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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꼬꼬무

주영형 사건 (꼬꼬무 14회)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

by 365 ^^ 2022.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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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형 사건

1980년 11월 13일 목요일밤 11시 당시 중학교 1학년 이우진 학생(14살)의 납치 유괴된 사건이 벌어진다. 키가 165CM의 올해가 지나면 중학교 2학년이 되는 학생으로 중학생 납치사건은 그 당시 처음이었다.

 

우진이는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했지만 밝고 적극적인 학생으로 학교 전교회장으로 모범생이었다. 

 

우진이는 오후 3시50분쯤 집을 나가서 수랑서점에 들렸다. 누나 참고서를 대신 사기 위해 서점에 들렸고 이후에 우진이는 우표수집이 취미라 마포우체국에 가려고 집을 나간 것이다. 그리고 4시 30분쯤에 학교 체육선생님을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시간에 우진이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님은 우진이가 나오지 않자 10분쯤 기다리다 대학원 수업이 있어서 그 자리를 떴다고 한다.

 

이 거리는 실제로 우진이가 납치된 거리로 대낮에 대로변에서 납치되기는 어려운 상황이므로 아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유괴발생 다음날 우진의 아버지는 경찰에 신고하게 되지만 납치범은 거래는 하지 않고 1년 동안 총 62차례의 협박전화와 6번의 편지를 보내며 가족들의 피를 말렸다. 3분이상 통화가 되어야 위치추적이 가능한 것을 알고 3분이내로 통화를 끝내면서 위치추적을 피했다.

 

이우진 학생이 유괴된지 3개월이 지나자 수사는 공개수사로 전환된다. 당시 대통령이 우진의 집에가서 격려를 할 정도로 나라전체가 이 유괴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단일 사건으로는 역대 최대로 수사 인원만 약 2만 3천여명이 투입되었으나 범인의 윤곽은 잡히지 않았다.

 

전두환대통령이 방문

유괴범과 피해자 사이에 사전 면식 관계가 형성되었다면 피해자를 돌려보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한다. 주변의 아는 사람들 먼저 수사 용의상에 놓고 수사를 했다. 그날 우진이를 본사람은 주영형 체육교사뿐이었다. 그러나 주교사는 알리바이가 확실했다. 대학원 출석부도 기재되 있었고 자신의 부인 진술도 일치해서 1차적으로 배제되었다.

 

주교사는 자신을 만나러 나왔다 사고를 당한 우진이에 대한 죄책감에 부모를 찾아가 위로하는 한편 수사본부에 직접 찾아가서 수사협조를 약속했고 당시 방송 인터뷰에도 응하며 적극성을 보여줬다.

 


그런데 주교사는 출석 체크만 하고 나갔다는 진술이 나오면서 알리바이에 공백이 생겼다. 주선생을 소환해 이날의 일을 물었더니 주교사는 뜻밖의 말을 한다. 경찰에게 이날 여자와 같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 여자를 만나보니 그 여자는 주교사의 제자였다.

 

주교사는 좋은 사람? 

이 이야기를 들은 학교는 반응이 떨떠름했다. 당시 교사는 부모님과 같은 존재로 교사의 권위가 상당히 높았던 때이다. 그러므로 교사를 조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교사는 서울대 명문대 출신으로 대학원 박사학위까지 받고  집안도 유복한 환경이었고 교사라는 존경받는 직업까지 있던 엘리트 교사였기에 주변사람들 조차도 '선생님의 표본인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긍정적인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28살 주영형 모습

주선생은 여제자와의 일을 완강히 부인했고 학교와 교육청은 주선생의 편을 들었다. 학교에서 내린 조치는 속전속결로 결론이 났다. 젊은 미남 교사를 연모한 사춘기 여중생들의 장난으로 결정나면서 주교사는 다른 학교로 전근을 시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주영형의 실체

그러나 경찰은 이를 수사하기 시작한다. 교사가 제자를 데리고 여관을 다니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주선생과 관련있던 학생은 한두 명이 아니였다. 그 중에 주선생이 담임을 맡은 교실의 중2 여자 학생들이 있었고 유부남이었던 주영형이지만 여제자들과 자취방을 꾸려 이중 살림을 꾸렸다.  

 

수사 10개월 만에 용의선상에 오른 체육교사 주영형은 마침내 범인으로 밝혀졌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유괴 다음날 윤상이를 이미 살해했던 것이다. 주교사는 평소 도박을 즐겼고 도박 빚이 1800만원에 이르렀으나 주영형은 형편이 어려웠던 것도 아니였다. 그의 집안도 부유해서 갚을 능력이 되었던 것이다. 

 

주영형의 공범들
주영형에게는 2명의 공범이 있었는데 바로 주영형의 2명의 여제자들이었다. 이들은 협박전화, 협박전화를 주선생을 대신해서 했다. 검거되기전 수사의 압박을 느끼자 증거인멸을 위해 주선생의 지시로 여제자 공범 한명은 수면제 40알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고 다른 한명도 죽기위해 자살할 날짜를 잡아놓은 상태였다.

 


주영형은 체포 후 
주영형은 우진이를 죽이지 않았다고 계속 주장했다. 우진이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본인이 화에 못이겨 스스로 죽었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부디 자신을 선처해달라고 한다. 그러나 범행 전 미리 비닐과 나일론 끈을 준비했던 주영형이었다. 그리고 8개월 뒤 사형이 집행되었다. 1983년 7월 9일 주영형은 사형을 당하고 범행을 도운 제자들도 단기 3년, 장기 5년의 죗값을 치르게 된다. 

 


우진의 장례식을 치르고 3년 뒤 우진이의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이겨내기 힘든 슬픔에 병이 들어 올라가셨다.

 

우진이의 어머니가 남긴 글이 있다

다시는 외면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바램이 담긴 글이다. 


범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음에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을 판단할때 외향적인 모습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많다. 외모, 좋은 학벌, 번듯한 가정 등 나도 모르게 품는 권위와 선입견에 복종하는 사람이 되고 잘못된 편견들이 나의 눈을 가리고 있어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가장 권위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여야 내 중심을 지킬 수 있고 선입견과 권위에 대한 복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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