인질 모셰 바인베르그를 총으로 사살한 뒤 문앞에 경고용으로 내던졌고 이어서 저항하던 한명도 함께 사망한다. 11명 중 2명이 사망 9명이 인질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에 잡혀있는 팔레스타인 죄수 234명을 석방하지 않으면 2명의 인질을 추가 살해하겠다는 내용의 종이를 경찰에게 건낸다. 이들은 검은 9월단이었다.

 

 

위성 중계된 테러 진압 작전
1972년 9월 5일 아침 8:00 외부에 이 사건이 알려지게 된다. 뮌헨은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최초로 위성 중계를 했던 것인데 TV를 통해 뮌헨 테러 소식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올림픽을 취재하기 위해 전세계 4000여명의 기자들이 와있던 상태였다.  그리고 사건 발행 후 반나절이 지나서 올림픽 중단 선언을 한다. 

이 사건이 독일인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은 선수촌 근처에는 2차 세계대전에 최초로 만들어진 다하우 수용소가 있었고 전쟁 이후 독일의 좋은 이미지를 보여 주려 했던 행사에서 또 다시 유태인이 살해당하는 상황을 보여줬던 것이다.

 

다하우 강제수용소


그리고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르는 9시간 만에 테러범과 협상은 없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이 협상을 받아들이면 테러가 계속 반복될 것이라고 판단한 이스라엘의 강력한 결정이었다.  입장이 난처해진 독일 정부는 원하는 만큼 협상금과 자유로운 출국을 보장할테니 인질을 석방하라고 요구 심지어 독일 사람으로 인질을 교환하자고 까지 제안한다. 

 

이스라엘 총리 골다메이르 중동의 철의 여인이라 불림

 

그러나 당연히 테러범은 요구를 거절했고 이에 독일은 사건 발생 약 13시간 후 오후 5시 무력 진압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경찰의 진압 작전이 TV로 생중계되고 있던 상황으로 이 작전은 결국 테러범에게 노출되어 작전 중단이 된다. 

 

 

테러범의 새로운 제안
그리고 테러범은 새로운 제안을 알린다. 인질들을 이집트 카이로에서 교환하자는 제안이었다. 독일 정부가 이스라엘의 협정은 없다는 내용을 전달하지 않아 테러범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독일 정부는 다시 한번 협상 의지를 이스라엘에 물어봤으나 대답은 같았다. 이에 독일은 공항에서 테러범을 제거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인질들은 어떻게 되었나?
독일측은 테러범을 5명으로 알고 있었고 저격수도 5명만 배치한 상태였으나 테러범은 8명이었다. 5명은 사살되었으나 아직 3명이 더 남아있었다.  저격수들이 놓친 3명의 테러범들은 최악의 선택을 한다. 바로 겁에 질린 9명의 인질을 향해 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져 모두 죽인 것이다. 이렇게 뮌헨 테러는 숙소2명 공항 9명 11명의 인질이 전원 사망하면서 끝이났다.

 

인질 전원 사망

 

살아남은 테러범 3명은 체포된다. 뮌헨 테러가 발생한지 20시간만에 상황이 종료되었다. 선수단 사망 당일 추모식이 진행되었고 총 17명이 사망한 최악의 참사 후 경기는 다시 진행되었다.

 

뮌헨 테러 이후 올림픽 제개.

 

뮌헨 테러범은 어떻게 되었나? 

뮌헨 테러를 저지른 3명의 테러범은 사건 두달 만에 석방되어 자신들의 근거지로 떠났다.  이유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테러범 조직은 또 다른 테러를 저질렀던 것이다. 시리아발 독일행 비행기 보잉727기를 납치  베이루트 국제공항에서 경유 중 검은 9월단에 납치된 여객기의 승객과 뮌헨 테러범 3명의 교환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렇게 맞교환되었던 것이다.

 

3명의 테러범

 

국가별 대테러 조직 창설
이 사건 이후 각 국가들은 대테러 조직을 창설하기 시작한다. 1972년 독일 연방경찰 제 9 국경 경비대 GSG9이 창설한 후 1977년 발생한 비행기 테러에서 테러범들을 모두 제압 승객 전원을 무사히 구출했고 1974년 프랑스 국립 헌병대 경찰 전술 부대 GIGN이 창설, 1974~2014년까지 약 1600회 이상의 작전을 수행하며 625명 이상의 인질을 구출했다.  1983년 미국 FBI 의 정예 전술 부대 HRT를 창설했다.

 

국가별 대테러조직 창설



이스라엘 신의 분노 작전
뮌헨 테러 이후 이스라엘 총리는 검은 9월단 테러범을 남김없이 찾아내서 처단하겠다는 계획을 유가족에게 알린다.  그리고 뮌헨 테러와 관련있던 테러범을 곳곳에서 사살한다. 신의 분노 작전 목적은 이스라엘에 위협을 주는 테러리스트들을 미리제거하겠다는 것이다. 

 

뮌헨 올림픽 테러 관려자 모두 사살

 

신의 분노 작전 중단

검은 9월단의 작전 책임자였던 알리 하산 살라메로 지목되어 이스라엘의 타깃이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살라메로 생각해 죽인 사람이 테러와 아무 관계없는 일반인이였던 것이다. 모로코의 평범한 이민자 출신으로 임신한 아내가 있는 사람으로 웨이터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를 임신한 아내가 보는 앞에서 죽인것이다.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며 신의 분노 작전은 비난을 받게 되고 이렇게 신의 분노작전은 잠정 중단된다.

 

민간인 사망

 

엔테베 작전 

엔테베 공항 비행기 납치
1976년 테러의 주도권을 바꾼 사건이 발생한다. 이스라엘발 프랑스행 비행기가 경유지 그리스 아테네에서 승객을 탑승시키는 과정에서 테러범이 승객으로 탑승을 한 것이다. 이렇게 비행기가 납치되고 테러범의 정체는 과격파 PFLP 작전단(EO)소속이었다. 이렇게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위해 만든 새로운 테러 조직들이 계속 생겨났으나 비행기 납치 수법은 기족 PFLP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이 향한 곳은 아프리카 우간다 엔테베였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 이디 아민의 영역이었다.

 

우간다 독재 대통령 이디 아민



1972년까지 이스라엘과 우간다는 우호적인 관계였다 그러나 1972년 이디 아민은 이스라엘에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요구했으나 이스라엘이 이를 거부해 우간다 정부는 반 이스라엘로 돌아선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으로 PFLP-EO를 받아준 우간다였다. 

 

 

테러범 요구 조건은?
당시 인질범들의 조건은 500만 달러였고 여러나라에 투옥 중인 53명의 테러범을 석방하는 것이었다.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질 살해를 예고 했다. 승무원 포함 260여명의 인질 중 1/3은 이스라엘 국민이었다. 그리고 인질들 중 이스라엘 국민들만 남겨 놓고 다른 인질들은 풀어준다. 

 

엔테베 작전 수행
이에 이스라엘은 엔테베 작전을 수행한다. 이 작전은 구출 작전의 신화이자 대테러 교과서라 불리는 작전으로 작전명은 썬더볼트였다.  작전을 수행하려고 했으나 이스라엘에서 우간다까지는 4000KM로 너무 멀었다.  또한 이집트, 수단은 적성국이었기 때문에 아랍국가의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 초저고도 비행을 실시한다. 어두운 밤 약 4000km를 초저고도 비행을 했고 이 수송기에 특수부대 요원 100여 명이 타고 있었다.

 



또한 우간다 공항에서 이스라엘인임을 숨기기 위해 이디아민 대통령의 방문객인척 위장을 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그러나 초소에서 우간다 군인 두명이 챠량을 제지하자 먼저 선제공격을 하게 되고 총격전이 벌어진 정신 없는 틈을 타 인질들이 있는 청사 안으로 진입한 특공대원들이었다. 

 

작전 성공

특공대는 이스라엘 국민들을 구출하게 되고 추격을 피하기 위해 공항에 있던 우간다군의 비행기를 전부 폭파시키고 탈출에 성공하면서 인질 91명 승무원 12명의 엔테베 작전은 성공하게 된다. 이것은 항공 테러에 대항하는 최초의 성공한 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비행기 납치 테러는 줄어들기 시작하고 PFLP의 세력도 줄어들었다.

 

1979년 1월 22일 뮌헨 테러의 주범 살라메는 모사드에 의해 사망한다. 살라메 사망과 함께 테러의 시대가 거의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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