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세계사 8회 리뷰]
주제 : 청일 전쟁이 동아시아 역사에 끼친 영향과 조선의 변화
청일 전쟁은 조선의 패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대륙 세력 청나라와 해양 세력 일본이 맞붙은 전쟁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을 조선에서 시작해 대륙까지 확장해가게 된다. 그러나 청나라, 일본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가장 큰 해를 입은 것은 조선인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서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청일 전쟁 이전 정세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청일 양국이 조선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임오군란이란? 당시 조선은 구식 군대와 신식 군대로 나뉘어 있었는데 조선에서 신식 군대 별기군에 비해 차별받던 구식 군대는 그 배후에는 고종과 명성황후 및 일본이 원인라고 생각하고 창덕궁과 일본 공사관을 습격한다.
이에 고종과 민씨 세력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갑신정변
그 이후 2년이 지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1884년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개화파가 일본의 지원을 약속받고 일으킨 정변이다.
그러나 갑신정변 때도 또 청나라의 도움을 받게 된다. 청나라는 진압을 위해 창덕궁으로 진격하고 창덕궁을 점거하고 있던 일본과 청나라 군대의 소규모 전투가 벌어진다. 청나라의 승리로 끝나면서 갑신정변 후 청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이 바로 톈진 조약이었다.
톈진조약
청일 전쟁 발발 10년 전 1885년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과 일본의 전권대신 이토 히로부미가 만나 톈진 조약을 맺는다. 그러나 텐진 조약의 내용으로 인해 청일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톈진 조약의 내용
제 1조 : 청일 양국은 4개월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한다.
제 2조 : 조선 정부가 군대를 교련하여 스스로 치안을 지키게 하며 외국이니 교련관을 고용할 경우 청국인과 일본인 무관을 파견하지 않는다.
제 3조: 조선에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여 청일 양국, 혹은 어느 한쪽이 파병하게 될 때에는 우선 상대방 국가에 문서로 알리고, 사건이 진정되면 즉시 철병하고 주둔하지 않는다.
동학농민운동 발발
톈진 조약 3조에 따라 사건이 진정되면 철수한다는 내용을 이행하며 두 나라는 조선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본은 톈진 조약 체결 후 약 10년이 지나서 일본이 조선에 들어오는 빌미가 되는 동학 농민 운동이 발생한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필두로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동학 농민군의 기세가 정읍 황토현->황룡촌->전주성을 점령을 하게 되니 고종은 다시 한번 청나라를 부른다.
외교에 공짜란 없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청나라 개입
1894년 6월 8~12일까지 몇일에 걸쳐서 청나라 군대가 전주성과 가까운 조선의 아산 백석포에 상륙한다. 톈진 조약에 의해 다시 청나라는 일본에 알리게 되고 일본은 조선내 일본 공사관과 일본 거류민 보호라는 명분으로 인천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들어온다.
일본의 개입
일본이 인천으로 들어온 이유는 일본은 처음부터 동학군을 제압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조선의 중심지인 한양, 경기 지역을 장악한다. 일본의 목적은 청나라 축출이었다. 이렇게 들어온 일본은 일본 대본영을 설치한다.
1884년 갑신정변부터 대대적으로 국방비를 늘려나가면서 연간 국가 예산의 약 20% 이상을 군사비에 사용하면서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 국가 예산의 약 30%를 군사비로 (현재 일본 국방비는 전체 국가예산의 1%)정도였던 것에 비해 약 10년 동안 청나라를 물리치기 위해 대대적으로 군사력을 확장시켰던 일본이었다.
일본의 경복궁 점령
동학 농민군은 전주화약을 체결하고 해결되자 일본과 청은 톈진 조약에 의거 철수해야 했으나 일본은 청나라에게 공동으로 조선 근대화 추진을 제안하지만 청나라는 거절하고 이에 일본은 바로 고종이 있는 경복궁을 점령하게 된다.
1894년 7월 23일 새벽녘 경복궁을 점령을 위해 대기 중이던 일본군은 작전 명령이 떨어지자 청나라의 통신 단절을 위해 전신선을 절단하고 경복궁 서쪽 영추문에 들이닥친 후 고종을 포로로 사로잡는다.
일본은 고종을 압박해 조선은 자주독립 국가임을 선포하고 청나라와 맺은 조약을 폐기를 강요하며 청나라 군대를 몰아내주길 원한다는 공식 문서를 요구한다.
잠정합동조관 체결
경복궁 점령 한달 뒤 철수하며 일본은 잠정합동조관을 체결하며 철수한다.
일본은 아시아를 침략하며 서구 열강과 동등한 강대국이 되길 바랐다. 일본의 경복궁 점령 후->청나라를 공격->청일전쟁 발발로 진행되었다.
청일 전쟁 진행 과정
풍도 해전
청일 전쟁은 조선 땅 안산 풍도에서 시작된다.
동학 농민 진압을 위해 청나라 군대는 아산에 이미 상륙해 있던 상황이었으나 병력이 많치 않아 풍도로 병력 지원군 수송선을 보내고 일본군은 이 정보를 입수한 후 일본 본토에서 3척의 함대를 출동시킨다.
이때 일본이 먼저 청나라 함대에 대포를 발사하며 청나라 군함 '광을호'가 좌초하고 다른 한척은 피해를 입고 도망간다.
일본과의 첫 번째 격전이 끝난 후 청은 다시 지원군을 보내고 청나라 지원군 약 1000명을 실은 '고승호'를 항복을 거부하자 결국 침몰시킨다.
그러나 고승호의 침몰이 외교적인 문제가 된다. 고승호는 바로 영국의 배였던 것이다. 영국에서 배를 빌려 병력을 수송한 청나라였던 것이기 때문에 이 배에는 영국인들과 다른 유럽인들도 승선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은 영국 선원과 유럽인 몇 명만 구조하고 나머지는 방치했고 일본은 빠른 배상을 통해 영국이 개입하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청과 일본은 육지로 올라오게 된다.
성환전투, 평양전투
아산 근처의 성환에서 벌어진 육상전에서도 일본이 승리한다. 이에 청나라는 평양으로 후퇴한다. 그리고 일본은 성환 전투가 끝나고 1894년 8월 1일이 되서야 정식으로 '조선의 독립과 동양 평화' 라는명목으로 선전포고를 한다. 이에 청나라 또한 '대일 선전 포고'로 대응한다.
청과 일본은 서로 선전포고 후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이 승리를 하면서 기세를 몰아 만주로 군대가 이동하게 된다.
조선에서 벌어진 남의 나라 전쟁에 조선군은 누구편?
일부는 청나라를 일부는 일본을
조선시대 관군은 서울 경기를 관할하는 중앙군과 8도 각 지역을 수비하는 지방군이 있었고 강요에 의해 일본과 군사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정부는 중앙군에게 일본군을 도우라고 명령했고 평양에는 청나라군이 점렴 중이였으므로 평양의 지방군은 관군과 달라 청나라에 협조해야 하는 조선 지방군이었다. 이렇게 우리 민족끼리 싸우게 되는 상황에 놓은것이다.
뤼순 전투
안중근, 단재 신채호 선생도 순국한 뤼순 감옥이 있는 다렌이다. 뤼순은 톈진, 베이징이 가까이 있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청나라의 군사요충지로 약 10개의 포대와 군함 수리 시설을 갖춘곳인데 이곳이 하루만에 점령을 당한다. 뤼순 전투에 참가했던 일본군은 약 1만5천명이었고 청나라군은 약 1만2천명 정도로 비슷했으나 청나라 군인중 9000명 정도는 신참 병사였다.
뤼순 학살사건
일본은 청나라 땅을 밟은 이후 이곳 뤼순에서 있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다. 압록강을 건너 뤼손을 점령한 일본은 닥치는데로 군인과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당시 약 2만 명의 희생자가 추산된다.
또 한편으로 일본은 조선내에서 동학농민군을 남쪽 끝까지 쫓아가 살육을 하고 있었다. 청일 전쟁 과정에서 일본은 약 2만명이 전사 청나라는 약 3만명, 조선인은 약 3~5만 명 추산된다고 한다. 청일 전쟁에서 가장 많이 죽은이는 조선인이였던 것이다.
이렇게 뤼순이 점령당하자 영국, 미국, 프랑스는 당황한다. 이런 기세로 밀고 나가면 일본은 베이징까지 점령하게 되고 청나라에 이권을 가지고 있었던 서구 열강은 불안을 느끼며 일본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10월 말~11초의 뤼순은 겨울이 오기 시작했고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보급로가 확실하지 않게 되자 수도 베이징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 작전을 바꿔 북양함대 사령부가 있는 웨이하이를 집압 후 타이완으로 이동하며 점령지역을 넓히려는 일본의 목적이 있었다.
시모노세키조약
이렇게 청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면서 전후 처리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는 이홍장을 시모노세키로 부른다. 그렇게 일본으로 간 이홍장은 특별한 이유없이 일본의 우익 청년에게 피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게된다.
시모노세키 조약 내용
제 1조: 조문은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국가임을 확인한다'
제 2조: 청국은 아래 토지의 주권 및 해당 지방의 성루, 병기 제조소 및 관청 소유물을 영원히 일본에 할여한다.
-> 랴오둥(요동)반도를 가져간다. 이때 타이완도 일본의 영토에 강제 편입되면서 1945년 일본 폐망이 될때까지 일본의 식민지아래 놓여있게 된다.
제 4조: 청국은 군비 배상금으로 고평은 2억 냥 일본국에 지불할 것을 약정한다. (이 금액은 당시 일본의 3~4년간의 재정과 맞먹음)
청일 전쟁 후 일본 민심 변화 단계
◎ 청일 전쟁을 계기로 전쟁에 호의적으로 변했갔다.
◎ 승전국 일본의 국민 일본인이라는 자부심이 생겨났고
◎ 청일전쟁 이전에는 일본 국민에게 가장 위대한 사람은 지역 영주였으나 청일 전쟁이후 일왕의 존재를 크게 인식하게 된다.
◎ 중앙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면서 일본 제국의 국민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된다.
당시 일본의 의도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만평들
청일전쟁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중국은 야만이고 일본은 문명이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청일 전쟁 승리 후 기세등등해진 일본은 아시아 패권을 장악하면서 제국주의 국가가 되는 첫발을 내디딘다. 확장된 일본의 제국주의 논리는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재현된다. 청일전쟁은 2차 세계대전 속 태평양 전쟁의 리허설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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