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광복 이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을 지내고 7월 17일 헌법 제정-> 8월 15일 정부 수립 과정으로 거쳐 광복 후간선제(국회의원들이 선출)를 통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이승만의 1차 개헌
그리고 6.25가 발발하게 되고 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이승만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지당이 참패를 하자 재집권을 위해 전쟁 중(1592년 7월) 간선제(국회의원 선출)에서 직선제(국민투표)로 1차 헌법을 수정한다.
이승만의 2차 개헌
한국전쟁 이후 3대 대통령 출마를 위해 다시 한번 헌법 개정을 강행한다. 헌법 개정 내용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로 개정 변경하려 했으나 야당과의 대립으로 무산되자 이승만이 찾아낸 것이 바로 '사사오입 개헌'이다.
사사오입 뜻
사사오입이란 4 이하는 버리고 5 이상은 올리는 반올림 계산법을 말한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자유당의 몰표가 나오면 개헌이 유력한 상황이었고 당시 국회의원 수는 203 명이었다 203 명의 삼분의 이가 찬성하면 개헌이 통과되었고 203 명의 삼분의 이는 135.333... 명으로 (0.333 숫자도 ) 한표로한표로 인정해서 136명이 찬성해야 개헌이 통과하는데 투표 결과는 한 표 모자란 131 표가 나온다 이때 사사오입 반올림 계산법이 등장한다
135 표가 나와서 부결이 돼야 하는데 이승만식 계산으로 135.333... 은 136이 아니고 135.333을 사사오입(=반올림)해서 0.333은 버리고 135명 나오면 통과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수학과 교수의 자문까지 구해 2차 개헌을통화시키고 이승만 대통령은 3대 대통령에 출마한다.
당시 여당은 자유당, 야당은 민주당이었다. 대통령 세명의 후보는 이승만 자유당, 신익희 민주당, 무소속 조봉암이었는데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선거 열흘 전에 갑자기 이동하는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3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
그렇게 정권 교체의 기회가 사라진 듯했으나 대통령은 이승만이 되었으나 부통령은 장면 (민주당) 당선이 되면서 이승만은 다시 한번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자유당인 1875년생 이승만은 강화도 조약 1년 전에 태어나서 당시 81세 고령의 대통령이었다. 그럼 85세가 되는 다음 선거에 또 야당이 부통령에 당선된다면 대통령 유고시에 정권이 부통령으로 옮겨가게 되므로 정권 교체의 위협을 느낀 것이다.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
이승만을 불안하게 했던 야당의 부통령인 장면이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총을 맞는 사건이 발생한다. 28세 청년 김상붕이 쏜 총알이 장면 부통령의 왼손을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또한 높은 득표율로 이승만을 위협했던 조봉암은 당시 평화 통일을 주장하며 8.15 광복 전 사회주의 활동을 문제 삼아 간첩 혐의로 조봉암을 사형시킨다. 이것이 정치적 탄압이 난무했던 3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다.
[출처 : 선녀들 리턴즈 3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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