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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꼬꼬무

1954년 월드컵, 최초 한일전 승패가 아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꼬꼬무 13회]

by 365 ^^ 2022. 1. 14.

최초의 한일전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예선전은 일제 강점기를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 속에 또다시 3년간의 한국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한국은 여기저기 폭격맞은 흔적들도 아직 많을 만큼 나라 전체가 엉망인 상황에서 치른 경기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출전 반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출전을 반대했다. 이번 한일전은 월드겁 아시아 지역 예선전이였기 때문에 당시 경기 방식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돌아가며 자신의 나라에도 경기를 개최해야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 놈들이 우리 땅을 밟는 걸 절대 허용할수 없고 만일 진다면 국민들에게 더욱 상처가 될것이라며 한일전 출전을 반대했었다. 이때 대표팀 이유형 감독이 일본에서 경기를 치를 것을 제안했고 대통령은 이를 허락하며 두 경기를 모두 일본에서 치르기로 하고 한일전을 치르기로 했다.

 

당시 출전 선수 리스트

 

경비 마련의 어려움
못사는 시절 축구를 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가야만 가능했고 그렇게 군인 중에서 선수를 뽑았다. 전쟁 직후라 열악한 환경에 축구화 하나 변변한 것이 없었다. 사실 대통령이 한일전을 반대한 실질적 이유도 돈이였다.  

 

축구화 밑바닥에 못을 박아 조금만 운동을 하면 굽이 닳아 못이 튀어나왔고 망치로 항상 수선을 하며 신어야 했던 축구화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돈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재일동포들의 후원으로 경비를 마련했고 마침내 일본 도쿄 한복판에 태극기가 휘날린다. 경기는 시작됐다. 

 

도쿄 경기장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있는 우리 선수들

 

운명의 첫 한일전

 

전반 15분 만에 터진 일본의 골로 경기장 여기저기에서 환호와 함께 들리는 조롱에 우리 선수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때부터 독기를 품고 달리기 시작한다. 전반 6분 만에 정남식의 동점골이 터지고 경기장의 일본관중석은 쥐죽은 듯 조용해진다. 여기서 끝이 아니였다. 전반 종료 직전 최광석의 역전골이 터져나왔고 후반에도 골은 이어졌다.

 

경기장이 눈이 녹아 온통 진흙 밭의 열악한 환경이었다. 

Japan-Korea 최종스코어 1: 5로 한국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날 경기장 한 구석을 메운 재일 동포들은 골을 넣어도 숨죽여 지켜보다가 경기가 끝난 후 눈물과 밝은미소로 선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2차전 전의를 상실해 거칠어진 일본의 플레이로 김지성 선수가 팔꿈치를 가격 당해 치아 다섯개가 부러졌고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진 상황에 다시 정신을 차린 뒤 그는 다시 뛰겠다고 하고 그라운드로 들어갔다.  일본의 거친 플레이에도 불구하고 2:2 무승부로 끝이 나면서 1승 1무의 성적으로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따냈다. 

 

한일전 승리로 금의환향한 선수들을 열열히 맞이했다.



약소국의 설움
스위스 월드컵 본선 참가국은 16개 국이었다. 스위스 월드컵 공식 포스터 당시 축구공은 지금과 같지 않다. 이 포스터에는 우리나라 태극기가 없다. 축구공이 있는 자리가 태극기가 있는 자리로 약소국의 설움을 포스터에서도 느낄수 있다. 

 

한국 국기가 없는 스위스 월드컵 공식 포스터



지옥의 환승여정 

스위스로 가는 여정도 만만치 않았다. 일단 일본 도쿄 공항으로 가서 스위스행 표를 구입하는데 표가 13장 만 있었다. 경기까지 8일 남은 상황이라 선발대 13명이 먼저 출발했고 태국 방콕-인도 캘커다를 거쳐- 이탈리아 로마- 스위스 취리히로 가는 여정이었고 그것 또한 예약하지 않아 환승을 할적마다 비행기를 바로 탈수도 없었다. 민항기, 군항기를 그때마다 상황에 맞게 갈아타며 이동했고 1진 13명이 스위스에 도착한 것은 첫 경기 3일 전이었다.

 

무려 5박6일이 걸렸고 비행시간만 64시간이었던 지옥의 환승여정이었다 . 후발대는 이후로도 한참을 공항에 묶여있었고 아무리 구해봐도 표가 2장이 모자랐다. 이때 축구팀 사정을 들은 영국인 부부가 표를 양보하면서 그 덕분에 간신히 스위스로 출발해 경기 전날 도착했다. 

 



1954년 월드컵 본선

 

세계 최강팀과 맞붙다. 

당시 첫 상대팀인 헝가리팀은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유고슬라비아를 꺽고 금메달을 딴 후 최근 4년간 치른 31개의 경기에서 한번도 진적이 없던 무패의 신화를 이어가고 있던 세계 최강의 팀이었다. 어떤 팀을 만나도 10분안에 골을 넣는다는 법칙도 있던 팀으로 이 팀의 최고의 선수 '악마의 왼발' 별칭을 가지고 있는 푸스카스가 있었다.

 

맨 앞이 푸스카스 선수

 

푸스카스 상의 유래 (페렌츠 푸스카스는 누구?)

1950년대 헝가리팀은 매직 마자르(헝가리 민족) 라고 불리던 세계 최고의 축구팀이였고 그 중심에는 최고의 선수 푸스카스가 있었다.  페렌츠 푸스카스는 헝가리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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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계 최강팀과의 경기가 시작되고 우리팀은 전원 수비 작전으로 마의 10분을 무너뜨린다. 그 와중에 푸스카스는 흥분하기 시작하고 한국 수비 선수들은 철저히 푸스카스를 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반 12분만에 푸스카스는 첫골을 넣었고 이런식의 대포알같은 슛은 처음 느꼈고 홍덕영 선수는 회고한다.

 

 

그때부터 공은 쉴때 없이 골키퍼 홍덕영 선수에게 날라왔다. 손으로 막으면 손목이 얼얼하고 가슴으로 막으면 몸통이 징 울릴만큼 미사일 같은 슛이 쉴세없이 홍덕영 선수를 덮쳤다. 이날 홍덕영 선수가 막은 골은 30개까지는 세고 있었으나 그 뒤로는 셀수도 없었다고 한다.

 


후반전에는 4명이 몸에 무리가 와서 경기를 뛸수 없어 7명이서 11명을 상대하며 경기를 이어갔으니 9:0 도 기적의 점수였다. 비록 9골을 내줬음에도 전쟁이 끝난 지 1년도 채 안된 나라 선수들인데 투혼을 보이며 경기를 했다며 우리팀이 선방을 했다는 극찬을 받았고 그 중심에는 골키퍼 홍덕영이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헝가리 축구팀 감독이 한 말이다.


3일 뒤의 한국 터키팀 전에서는 7:0  무관심 속에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다. 터키전이 끝나고 선수들은 체류비가 없어 바로 짐을 싸서 귀국길에 올랐다.  

 

토너먼트 중 가장 적은 관중이 들어왔던 경기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과정을 모르고 경기 결과만 들었다면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가족들도 그랬다. 

 

터키 전 한창화 선수의 아들 한정수 배우
한창화 선수
한창화 선수


바로 전 해에 전쟁이 끝난 나라가 예선을 뜷고 아시아를 대표로 월드컵 본선까지 갔다는 것만으로도 사실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우승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볼수 있다. 과정보다는 결과만 남는 스포츠지만 1954년 그날 이후 다시 월드컵 무대를 밟기까지는 무려 32년이 걸렸다.

 

1986년을 시작으로 1990년, 1994년, 1998년, 2002년, 2006년 , 2010년, 2014년, 2018년 9회 연속 월드컵 진출을 한다. 9회 연속 월드컵 진출한 나라는 전 세계 단 6개국밖에 없는 대기록이고 2002년에는 월드컵을 개최했고 4강 신화까지 이루었다. 

 

이때 홍덕영씨는 월드컵 유치위원단으로 활동하며 이때 다시한번 푸스카스를 만나게 되고 푸스카스가 우리나라 월드컵 유치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홍덕영 선수의 집에 가면 항상 걸려있는 사진이 있다. 경기전 축구화를 수선하는 모습의 사진이다. 

 

홍덕영 선수는 당시 29세

 

홍덕영 선수는 1926년 함경남도 함흥 출생으로 보성전문대를 입학해 축구판의 골키퍼로 활동을 했다. 이후 

  • 런던 올림픽 출전 
  • 1954년 마닐라 아시안 게임 은메달 수상
  • 57년 선수생활을 접고 심판으로 10년간 활동 
  • 1959년 고려대 감독 이후 서울은행 감독
  • 80년대 대한 축구협회 부회장직 역임

 

홍덕영 선수의 아들 홍기빈

 

너무나 배고팠던 그날의 첫 도전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건 아닐까. 너무나 대단한 상대 선수들의 전적을 보면 그들도 꼭 1패 이상의 전적이 있다. 신인때는 누구나 겪는 '처음 그 순간 패배' 결과가 있으나  결과적으로 과정은 승리가 될수 있다.  단지 눈앞의 성과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고 과정의 가치를 아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그것은 살아가면서 절대 바꿀수 없는 가치있고 소중한 경험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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