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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

대한항공 폭파 사건 (김현희 KAL기 858 테러 속 무지개 공작)

by 365 ^^ 2021. 10. 24.

대한항공 KAL 858기 폭파 사건 

 

1987년 11월 29일 올림픽 개최 1년 전 KAL 858기는 115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우고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 아부다비를 거쳐 서울로 오던 중 오후2시 미얀마 안다마 해상에서 사라졌다. 그 다음날에 우리정부는 격추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태국의 밀림 지역을 수색하고 미얀마 정부는 실종 지역인 안다만 해역을 수색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16년만에 직전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어서 충격은 더욱 컸다.

 

KAL 폭파사건은 국내 언론은 물론 외신에서도 뜨거운 화제였다.
KAL기 안 승객 대부분은 중동 파견 건설 노동자들이었다. 

사건 이틀 후 12월 1일 용의자로 추정되는 일본인 부녀로 위장했던 북한 공작원 2명을 바레인 공항에서 체포 도중 2명은 청산가리 캡슐로 음독 자살 기도한다. 이 과정에서 남자는 죽고 여자는 중태에 빠진다. 

 

당시 김승일 자결당시 89세 고령이었다. 

 

사건 발생 10흘 후 비행기를 행방을 찾지 못한채 정부의 공식 수색은 종료되었다.

 

 

 

 

 

 

사건 처리 과정 

 

▶12월1일 폭파용의자 하치야 신이치(김승일) 음독자살

▶12월 15일 폭파용의자 하치야 마유미(김현희)를 김포공항으로 압송 KAL 858기는 아직도 실종상태였다.   

▶88년 1월 15일 사건 발생 한달 후 정부는 북한에 의해 폭파되었다고 발표. 

▶그리고 한달 만에 배상을 마무리 한데 이어 40일 만에 영결식을 치른 후 희생자들은 일괄 사망처리되었다. 

▶90년 3월 27일 김현희는 사형이 확정

▶불과 16일 후 노태우 대통령은 김현희 사면 

 

 

테러가 있은 후 이틀만에 김현희를 어떻게 검거했나? 

 

첩보가 있었다. 쿠웨이트에 파견된 안기부 직원이 북한 주민으로 추정되는 일본어를 능숙하게 하는 2명이 아부다비, 바그다드 등 도시를 돌아다닌다는 정보였고 KAL기 폭파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이 수상한 사람들의 동선과 테러가 동선이 일치는 것을 확인하고  중간 경유지였던 아랍에미리트에 승객명단을 요청후 확인해보니 쿠웨이트의 첩보내용과 정확히 일치해서 두 사람을 용의자로 특정 할수 있었다.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인 것이 들통한 계기

처음엔 김현희가 계속 일본말을 하며 신분을 숨겼지만 김현희를 심문하던 조사관에게  가짜여권이 밝혀지자 김현희는 중국인 고아행세를 하고 있었는데  조사관이 옆에 있던 조사원에게 귀속말로  " 근데 제 자꾸 거짓말을 해"  라며 한국말로 말한것에 발끈하여  그말을 들은 김현희는 자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김현희는 누구인가?

북한에서 김현희는 수재 집합소라 불리는 평양 외국어학원을 수료후 남파 간첩으로 뽑히게 되었다.  

 

김현희의 입에 쓰고 있는 것은 마스크가 아니라 음독자살을 기도했던 그녀의 자살기도를 막기 위해 특수 재갈

 

그러나 바레인 현지 의사의 증언에는 김현희에게선 독극물이 조금도 검출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논란이 되었으나 김현희는 캡슐의 씹기 전에 저지를 당해 캡슐의 끝부분만 물어서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테러 당시 사용했던 무기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실제 쓰인 건 일본 파나소닉 제품으로 C4 컴포지션으로 고체 군용 폭약의 하나를 라디오에 넣었다.  c4폭약이 라디오에 250g이 들어갔고 폭발의 화력을 높이기 위해 액체폭탄(PLX)을 옆에 함께 두었다. 이 두개의 폭발물의 시너지로 비행기 하나를 통째로 폭파시켰다. 지금은 현재 국제선 기준 100ml이상 액체는 기내 반입이 금지되어 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폭탄을 숨겨 비행기에 남겨놓고 내렸다. 
액체폭탄이다. 

 

KAL 858기 테러 이유

88년 1월 15일 김현희 기사회견이 열린다. 기자회견을 통해 김정일의 친필 지령으로 한국의 88 올림픽 단독 개최를 저지하고 남한의 대선에 영향을 주기 위한 기획 폭파라고 안기부 발표한다. 

 

 

 

 

 

 

 

무지개 공작

KAL기 폭파 사건이 더욱 충격적인 이유는 김현희가 압송된 다음날은 13대 대통령 선거가 있던 날로 정부의 입장에서는 KAL기 사건은 북한에서 한 소행은 확실하고 이 사건이 선거 이용 소재로 구미가 당기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입국일을 하루 전으로 맞춰 충격 효과를 더욱 극대화했다.

 

김현희 압송 다음날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13대 대통령 선거가 중요했던 이유는 수 많은 희생과 투쟁  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군사정권을 몰아내고 마침내 얻어낸 결과였기 때문이다. 우리 힘으로 대통령을 뽑겠다고 했던 직선제 선거였으나 KAL기 폭파 사건이 또 다시 이전 군사정권의 핵심 멤버이자 군인 출신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렇게 대통령 선거 바로 전날 영화처럼 테러범을 서울로 송환, 다시 기회를 잡은 군사 정권이었다. 

 

당시 안기부 문건(무지개 공작 내용)

 

북한의 소행으로 KAL기 테러는 이미 자행되었고 정부 역시 합리적 근거를  판단하던 상황에서 안기부는 문민정부 탄생을 막기 위해 대한항공 폭파 이슈를 대선에 이용하기로 한 문건이다. 안보의식과 대북 경각심을 고취함으로써 대선 환경을 유리하게 조성하는 목적의 작전 문건 내용이다.   

 

무지개 공작의 목적 국민들의 반공,대북 경각심 고취시켜 선거에 유리하게 이용
대북 경각심 고취 방법으로 테러를 적절한 시기를 선택해 대대적으로 보도한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북한도 남한 대통령이 바뀌는 것을 원치 않았나? 

북한의 목적은 올림픽이었다. 당시 북한은 남한에 무리한 요구를 했었다. 올림픽 분산 개최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국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북한이 화가 났다고 한다. 북한이 올림픽 저지에 집착했던 이유는 88올림픽 전까지 올림픽은 냉전구도로 체재 기반으로 개최되었다. 미국이 개최하면 소련이 불참, 소련이 개최하면 미국이 불참하는 등...

 

그러나 88올림픽은 최초로 동.서 양대 진영이 모두 참여했던 최대 규모의 스포츠 행사였고 소련, 중국이 진영론에서 벗어나자는 움직임으로 인해 북한은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스포츠에서 시작된 것이 소련과 중국이 한국과 정치적 상호인정으로 들어가서 대한민국의 체제를 인정하고 교류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 이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다. 

 

 

 

 

 

 

 

김현희가 사면된 이유

 90년 3월 27일 김현희는 사형이 확정된다. 그러나 보름 뒤 노태우 대통령은 김현희에 대한 특별 사면을 강행한다. 실종자 가족들은 가족의 유해는 살점하나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의 이같은 대처에 분노했다. 사실 이때 김현희의 사면은 기정 사실화였다.

 

김현희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살아있는 증거로 쓰겠다는 이유였지만 그 이면에는 정부는 일단 선거에 이용한 후였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 노태우 정권의 새로운 성과를 위한 과제는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이었다. 사실 남한의 새 정권 교체마다 성과과제는 남북정상회담이었다. 이를 위한 북한과의 물밑 접촉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북한이 행한 모든 사건의 유일한 메뉴얼 정책은  "과거를 덮고 미래를 향해 나갑시다" 였고 일의 진행과 북방 정책을 위해서 새 정부는 KAL기 사건을 묻고 마무리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남한의 대통령이 바뀌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정권이 바뀌기 직전이 작전 시행 적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피해는 유가족과 국민뿐이었다.

 

 

 

KAL기 폭파 사건 직후 대북 조치 

 

KAL기 폭파 사건으로 미국은 북한을 테러국가로 규정하고 외교관 접촉 불허, 북한 사람, 미국입국 제한 등 3가지 대북한 제재 조치를 발표한다. 

 

 

북한이 KAL기 폭파 사건으로 테러국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북한에서는 테러를 인정하고 있지 않는 사건이다.

 

KAL기 폭파 음모론이 있는 이유

KAL기 폭파에 대한 음모론이 많아 모든 정권때 마다 진상조사를 다시 했었는데 수차례 조사에서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그럼에도 음모론이 계속 나오는 이유는 누가 봐도 그때의 초동 수사가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공교롭게도 인도양에서 1대의 항공기가 더 추락했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 항공기가 기내화재로 모리셔스 해상 수심 3000M로 추락 탑승자 160명이 사망한다. 사건후 이 비행기의 블랙박스는 바로 찾았다. 그러나 우리의 대한항공 비행기는 수심 50M가 안되는 곳에 추락했으나 비행기 추락사고의 가장 기본이 되는 블랙박스도 찾지 않고 사건 수사 기간이 20일에 불과했고 수사 진전 없이 20일 만에 종결되었다.

 

 

남한의 중요 행사때 마다 저지른 북한의 테러 행위

 

86 아시안게임 직전 아시안 게임을 저지하기 위해 김포공항 1층 내 쓰레기통에서 폭탄을 터트려 5명이 숨지고 30여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 이후 공항 쓰레기통이 비닐로 바뀌게 되었다. 

 

북한의 적화 통일은 결코 달라지지 않았고 실제로 2002년 월드컵 때도 제2 연평해전을 일으키며 도발을 이어오고 있다. 

 

[출처 이제 만나러갑니다 49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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