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조약과 갑신정변 속 조선의 개항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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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강화도 조약과 갑신정변 속 조선의 개항 과정

by 365 ^^ 2021.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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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대 일본은 서구식 개혁을 진행하며 강한 군사력을 키우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국력이 상승한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압박해 개항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일본의 목표는 단순한 교역이 아니라, 조선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경제·군사적 거점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과연 강화도 조약이 조선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며, 갑신정변은 왜 실패했을까? 그리고 이 모든 혼란 속에서 명성황후가 선택한 마지막 승부수는 무엇이었을까? 지금부터 조선 근대화의 갈림길이 된 두 사건을 살펴보자.

 

🚢 강화도 조약 배경 (1876)

📌 운요호 사건(1875): 일본의 도발

 

운요호 사건의 진실 (아편전쟁-> 난징조약-> 일본 개항)

 

운요호 사건의 진실 (아편전쟁->난징조약->일본 개항)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8-1회] 주제: 개항 과정 운요호 사건의 진실 강화도 조약->갑신정변 출연자: 설민석, 진세연 조선 말에 흥선대원군이 펼친 통상수교거부정책 이후 대원군이 실각을 하

jangane.tistory.com

 

🚢 강화도조약 (1876년:조일수호조규)

운요호 사건 이후 일본은 조선에 외교 사절을 보내 협상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 협상은 일방적인 강요나 다름없었다.

 

📌 1. 조약을 강요하는 일본

3차에 걸친 회담이 진행되었다. 일본은 통상 조약 초안을 제시하며 **"국제적으로 무역을 하는 국가라면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조선을 강하게 압박했다. 그러나 조선은 국제 조약 개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고, 일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했다.

 

협상은 일방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일본은 10일 내 회답하지 않으면 무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조선은 제대로 된 외교 전략 없이 **군사적 대응을 우선시해 무신(武臣)인 신헌(申櫶)**을 협상 대표로 내보냈다. 그러나 신헌 역시 외교 경험이 부족해 협상을 주도하지 못했고, 결국 일본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게 **1876년 2월,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가 체결되었다. 조선은 일본의 정치적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서둘러 조약을 맺었고, 국제 외교에 대한 무지로 인해 불평등한 조약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강화도 조약의 핵심 내용

1876년 2월,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 江華島條約)**을 체결했다. 조선이 공식적으로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었다.

 

📌 1. 강화도 조약의 핵심 조항

 

✔ 조선의 자주국 명시

  • 조선을 독립국으로 명시하여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
  •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이었다.

14개 조항 중 4가지 

제 1관 일본과 평등한 권리가 아닌 자주의 나라에 있다. 일본은  청나라의 간섭을 피하려고 조선이 자주국임을 강조한 것이다.  청이 조선의 종주국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부산항 외 원산·인천 개항 요구

  • 부산: 일본과 가까워 경제적 침략 용이.
  • 원산: 러시아 견제 및 군사적 목적.
  • 인천: 서울과 가까워 정치적 감시 가능.

부산항은 일본과 근접해 경제적 침략 목적 /원산항 은 러시아와 근접한 원산은 군사적 목적  인천항 은 서울과 인접해 정치적 침략 목적 (왕을 감시하기 좋은)

 

해안 측량권 허용

  • 일본이 조선 연안을 자유롭게 측량할 수 있도록 허용.
  • 이는 조선 해안의 군사적 정보를 일본이 손쉽게 확보할 수 있는 위험한 조항이었다.

해안 측량의 이유는 군사적 목적이 있었다. 수심 깊은 동해안에 비해 낮은 수심의 서해안은 해안 정보를 알면 군사적, 경제적 침략이 용이하기 때문에 다른 조항과 마찬가지로 독소 조항 중 하나였다.

 

 

치외법권 조항

  • 일본인은 조선에서 일본 법의 보호를 받으며, 조선 법의 적용을 받지 않음.
  • 조선의 사법권이 무력화됨.

 

🔎 강화도 조약의 결과

  • 조선은 공식적으로 개항했지만, 일본의 경제적·군사적 침략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됨.
  • 청나라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경쟁이 심화됨.
  • 조선 내부에서는 개화 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점점 격화됨.

 

🚢 개화의 갈등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 내부에서는 개화의 방향을 두고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가 대립했다.

 

온건 개화파 (김홍집, 민영익 등)

  • 청나라의 개혁 모델을 따르며 기존 제도를 유지하는 점진적 개혁을 주장.
  • 청나라의 보호를 받으며 개화 정책을 추진.

 

 

급진 개화파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 일본식 개혁을 본보기로 조선의 전면적인 근대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
  •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배격하고 조선을 독립된 근대 국가로 만들려 함.

 

🚢 갑신정변, 3일 만에 끝난 개혁

1884년, 조선은 여전히 청나라의 강한 내정 간섭 아래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이후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나라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졌다.

 

 

 

📅 1884년 10월 17일 (첫째 날) - 정변 시작

 

📌 우정국 개국 축하연, 정변의 신호탄

  • 장소: 우정국(조선 최초의 우체국)
  • 참석자: 고종, 왕실 인사, 개화파 및 온건 개화파 관리들

✔ 김옥균과 박영효를 비롯한 급진 개화파는 일본 공사관과 사전 협의를 진행했다.
✔ 정변의 신호로 우정국에서 "불이야!"라는 외침과 함께 거사가 시작되었다.
✔ 개화파가 고위 관리들을 공격하며 민씨 정권 주요 인사(민영익 등)가 부상을 입었다.
✔ 개화파는 고종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이동시키며 개혁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
✔ 정변이 성공하는 듯 보였고, 개화파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 1884년 10월 18일 (둘째 날) - 개혁 정권 수립

 

📌 급진 개화파, 14개조 개혁안 발표

 

개화파는 정변 성공 후 새로운 근대 개혁 정권을 세우고 다음과 같은 개혁안을 발표했다.

 

청나라와의 관계 단절 → 조선의 완전한 독립 선언
신분제 폐지 → 양반·노비제 철폐 및 평등 사회 구축
과거제 폐지 → 능력 중심의 관리 등용
재정 개혁 → 국가 재정을 중앙집권적으로 개편

하지만 이날 밤,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온다.

 

청나라가 1,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정변 진압을 위해 조선에 도착했다.
✔ 개화파는 일본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일본군이 개입하지 않으며 불안이 커졌다.
✔ 조선 내 보수 세력도 개화파의 급진적인 개혁에 반발하며 불만을 표출했다.

 

📅 1884년 10월 19일 (셋째 날) - 갑신정변의 몰락

 

청나라의 개입과 일본의 배신

  • 새벽, 개화파가 청나라군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대비하려 했지만, 병력이 부족했다.
  • 일본군이 개입할 것이라 믿었지만, 일본은 갑자기 철수하며 개화파를 외면했다.
  • 결국 청나라군이 경운궁을 공격하며 개화파 정권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 개화파 지도자들의 탈출

 

✔ 김옥균, 박영효 등 주요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으로 도망쳤다.
✔ 남아 있던 개화파 인사들은 청나라와 조선군에 의해 체포되거나 처형되었다.
✔ 고종은 다시 청나라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고, 개화파가 추진했던 개혁안은 모두 폐기되었다.

 


🔍 갑신정변이 남긴 것

조선의 독립 시도는 실패했지만,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 갑신정변은 여러가지 한계로 결국 실패했지만 갑오개혁, 독립협회 활동 등 근대화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 이후 개화 운동은 위축되었으나, 10년 후 1894년 갑오개혁으로 다시 개혁이 추진되었다.

 

 

개화 정책을 표면적으로 하긴 했지만 계속해서 이어진 민 씨 정권의 수탈로 인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이를 막아준 것이 청나라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갈수록 위세를 부린다. 당시 청나군을 이끌던 위안스카이 장군은 고종을 만나는 자리에 칼을 차고 등장한다. 

 

 

우리나라 화폐 도안에도 간섭을 하고 궁녀들에게 몹쓸 짓까지 하니 청나라의 형태에 분노한 명성황후는 청나라를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러시아와 조약을 맺는데 청나라가 화를 내야 하는데 엉뚱한 나라가 난리를 친다. 바로 영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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