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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녀들

제 5공화국~ 6공화국 (전두환 / 노태우 정부 )

by 365 ^^ 2021.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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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나?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권력 장악 도구로 삼청교육대등을 만들었고 K-공작이라 불리는 여러 공작을 통해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책임을 최규하 전 대통령에게 전가하며 결국 최규하도 대통령을 사임하게 된다. 그리고 대통령을 향한 마지막 관문으로 간선제를 실시하게 된다.  

 

 

최규하 전 대통령 하야 성명 (1980년 08.16)

 

제 5공화국 시작

 

장충체육관에서 실시한 11대 대통령 간접선거가 실시되고 총 투표자 2525명 가운데 2524표 득표 1표 무효표의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된 전두환이었다. 삼청교육대의 인권유린이 자행되는 가운데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그 후에 자신이 원하는 형태(연임 제한 없는 6년-> 8차 개헌 7년 단임제로 변경)로 헌법을 개정하고 다시 한번 간선제를 실시 결국 12대 대통령으로 다시 선출되며 제 5공화국의 시대가 열린다.  

 

장충체육관에서 실시한 대통령 간접 선거

 

 

 

신군부의 권력유지 통치방법

 

전두환은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되고 이들은 또 다른 계획은 세운다. 제 5공화국의 통치 방법은 억압 정책과 유화 정책을 적절히 활용했다. 그중에 가장 유명했던 것은  

 

억압정책

 

언론 기본법 (언론통폐합)

언론 기본적으로 신문 방송 등 언론을 통제했다. 1980년 12월 모든 뉴스를 통제.검열하기 위해 언론통폐합 조치로 인해 tbc 방송국(동양방송)이 사라지고 kbs와 합병된다. 마지막 방송날 자정을 기점으로 모든 시보는 KBS로 변경되었다. 언론통폐합은 언론탄압효과도 있지만 살아남은 언론의 경우 정부의 엄청난 특혜가 있었고 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방송이 진행되었다.

 

삼청교육대

 

삼청교육대 실체를 알아보다.

삼청교육대 만든 배경 박정희 대통령 서거하고 계속되는 권력다툼 끝에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된다.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군사 반란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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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책  

 

통금해지, 두발, 교복 자율화 

군사정권의 국민 통제 수단으로 37년간 계속되었던 야간통행금지 제도를 1982년 1월 폐지한다.  이후에 두발, 교복 자율화도 시행하면서 강압적인 통제와 회유를 동시에 사용했다.  

 

 

3S 정책 실시

성, 스크린, 스포츠를 앞세워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정책으로 숙박, 유흥업이 활성화되었다. 통행금지 해제와 더불어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생겼다.

 

스크린의 경우 심야 영화 상영이 시작되었고 영화 상영 규제가 완화되어 극장을 찾는 시민들이 늘어났다. 또한 이때 할리우드 영화가 직접배급되기 시작하며 당시 할리우드 영화가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시기이다. 1982년 개봉한 60여 편의 영화 중 성인 영화가 60% 이상이었다.  <애마부인><뽕><변강쇠> 시리즈 등 성인 영화가 정권 유지의 일등 공신이라 불리기도 했다.  

 

스포츠는 1982년 프로 야구 출범되고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된다. 당시 방송 황금 시간대는 프로 야구 중계를 했었다.  또한 씨름 중계도 활성화되었던 시기다.

 

프로 야구 출범을 알린 첫 시구자 당시 대통령 전두환&nbsp;

 

땡전뉴스란?

1980년 땡전 뉴스가 있었는데 전두환 정권 당시의 9시 뉴스는 8시 59분 58초, 59초 땡! 전두환 대통령은 ~  9 땡하면 전두환 정권 소식으로 시작된 뉴스라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렇게 수년간 계속되었던 땡전뉴스였다.

 

 

한국 문화에서는 선하다=열심히 산다는 비슷하게 느껴지는 두 문장으로 한국 동화 속에는 근면성실한 악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미와 베짱이><토끼와 거북이>등 선한 이미지를 심으려 전두환은 뉴스를 활용했던 의도가 있다. 열심히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은 아닐수도 있다. 국민들에게 왜곡된 이미지를 심어 준 땡전뉴스이다. 

 

 

올림픽 개최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박정희 전 대통령 때부터 계획되었지만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여러가지 문제로 중단되는 듯 하다가 1980년도에 올림픽 유치 신청을 한 후 1981년 독일바덴바덴에서 나고야를 이기로 서울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다. 서울 올림픽이라는 세계적인 행사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국제적인 이목이 집중되었고 이런 상황 속에서 6월 민주화 항쟁을 탄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서울 올림픽 이미지 때문에 그나마 억압 통제 무력 진압에 최선을 다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올림픽 전 전두환은 판자촌, 부랑자를 청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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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의 성장

신군부하면 빠질 수 없는 인물 전두환의 절친 노태우가 있다. 신군부 세력의 중심인  두 사람의 인연은 1955년 육군 사관학교 11기 동기생으로 육사 시절부터 의리와 우정을 다져 온 사이이다. 당시 전두환의 결혼식 축사를 한 노태우와 노태우의 결혼식에는 사회를 본 전두환이었다.

 

또한 1959년 미국 특전사 과정을 위한 동반 유학까지 함께 했던 정말 돈독한 관계의 우정이 쌓이고 있던 와중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며 당시 군부 세력의 최고 권력자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에 띈 전두환과 노태우는 권력의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된다.

 

 

전두환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친구 노태우를 잘 챙겼다. 1981년 노태우를 초대 정무 2장관의 임명(당시 최고 실세들에게 주어진 이 자리)1981년 바로 연이어 대통령 외교안보 담당 특보까지 역임하며 세계 각지로 순방 일정까지 했고 1982년 내무부장관에 임명, 초대 체육부장관, 1984년 대한체육회 회장 및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의 총재직까지 역임하며 그렇게 이력을 쌓으며 차기 대권주자로 성장한 노태우였다.

 

 

노태우 대통령 후보되다.

전두환은 대통령 임기가 끝나가자 고민에 빠진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노신영과 안기부 부장 출신의 장세동을 눈여겨 보았으나 결국 당시 민정당 대표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다. 노태우는 대통령 후보가 될 가능성이 있단 것을 알고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김종필 전 총리(군사 정권 시절 내내 2인자였던 인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제 6 공화국 시작

 

대통령 간선제->직선제 

그러나 전두환 정권 말기에 민주화 운동 열기가 고조되고 1987년 초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의문사가 폭로되고 6월 민주항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전두환 정권은 결국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6.29민주화 선언을 발표하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게 되고 민주화와 언론 자유 보장등의 내용을 발표하며 전두환 정권은 막을 내리는 듯 보였고 이후 합의된 사항에 따라 민주화 조치들이 일어나게 된다.

 

2021년 10월 26일 89세로 사망(평소 지병 전립선암으로 투병중이었다) 10월 26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된 날이기도 하다.

 

노태우 대통령 당선

개헌 후 직선제가 실시되지만 당시 야당 대선 후보였던 김영삼, 김대중 후보 단일화가 실패하며 결국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신군부 세력의 핵심으로 군사 정권의 한 축이었던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 운동 결과인 직선제 대통령이 된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문제 꺼리는 그를 키워준 전두환 정권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는 것이 숙제였다. 8년의 집권 끝에 퇴임한 전두환이지만 퇴임 이후에도 전두환은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했었다. 

 

▼노태우는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나? (무지개 공작내용) 

김현희 KAL기 858 테러 속 무지개 공작

 

대한항공 폭파 사건 (김현희 KAL기 858 테러 속 무지개 공작)

대한항공 KAL 858기 폭파 사건 1987년 11월 29일 올림픽 개최 1년 전 KAL 858기는 115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우고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 아부다비를 거쳐 서울로 오던 중 오후2시 미얀마 안다마 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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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계속된 권력 의지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3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전직 대통령과 직계가족에 대한 예우 경호를 완벽히 할 것, 사후에도 군사면책특권을 요구 및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 후 군 요직에 본인의 친위 세력을 임명한 전두환이었다. 하지만 취임 후 노태우는 본인을 측근으로 물갈이 한다. 또한 퇴임 이후를 대비해 ‘국가 원로 자문회의라는 기관을 설치해 퇴임 후에도 정치 영향력을 행세하려 한 전두환은 이렇게 권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노태우와 전두환의 갈등

그러나 믿었던 친구 노태우는 취임 후 점차 독자 노선을 걷게 된다. 차츰 둘 사이에 갈등이 증폭되다가 폭발한 사건이 일어난다. 명목상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 축하하기 위한 자리로 육사 11기 부부동반 모임을 가진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당시 노태우 부인인 김옥순 여사의 한 마디가 파장을 일으킨다.

 

우리는 국민투표로 뽑힌 거지 체육관 대통령하고는 달라요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는 당시를 회고하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불쾌함을 표현했다고 한다.

 

   

여.소 야.대 정권 형성

이러한 권력쟁탈의 행동은 국민들의 열망이 만든 민주화를 우습게 본 것이다. 결국 노태우 취임 후 치뤄진 첫 선거에서 야당이 여당에게 압승을 거두면서 여.소 야.대 정권이 형성되면서 국회법을 개정하고 국정 감사 TV중계, 청문회 제도 도입 등을 회복시켰다. 그리고 제 5공화국 시절의 비리를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다.  

 

 

5공 청문회 개최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약 25분 동안의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후 바로 설악산 백담사로 향했다.  

 

 

전두환이 백담사로 도피한 지 1년 후 5공 비리와 5.18 진상을 조사하기 위한 청문회가 열린다.  1989년 12월 31일 백담사를 떠나 청문회를 향한 전두환은 5공 청문회의 증인으로 출석하게 된다. 그리고 전두환은 준비된 담화를 발표할 듯 일방적인 발언을 이어나갔고 답답한 진행이 계속되었다.

 

 

이 청문회 시청률은 무려 56%를 달성하며 올림픽 시청률을 능가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청문회 시청으로 인해 차량 소통이 원활해질 만큼 전 국민의 관심사였던 5공 청문회였는데 제대로 된 결말을 맺지 못하고 흐지부지 마무리되며 이를 지켜봤던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5공 청문회 시청률

 

청문회 시작부터 진정성이라곤 찾아볼수 없었던 신군부 세력은 “ 기억이 안 납니다” ,  “ 잘못 한것 같습니다.”, “그땐 몰랐습니다” 등 모르쇠로 일관되었다. 이에 국회 의원들 앞에서 전두환이 제대로 된 증언을 하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전두환은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을 하고 만다. 당시 5공 관련자들은 무력 진압을 한적이 없다고 당당히 발언한 것이다. 

 

전두환은 2021년 11월 23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18 에 대한 사과없이 ...추징금 2200억원 중 1000억원 상당금액 미납한체로 ..

 

이렇게 5공 청문회 증인으로 참석한 전두환은 분노를 일으키는 발언을 했고 결국 아수라장이 된 5공 청문회는 2시간도 채 되지 않은 전두환의 일방적인 발언 끝에 역사적인 5공 청문회는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김영삼 정부 출범

노태우 정권에서 열린 5공 청문회는 애매하고 과도기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상황이 바뀌에 된다.   

 

김영삼 정권은 정통성 확립을 강조했다.  5공 비리가 폭로되기 전 5공화국이 정치 비자금을 어마어마하게 조성을 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약 20조 원의 가치로 전두환이 이 비자금을 은닉하고 절반은 노태우 정권에게 줬을 것이다라는 소문이었다.  

 

5공화국 비자금 조성 폭로

그러던 도중 1995년 김영삼 정부의 핵심 실세 중 한 명인 서석재 전 총무처 장관이 자신도 모르게 전직 대통령 4000 억 비자금 조성을 폭로하게 되고 뒤를 이어 야당 국회의원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비자금이 예치된 계좌를 폭로하며 정치 비자금 조성이 사실로 밝혀지게 된다.

 

이날 노태우 대통령은 5천억원의 통치자금이 조성되었다고 발표

 

전두환과 노태우의 대한 구속 수사

1995년 10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고 막대한 비자금 보유 사실을 실토하게 된다. 이것은 이전 정권에서 발생한 부정할 수 없는 과오로 당시는 김영삼 정부에서 추진했던 과거 청산 운동인 역사바로 세우기가 한창일 때였다. 이에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 탄압 주범으로 지목하며 전두환과 노태우의 대한 구속 수사를 지시한다. 그리고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하나회(군대내 사조직) 숙청이 진행되었다.  

 

 

내란 및 군사반란 혐의로 기소 및 판결

1995년 12월 2일 검찰 소환이 확정되자 이어진 전두환의 골목성명의 '검찰 수사에 불응한다'는 뜻을 전하고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떠난 전두환을 검찰에서는 도주로 간주해 체포한다. 

 

 

1995년 12월 3일 새벽 군형법상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고향인 경남 합천에서 체포된 전두환이었다. 검찰 호송차를 타고 압송되어 곧바로 안양 교도소로 직행했고 결국 5공, 6공의 권력자들이 줄줄이 소환되었다. 이후 전두환, 노태우 및 16명의 전직 장성들을 부패. 내란 및 군사반란 혐의로 기소되어 이후 2년에 걸쳐 재판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의 은닉 비자금: 전두환 추징금 2205억 , 노태우 2628억으로 노태우는 이 금액을 완납했으나 전두환은 922억을 미납했다.

 

  • 1심 재판에서는 전두환은 사형 선고, 노태우는 징역 22년 6개월 선고 
  • 2심 재판에서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징역 17년으로 감형 
  • 그 이후에 1997년 특별 사면 조치되면서 2년 만에 석방된 전두환, 노태우이다.  

 

2021년 10월 노태우가 사망한다. 이것 때문인지 노태우는 국가 장례를 치뤄줬으나 한달 뒤 11월 전두환 사망시에 그렇지 못했다.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명확히 규정됨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1997년 4월 대법원 재판 판결문에서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정확한 규정을 해놓게 된다. 12.12 군사반란은 기존에 존재하는 헌법기관을 무너뜨린 반란 행위이고 5.18 민주화운동은 총칼로 대응한 계엄군의 진압 행위를 모두 진압을 위한 내란 목적의 살인으로 인정함으로써 신군부의 도덕성을 일절 용납하지 않았다. 두 사건을 군사반란 행위로 판단이 내려지면서 신군부의 진압을 내란 목적의 살인으로 인정한 대법원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역사의 심판을 받았지만 아직도 역사의 진실 찾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대통령이라는 단어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대통령만 쓰는 단어지만 외국에서는 여러 단체에서 나눠쓰는 언어로 그만큼 우리나라에 비해 권위가 분산되어 있고 민주적이라는 언어학적 분석이 있다.  

 

[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 19회]

 

제1공화국~5공화국 흐름 간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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