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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

4.19 혁명 배경과 전개 과정 속 김주열 열사의 죽음

by 365 ^^ 2021.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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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전개 간략 정리

 

① 3.15 부정 선거

② 3.15 의거

③ 김주열 의사 죽음

④ 4.18일 고려대생 피습 사건

⑤ 4.19 혁명

⑥ 계엄령 선포

⑦ 4.25 교수단 시위

⑧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4.19 혁명 배경이 된 3.15 의거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 선거로 인해 마산 지역의 민주 당사에서 투표 포기 선언을 하고 전남 광주에 이어 경남 마산에서 3.15 의거가 일어난다. 3.15 선거 당시 계속되는 부정행위를 목격하자 투표 무효를 외치며 거리로 나온 학생과 시민들에 당황한 경찰들은 민중들을 대상으로 발포를 한다. 

 

마산 3.15 의거: 이날 시위는 사망자 9명 , 중상자 80여 명 발생하고 경찰에게 보복성 폭행을 당한 250여 명의 시위자들.

이날 3.15 시위 현장에서 경찰은 시민들을 상대로 총을 발포하며 무력 진압을 한 결과  9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시위현장을 수습하는 경찰들에 의해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이는 4.19 의거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서 1960년 3월 15일 4대 대통령 선거를 엄청난 부정선거를 저지르면서 이에 분노한 마산 민중들이 3.15 의거를 일으킨다. 이때 사상자는 9명이 발생하게 되고 밖으로 나갔던 한 학생이 돌아오지 않는 사건이 발생한다. 

 

 

 

 

4.19 혁명의 도화선 김주열 열사 

 

3.15일 실종된 김주열

전라북도 남원 출신 김주열 학생(당시 17세)이 1960년 3월 15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실종이 된다. 김주열은 마산 출신이 아닌 남원출신 학생이었는데 당시 명문고 마산상고 진학을 위해 외가집이 있는 마산으로 와서 형과 함께 시위에 참가했다가 형만 돌아왔기 때문에 시위 중 사망한 사망자,부상자 명단을 찾아봤으나 김주열은 없었다.

 

실종이 된 아들을 찾아서 어머니는 마산으로 달려왔고 애타게 찾았고 김주열 학생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아들을 찾았으나 끝내 아들을 찾지 못했다. 그 때 경찰에게 저수지에 시신을 투기하는 것을 봤다는 제보가 들어온다. 

 

저수지 속 물을 빼고 김주열 열사 시신을 찾는 모습

4.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김주열 

하지만 저수지 안에도 아들은 없었고 3월 15일 실종이 되고 아들의 행방은 묘연한 가운데 아들 실종 28일째 어머니는 4월 11일 남원으로 내려갔는데 3시간 뒤 그날 오전 11시에 마산 앞바다에서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소년의 시신이 발견된다. 그 시신이 당시 부산 일보 기자에 의해서 사진이 찍혔고 신문에 대서 특필 됐다.  

 

당시 부산 일보 허종 기자에 의해서 찍힌 김주열 열사의 사진속 모습

 

심지어 최루탄의 크기는 뒤통수를 관통할 정도로 최루탄 문구에는 사람에게 사용하지 마시오라고 써져 있는 군사용 최루탄을 규정을 어기고 쏜 것이다.

 

김주열 열사 뒤통수를 관통한 최루탄

 

이 최루탄을 맞고 17세 소년의 오른쪽 눈을 관통한 것이다. 

 

김주열 열사 뒤통수를 관통한 최루탄 크기

 

 

김주열사의 죽은 어떻게 알려졌나? 

 

당시 홍합 잡이하는 한 어부의 갈고리에 걸려서 올라온 것이다. 3월 15일 경찰은 김주열에게 최루탄을 쏜 뒤 병원으로 옮기는 대신 시신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유기한 것이다. 

 

당시 유기한 사진을 찍은 부산 일보 허종 기자는 경찰보다 먼저 도착했고 경찰들이 다가 오자 외투에 카메라를 숨긴 뒤 간신히 보도에 성공했다.  이 한 장의 사진을 통해 충격적인 소식이 전국 언론사 및 해외로까지 전파되었다. 

 

허종 기사의 이 한자의 김주열 열사 사진: 마산 2차 시위(4월11일)의 도화선이 된다.

이 사진을 보고 전국의 국민들이 분노했고 걷잡을 수 없이 마산 2차 시위가 벌어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정부에서는 서둘러 사건을 종결 짓기 위해 김주열의 시신을 남원을 보내려고 시도했으나 어머니는 아들의 시신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며 부정 선거로 당선된 이기붕의 집에 묻으라고 거절했다. 그러나 주변의 만류로 장례를 치르게 된다.  

 

서울 국립 4.19민주묘지

김주열 열사의 묘

 

서울 국립4.19민주묘지 속 김주열 열사 묘비

 

서울 국립4.19민주묘지 내용

 

3.15 마산 시위에 참여 후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김주열의 사망 소식은 학생들의 분노를 폭발 시켰다. 

 

마산 2차 시위 (4월11일)

분노한 마산의 어머니들과 학생들, 그리고 시민들까지 한마음으로 시위에 동참하게 되고 제 2차 마산 항쟁을 도화선으로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된다.  

 

 

 

 

 

4.18일 고려대생 피습 사건

4월18일 대규모 시위를 계획한 고려대 3천 여명 학생들은 '부정선거 다시 하라! 김주열 죽인 책임자를 처벌하라, 민주 역적 몰아내자' 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며 부정 선거 해명 및 연행 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며 경찰의 진압에도 용감하게 시위하던 학생들은 평화 시위를 마치고 해산 후 되돌아오고 있었다.

 

대한반공청년단

대한반공청년단은 1960년 자유당에서 3.15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만든 선거단체로 선거분위기 장악을 위해서 깡패조직까지 동원해 폭력과 테러를 자행했다. 현재 광장 시장 근처 위치 천일 백화점 앞을 지나는데 갑자기 각종 흉기로 무장한 깡패들이(대한반공청년단) 무자비하게 학생들을 폭행하고 테러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정치 깡패 습격으로 고대생 200여 명이 부상을 당하게 된다. 

 

1960년 4.19일 조선일보에 실린 고려대생 피습사건의 현장 사진들
대한반공청년단의 폭행

 

이를 계기로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더욱더 강해지게 된 계기가 된다. 

 

 

 

4.19 혁명의 그날

1960년 4월 19일 이날 대광고 학생들은 밤새 시위 준비를 마치고 경무대로 향한다. 이렇게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먼저 시위를 시작했고 그들이 서울대학교 앞을 지나면서 시위를 준비중이던 서울대생과 합류한다. 

 

효자동 거리 

4.19 혁명 시위대가 걸어온 그길 (이승만 대통령이 있던 청와대로 향했던 학생들)

 

이후 여러 대학의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전날 테러를 당했던 고려대 학생들의 몫까지 결의를 다지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선 고등학생들과 전국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며 정오를 기준으로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나오기 시작한다.

 

4.19일 거리로 나온 시민들

 

전날의 사건으로 분노한 시민들도 몰려 나오면서 10만 명으로 시작됐던  시위대는 20만 명으로 커지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로 몰려오게 되고 계속 올라 오던 시민들에게 오후 1시 30분 경찰들은 방아쇠를 당긴다.

 

무력으로 진압된 수많은 희생자 4.19 혁명 당일 '서울에서만 사망자 104명

경찰의 무차별 공격에 곳곳에서 벌어진 유혈 사태로  '피의 화요일'이 된 1960년 4월 19일이었다.

 

4.19 최초 발포 현장을 알리는 표지판

 

반공회관 당시 정치깡패들의 아지트로 현 KT 사옥자리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당시 정치 깡패들의 아지트였던 반공회관에 불을 질렀다. 

 

4월19일 3시 선포된 계엄령

 

계엄령 뜻: 전시.사변에 준하는 국가 비상 상태 시 헌법 일부의 효력을 일시 중지하고 군사권을 발동하여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국가 긴급권의 하나인 계엄령은 국민의 기본권마저도 일부 제한 할 수 있는 제도이다. 

 

계엄령 선포로 군대 진입 장면

계엄령 선포로 군대의 경무대 진입 후 4월19일의 시위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4.25 교수단 시위

그러나 4.19 시위 이후에도 민주주의 외침은 계속되었고 1960년 4월 25일에 서울대에서 시작된 257명의 대학 교수들이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면 가두 시위에 나섰다.  계엄령 와중에 시위를 감행했던 교수들이다. 

 

1960년 4월 25일에 서울대에서 시작된 대학 교수들의 시국 선언

이날 교수단 행렬을 만여 명의 시민들이 뒤따랐고 다음날 아침에는 10만 명의 군중이 시위에 동참하게 된다. 이 시위의 명백한 구호,요구사항은 '이승만 하야'였고 민족적 대참극, 대치욕을 초래한 대통령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를 외치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하나로 뭉쳤던 대한민국이었다.

 

계엄군 탱크를 점령한 시민들

이 사진에서 보이듯 시민들이 탱크에 올라갔을 때도 군인들은 어떤 위협을 하지 않았고 다행히 계엄군은 중립적 태도를 취했다.

 

4.19 혁명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고 희생자 중에는 어린 학생들도 많았었다. 4.19 때 심지어 수송초등학교 전한승 13세 초등학생이 총에 맞아 죽자 학생들도 시위에 참가하게 된다.  4월 26일 초등학생들도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한다.

 

1960년 4월 26일 수송초등학교 학생들 시위 모습

 

당시 최연소 학생이 초등학교 4학년 임동성 군으로 11살이었다. 임동성 군도 거리에서 함께 외치다 4월26일 5시30분경 동대문구 신설동 로터리 파출소 옆에서 시위 차에 깔려 사망한다.  

 

종암초등학교 4학년 임동성 군으로 11살 사망

 

계엄 사령관 송요찬 장군의 결단

계엄 사령관 송요찬은 결심을 하게 된다. 국민의 마음을 전달할 5인의 시민 대표(설송웅, 김기일, 이성환) 구성되고 송요찬 계엄사령관과 5인의 시민 대표는 경무대(청와대)로 들어가게 된다.

 

* 참고로 시민대표중 한 사람이였던 설송웅씨가 설민석 선생님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당시 모든 상황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가고 있었다. 더이상 버틸수 없었던 이승만 정권은 이렇게 4월 26일 대통령의 하야 성명 발표를 한다.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다" 다음날 이승만 대통령은 사임서를 제출한 후 하와이로 망명, 한국으로 돌아 올 수 없었다. 

 

하와이로 망명하는 이승만 대통령

 

독립 운동가이자 광복 후 초대 대통령이었지만 부정 선거, 부패 정권으로 12년 만에 막을 내린 독재 정권의 얼룩진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렇게 4.19 혁명으로 민주주의를 되찾게 된것이다. 

 

이후 1960년 4월 27일~8월 12일 허정 과도정부 들어서게 된다. 

 

4.19 이전 상황 알아보기

(1)사사오입 개헌 이승만 정권 (1~3대 대통령 선거과정)

 

사사오입 개헌 이승만 정권 (1~3대 대통령 선거과정)

이승만은 광복 이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을 지내고 7월 17일 헌법 제정-> 8월 15일 정부 수립 과정으로 거쳐 광복 후간선제(국회의원들이 선출)를 통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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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5 부정 선거 배경과 과정/ 2.28 학생 의거/ 이승만 우상화 작업

 

3.15 부정 선거 배경과 과정/ 2.28 학생 의거/ 이승만 우상화 작업

4대 대통령 선거 과정 1,2,3 대 이승만 정권이 계속되었고 1960년 3월 15일 있었던 4대 대통령 선거는 그 유명한 3.15 부정 선거가 있었던 선거이다. 3대 선거 진행 방향과 비슷하게 선거 한 달 전 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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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19 -> 이승만 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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