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폭동
LA에 있는 한 주류 판매점 가게주인은 보통 때 같으면 붐빌시간인데 이날따라 사람이 없다. 창밖을 내다보니 거리에는 차도 한대 없었다. 이때 가게 안으로 이웃 주민이 뛰어들어 오면서 왜 빨리 가게 문을 안닫고 여태까지 있느냐고 한다. TV를 켜니 뉴스 속보에 가게 근처에서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뉴스에서는 당장 피신하라는 속보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류 판매점 주인 조성환씨는 차를 몰고 황급히 가려는 순간 어딘가에서 흑인들이 몰려나와 차를 막아섰다. 큰 도로에는 폭도들이 에워싸고 있었으나 다행히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조성환씨는 가게가 걱정이 되어 잠을 잘수 없었고 날이 밝자마자 가게로 가봤으나 예상대로 절반은 부서지고 절반은 불에 타있었다. 폭도들이 화염병을 던져 가게가 다 불타있었다.
LA 코리아 타운에 있는 한인가게들은 거의 모두 불타거나 망가져 버렸다. 당시 LA에 사는 한인교민이 43만명 정도 되었고 한국인 가게만 만이천개가 넘었다. LA 코리아 타운은 한인이 많이 살아 서울특별시 나성구라고 부를 정도로 한인가게가 많았고 많은 만큼 피해도 컸다.
그날 밤 LA 도심 전체는 폭행, 총격, 방화등으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수천명의 흑인들이 시내의 건물로 침입하고 길가의 차량을 파손하는 등 무법천지였다.
LA 전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고속도로는 폐쇄되었다. 야간통행금지, 학교도 폐쇄된 이 사건이 바로 'LA 폭동'이다.
LA 폭동 원인, 일어난 이유
25세 흑인 로드니 킹은 음주운전을 했고 혈중 알콜 농도가 0.19정도로 면허취소 수준의 완전 만취상태였다. 그는 차를 몰고 질주했고 경찰이 결국 그를 체포하게 된다. 그러나 로드니 킹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경찰관 4명이서 쓰러진 로드니 킹을 향해 몽둥이질을 했다.
그는 저항의 의사가 없었고 움직임이 없는 상태에서도 계속 폭행을 가한 것이다. 81초 동안 56번의 몽둥지질을 했고 로드니킹은 얼굴만 20바늘을 넘게 꿰매고 온몸에 11골이 골절이 되었고 뇌손상, 청각장애까지 생겼다.
이 영상이 폭로 되면서 명백한 과잉진압으로 시민들이 분노했다. 경찰 3명은 백인이었고 1명은 히스패닉이었다. 이로 인해 미국 전역이 들섞이기 시작했다.
경찰들은 로드니 킹이 심하게 반항을 해서 어쩔수 없이 이렇게 되었다고 변명했고 이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니 결정적인 증거가 포착이 되었다. 로드니킹을 병원에 데려간 뒤에 이들은 자기들 끼리 낄낄거리면서 폭행 상황을 야구 경기에 비유했던 것이다.
로드니 킹 경찰 재판
이에 흑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경찰에 대한 재판이 일어났다. 그러나 갑자기 관할법원이 바뀌게 되고 재판을 시미 벨리라는 곳에서 하게 된 것이다.
왜 재판이 시미 벨리였나?
시미 벨리는 LA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미국의 재판제도는 배심원 제도로 배심원들이 유,무죄를 정하면 판사는 형량만 정하게 되어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배심원이 재판에서 중요했고 배심원 선정기준은 재판이 열리는 지역의 인종 비율을 반영해야 했다.
LA는 흑인 비율이 많은 곳이었고, 시미밸리는 흑인 비율이 2% 밖에 되지 않는 곳이었다. 대표적인 백인 거주지역이었고 실제로 배심원으로 뽑인 사람이 백인 10명 아시아계1 명 히스패닉 1명이었다.
이는 로드니 킹 재판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되었고 재판은 1년을 지속하게 된다. 그리고 LA폭동이 일어난 날이 최종 판결이 나오는 날이였다. 판결을 보러 흑인들이 법원에 몰려들었고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4명 중 3명은 무죄, 한명은 재심사 결정이 내려졌다. 사실상 전원 무죄였다.
재판 결과에 분노 ->폭동
이에 흑인들은 바로 시위에 돌입했다. 법원은 물론이고 시청 언론사에 돌을 던지며 격렬하게 분노했다. 흑인에 이어 히스패닉까지 가세하면서 도시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었고 폭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날 폭도들에게 집중 공격을 받은 것은 한국 교민가게들이었다. 폭동의 원인은 흑인과 백인의 갈등이었으나 타깃은 코리안이었다.
그렇다면 왜 한인이 타깃?
그 당시 흑인들은 한국인에 대한 굉장한 적대감을 갖고 있었는데 이때 흑인 래퍼 아이스 큐브가 부른 노래 '블랙 코리아' 가 있다. 노래의 내용은 흑인들을 도둑으로 의심해서 화가 난다는 내용이었다. 이 노래의 배경에서는 두순자사건이 있다.
이 노래가 담긴 앨범이 100만이상이 팔리면서 한인가게 불매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그만큼 한인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었다.
Every time I wanna go get a fuckin brew
매번 내가 맥주를 사러 갈 때마다
I gotta go down to the store with the two oriental one-penny countin' motherfuckers
동전 하나하나 꼼꼼히 세는 동양인 자식들이 운영하는 가게로 가야 해
That make a nigga mad enough to cause a little ruckus
흑인 하나가 작은 난동을 피우고 싶게 만들만큼 화나게 하기에 충분하지
Thinkin' every brother in the world's out to take
마치 세상의 흑인들이 모두 도둑질하려고 나온다고 생각하며
So they watch every damn move that I make
내 빌어먹을 움직임을 하나하나 지켜봐
They hope I don't pull out a gun and try to rob
언제나 권총을 꺼내 그들의 귀여운 가게를
they funky little store, but bitch, I got a job
털지 않길 바라지, 근데 ...난 직업이 있어
->두순자 사건 알아보기
또한 한인들은 근면 성실의 아이콘으로 그들의 꿈은 가게를 차리는 것이었고 10년 정도 일해서 돈을 모으면 백인 거주지역은 임대료가 높아 흑인지역에 가게를 차리게 되니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하는 느낌도 들고 이런 현상이 흑인들에게 반갑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질투심과 상대적 박탈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 이유는 따로 있었다.
LA 폭동에서 한인 피해가 컷던 이유
그것은 경찰 때문이었다. 폭도들이 불지르고 총격을 벌이는 데도 LA 경찰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 코리아 타운에 경찰자체가 없었다. 코리아 타운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다.
한인 자경단 결성
이때 LA 한인 라디오 방송을 통해 폭도 출몰 및 화재 현장 위치를 실시간으로 생중계했다. 방송에서는 한인들은 빨리 대피하라고 방송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송 이후 누군가 찾아왔다. 20년 동안 일궈놓은 가게가 불타고 있으니 이대로 있을 수 없다고 총을 들고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민들은 손에 하나 둘 총을 들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국 남자들은 대부분 33개월 군 복무를 마친 대한민국 예비역 출신이었고 심지어 전투 경험이 있는 월남전 참전용사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터전을 지키겠다고 모여든 것이다.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자발적으로 모인 한인이 무려 300명이나되었고 이렇게 한인 자경단이 결성되었다.
루프 코리안
임시대책본부를 만들어 놓고 구조요청이 접수되면 조를 짜서 출동을 했고 살상은 금지하고 위협 사격만한다는 원칙도세워놨다. 자경단 소식에 교민들의 구조요청이 쇄도했다. 이런 자경단의 활약을 보고 미국인들도 깜짝놀라 한인 자경단을 향한 열띤 취재 경쟁이 이어졌고 미국 언론이 자경단에게 붙인 별명이 '루프 코리안' 이었다.
폭동 이틀째 되던 날 19살 대학생 이재성 군이 한인 가게에 출동했다가 총에 맞아서 사망한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것은 폭도의 총이 아니라 흑인으로 알고 우리 교민 오인 사격을 한 총에 맞아 사망한 것이었다.
LA 폭동 진압
그 사이에 폭동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결국 미국 대통령이 진압에 나섰다. 연방군, 해병대, 공수부대를 투입, FBI까지 동원된 병력만 2만여명으로 6일만에 폭동은 끝이 났다. 그 결과 사망자 58명 부상자는 2400여명이었다. 재산피해는 약 7억달러로 현재 가치 약 1조2천 700억원이었다. 전체 피해액의 절반 이상이 한국 교민들의 피해였다.
코리아 타운 방치 이유
맨 처음 폭동이 일어났던 곳 법원에는 폭동을 막기 위한 경찰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무전으로 폭동 현장을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전 병력은 폭동 현장을 철수한다. 신고를 해도 오지 않았고 이 경찰들은 있던 곳은 백인 거주지역인 부촌 베버리힐스와 할리우드를 지키러 갔던 것이다. 폭동이 일어난 곳은 수습하지 않고 부촌의 백인을 보호하고 대비했던 것이다.
원래 흑인 폭도들의 목적지는 거기였다. 백인 경찰관으로 인해 생긴 폭동이었기 때문에 백인 거주지역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코리아 타운을 거쳐가야했고 경찰은 백인을 지키기 위해 코리아타운은 방치했던 것이다.
교민들은 이에 항의했고 경찰의 답변은 인력이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폭동을 예상했던 경찰은 이틀 전에 이미 이같은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방치한 이유는 폭동을 일찍 진압하며 흑인들을 더욱 자극할까봐 방치해뒀고 그 지역이 바로 한인타운이었던 것이다. 결국 LA 폭동은 우리 교민을 희생시켜 폭동을 잠재운 것이었다.
용서와 화해
하루 아침에 자신의 삶을 터전과 평생을 일궈놓았던 기반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위기에 강한 민족이다. LA 는 물론이고 미국 전역에서 기부금이 모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성금을 보냈고 폭동이 일어난 거리에 다시 우리 교민이 모이기 시작한다. 손에는 총이 아닌 빗자루를 들고 행진을 시작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 흑인 히스패닉 백인까지 행렬에 합류했다. 그렇게 서로 사과하고 다시 시작하기로 했던 것이다.
LA폭동=->4.29 (사이구)
이런 큰 일을 겪고 나서 깨달은 것은 우리는 모두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이다. 이 사건을 LA폭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4.29 사이구라고 부른다. 이는 폭동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기 위해서였고 폭동이라고 부르는 순간 가해자와 피해자로 한인과 흑인을 나누는 인종간의 갈등으로 기억되길 원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분노를 분노로 갚았다면 더 나아지는것 없이 새로운 인종차별이나 더 끔직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사건을 대하는 우리 교민들의 성숙한 대처가 빛나던 순간으로 이것이 진정한 승리자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관련내용 (두순자 사건 포함)
흑인 아시아인(동양인) 폭행(=소수인종 대립 왜? ) 백인 매체의 여론몰이 내용 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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