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대통령 선거 과정
1,2,3 대 이승만 정권이 계속되었고 1960년 3월 15일 있었던 4대 대통령 선거는 그 유명한 3.15 부정 선거가 있었던 선거이다. 3대 선거 진행 방향과 비슷하게 선거 한 달 전 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미국에서 수술 중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연이은 야당 대통령 후보의 사망으로 다시 한번 당선이 확실시된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의 고령의 나이로 사망 시 부통령에게 정권이 관건은 여당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의 당선이 절실했다. 그러나 이때 이기붕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기가 하락세에 있었고 건강 악화로 선거운동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당이 부통령을 만드시 당선시키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에 자유당은 부정선거 지침 강령을 만든다.
3.15 부정선거
영화 <효자동 이발사> : 3.15 부정선거내용 다룬 영화이다.
부정선거 지침강령
당시 최인규 내무부 장관이 선거를 주관하였으며 자유당 당선을 위한 전략은 마을마다 3.5.9명의 사람들이 짝을 지어 기표하는데 그룹의 조장이 조원의 기표 상황을 확인 후 자유당 선거 위원의 검사를 거쳐 투표 완료하는 것으로 비밀투표의 기본 원칙 조차 지켜지지 않은 선거였다.
또한 원래 투표 당일 날 선거운동은 위반인데 자유당 측 유권자에게 자유당 완장을 착용시켜 자유당 투표를 강요하며 야당 성향의 유권자들은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았다.
3번째는 총유권자의 40%에 해당하는 자유당 표를 미리 투표함에 넣어 놓는 방법을 사용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개표할 때도 투표지 100장 중 맨 윗장과 아랫장만 여당 이기붕 표로 덧씌운 뒤 100장 모두 여당 이기붕 표인 것처럼 보이게 하여 가운데 표는 확인하지 않은 채 여당표로 집계한다.
어느 지역에서 계속 야당표가 속출한다면 투표용지에 인주를 찍어서 무효표를 만든다. (손가락에 인주를 묻힌 후 피아노 치듯이 투표용지에 인주 자국을 남기는 것)
마지막으로 개표장의 불을 끄고 표 바꿔치기하면서 3.15 선거는 부정으로 얼룩지게 된다.
2.28 대구 학생 의거 배경
3.15 선거를 앞두고 선거 유세가 한창이던 2월 28일 대구에서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의 선거 유세가 있던 날이었다. 그러나 여당은 일요일에 (2월 28일) 사람들이 유세장 못 가게 하려고 일요일 학생들을 강제 등교 명령을 내린다. 자유당 정권은 이날 학교 프로그램으로 영화 관람, 토끼 사냥 등의 말도 것을 시킨 것이다. 2월 27일 하루 전날은 자유당 유세가 있는 날이었고 이날은 학교 수업이 있는 날임에도 단축 수업을 시켜가며 자유당 유세에 학생을 동원했기 때문에 학생을 정치적 도구로 전락시킨 행태를 자행했던 자유당이었다.
당시 학생들이 정치에 민감했던 이유는?
당시 사회의 고등학생의 영향력은 요즘과 많이 달랐다. 고등학생 때 결혼한 사람들도 꽤 일을 정도로 스스로 느끼는 자부심이나 책임감도 지금과 많이 달랐다고 볼 수 있다. 6.25 전쟁 지구 북한과의 관계가 정부에 중요했기 때문에 민주주의 교육도 강하게 했다.
학도호국단
당시 이승만 정권은 국가가 학생들을 직접 통제하기 위해 1949년 학도호국단을 창설한 후 이것이 학생회를 대체하면서 학생들을 군대식 집단 훈련과 반공 교육을 주입시키고 정치 유세에 동원되는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성장 과정을 거치던 세대였다. 이렇게 당시 학생들은 정치 동원이 일상이었다.
이에 보다 못한 대구 학생들이 시위를 일으켰다. 2. 28일(일요일) 학생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 시위를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학생들은 " 학생을 정치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학원의 자유를 달라, 민주주의를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부정 선거 적발
마산 지역에서 선거 당일 투표 시작 전에 선관위에서 도착한 투표함이 무겁고 소리가 나자 이를 의심한 야당과 여당의 실랑이 속에 여당 후보에게 기표해 놓은 불법 투표용지를 발견하게 된다.
심지어 어떤 지역의 투표함을 열었을 때 유권자 수보다 이승만, 이기붕 표가 더 많이 나왔다. 이에 다시 표 숫자를 줄이면서 결국 4대 3.15 대통령 선거 결과는 대통령 이승만 86%, 부통령 이기붕 74% 지지율로 당선을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 우상화 작업들
민주주의를 외치던 이승만 정권은 민주주의와는 역행하는 행동을 많이 했다. 그 예로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날은 시가행진을 비롯해 의장대 , 경축 편대 비행, 학생 수천 명을 동원해 매스게임, 경축 마라톤 대회, 합장, 글짓기, 무술대회 등이 진행되었고 이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되기도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승만 정권은 이승만 호 '우남'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우남 공원, 우남로, 서울시를-> 우남 시로 변경하려고도 했다.(미국의 수도가 워싱턴인 것처럼) 1955년 3월 26일 이승만 탄생 80년 되던 해 남산, 파고다 공원 등 초대형 동상을 설치, 우남 회관을 광화문 앞에 건립 진행 4.19 이후 완공이 되면서 이승만이 쫓겨난 상황에 시민회관으로 이름이 변경-> 이것이 오늘날의 세종문화회관이 된다.
(* 우남의 뜻: 이승만의 어린 시절을 남산 우수현 남쪽에서 보냈다고 해서 한 글자씩 가져와 '우남'이라 지었다고 한다)
'썅 팔 연도 뜻: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시대를 비유하는 말로 쌍팔년도=단기 4288년을 의미하고 바로 이승만 정권 1955년을 의미한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공부를 해서 미국식 사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어린 시절부터 체득된 유교적 마인드가 자리 잡혀있던 것 같다. 본인이 양녕대군의 후손을 강조하며 해외에 소개할 때는 조선의 왕자처럼 소개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3.15 학생시위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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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오입 개헌 이승만 정권 (1~3대 대통령 선거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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