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요호 사건의 진실 (아편전쟁-> 난징조약-> 일본 개항)
강화도조약 (1876년)
운요호 사건 그 이후 1876년 2월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다. 우리나라 최초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었다.
2차 회담에서 일본은 통상을 위한 조약의 초안을 제출하며 여태껏 조약 없이 이루어졌던 일본과의 무역인데 갑자기 문서를 내놓으니 조선은 일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고 교역하는 국가끼리는 조약을 맺는 건 국제적 관례라며 압박을 했던 일본이었다. 당시 이 조약이 너무 촉박하게 진행되었고 일본은 요구사항을 주고 조약의 수락 여부를 10일 내 회답하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하며 만약에 회답이 지연될 경우 무력을 사용할 수 있음을 통보한다.
당시 조선은 국제적 조약에 관한 개념을 알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14개 조항 중 4가지
제 1관 일본과 평등한 권리가 아닌 자주의 나라에 있다. 일본은 청나라의 간섭을 피하려고 조선이 자주국임을 강조한 것이다. 청이 조선의 종주국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부산항 외에 두 곳을 추가적으로 개항을 요구 (부산 원산 인천)
부산항은 일본과 근접해 경제적 침략 목적
원산항은 러시아와 근접한 원산은 군사적 목적 인천항은 서울과 인접해 정치적 침략 목적 (왕을 감시하기 좋은)
또한 해안측량을 허용을 요구한다.
해안 측량의 이유는 군사적 목적이 있었다. 수심 깊은 동해안에 비해 낮은 수심의 서해안은 해안 정보를 알면 군사적, 경제적 침략이 용이하기 때문에 다른 조항과 마찬가지로 독소 조항 중 하나였다.
강화도 조약을 맺을 당시 신헌이라는 무관 출신 관리가 나갔는데
조약 체결에 대한 언급 없이 일본의 무력 도발에 대비하여 무신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고 당시 지도층의 무능함을 개탄하게 되는 1876년 2월 조일 수호 조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다.
강화도 조약 이후 본격적인 개화 정책이 추진된다.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 이후에 근대 문화를 배우기 위해 다른 나라를 방문하기 시작한다. 첫번째는 일본으로 갔던 수신사가 있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에 초대 외교 형식으로 일본은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 줄 것을 간청해 1876년 김기수를 포함한 76명을 1차 수신사로 파견하게 된다. 강화도 조약 체결에 따른 의례적 방문이었다면 그 이후 80년도에 보다 적극적으로 외교 문제와 일본의 물정 탐색 등을 위해 4년 뒤 1880년 김홍집을 포함한 2차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한다.
보빙사(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1882년에 체결하며 미국인 공사가 조선에 부임했고 그 답례로 일본에 이어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가 있다.
보빙사 일행은 일본에서 약 1개월간 머물렀다가 일본을 떠나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 후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시카고를 거쳐 위싱터에 도착 조선을 떠난 지 약 2개월의 장거리 여정이었고 미국의 풍경에 압도 되었던 보빙사 일행
미국의 아서 대통령을 접견할 때 아서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는데 아서 대통령에게 큰절로 인사하는 보빙사의 모습이 신문에 실렸다.
보빙사 그룹이 미국 방문시 가장 놀랬던 것은 전기였다. 통역으로 간 유길준은 이렇게 표현했다.
미국의 엘리베이터를 처음 탔던 보빙사 일행 철창 같은 분위기의 엘리베이터에 놀랐다.
힘과 권력을 가진 민영익이 개혁에 앞장서야 하는데 민영익은 변하지 않았다. 새내기 보빙사 일행은 개혁의지를 불태웠지만 그들은 힘이 없었고 다 가진 민영익은 개혁에 의지가 없어 개혁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
강화도 조약 이후 또 다른 문제는 개화파의 분열이었다.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나뉘고
♨온건 개화파는 청나라식 개화를 주장하며 기존의 법과 제도를 유지하고 서양의 기술만 도입하자고 주장 (김홍집 등).
♨급진 개화파는 일본식 개화 서구의 근대적 사상과 제도를 적극 수용하자는 의견 (김옥균 등).
젊은 피들로 구성된 급진 개화파는 서재필이 당시 19살이었다. 당시 민 씨 일파와 온건 개화파가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로 1884년 갑신년에 급진 개화파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갑신정변
근대화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직접 나선 급진개화파급진 개화파 김옥균은 차관 도입에 실패하고 빈손으로 돌아온다. 이 사건으로 정치 인생에 위기가 닥친 김옥균이었다. 청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고 조선의 근대화를 꿈꿨던 급진 개화파들은 결국 정변을 일으키기로 한다.
이에 이들은 정변을 일으키기로 하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 초대한다. 1884년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 개국에 거사를 예정하고 그때 개국 축하 연회에 참석할 고위 인사들 민영익 및 민씨 일파는 물론 온건 개화파까지 제거, 왕과 왕비를 납치 후 적은 인력으로 수비가 용이한 경우궁으로 옮기면 일본은 군사병력을 지원, 거사의 신호는 별궁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김옥균과 박영효는 축하연에 참석, 불이야 라는 신호와 함께 창덕궁에 있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납치한다로 계획은 세운다.
때는 1884년 음력 10월 17일
"불이야" 치솟는 불길과 함께 거사가 시작된다. 이상함을 느낀 민영익이 바깥으로 뛰쳐갔던 민영익이 피투성이가 돼돌아오고 계획대로 김옥균과 박영효는 창덕궁으로 가서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우정국 변란을 고하며 당장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한다고 간청한다. 거사 전 창덕궁에 미리 심어둔 폭약이 터지면서 결국 경우궁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것이 1차 갑신정변으로 경우궁 안팎에 병력을 배치되고 1884년 음력 10월 18일 갑신정변 2일 차 간밤에 일어난 변란을 들은 대신들이 경우궁으로 찾아오자 차례대로 들어오는 대신들을 죽인다.
피의 둘째 날이 지나고 갑신정변 3일 차 근대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급진개화파의 14개 조 정강을 발표하는 데 갑자기 1500명의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오고
청나라 군대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정변세력의 병력과 병력 지원을 약속했었던 일본은 도망을 친다. 이것이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 중 하나인 일본의 배신이다.
이렇게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하는 급진 개화파 일행들(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은 급하게 인천으로 피신 후 일본 선박을 겨우 얻어 타고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고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이 난다.
갑신정변 의의
갑신정변은 여러가지 한계로 결국 실패했지만 갑오개혁, 독립협회 활동 등 근대화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개항과 함께 조선에 불어온
근대화의 바람
전화의 설치 서울에 전차가 생기고 기차 같은 운송수단이 생겨나고 전화의 발명으로 우리나라에도 궁에 전화가 설치된다. 그때 전화를 받는 격식이 있었다.
전화를 걸어 명을 전달하던 고종
황제의 전화받는 법
사진의 등장
사진이 들어오자 신기하기보다는 처음에는 많이 놀랐었다. 조선의 건물을 찍었던 사진을 보고 내부 상황을 유출하려는 첩자로 오해했고 일반인들은 사진에 찍히면 영혼이 빼앗긴다고 생각했으며 아이의 살과 뼈로 사진을 만든다는 괴소문도 돌며 사진 찍는 것을 경계했었다.
그러나 1895년 단발령이 시행되면서 머리를 자르기 전 모습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개화 정책을 표면적으로 하긴 했지만 계속해서 이어진 민 씨 정권의 수탈로 인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이를 막아준 것이 청나라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갈수록 위세를 부린다.
당시 청나군을 이끌던 위안스카이 장군은 고종을 만나는 자리에 칼을 차고 등장하고
우리나라 화폐 도안에도 간섭을 하고 궁녀들에게 몹쓸 짓까지 하니 청나라의 형태에 분노한 명성황후는 청나라를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러시아와 조약을 맺는데 청나라가 화를 내야 하는데 엉뚱한 나라가 난리를 친다. 바로 영국이었다.
거문도 사건(1885년) 이유는 유럽부터 아시아까지 넓게 펼쳐진 러시아는 당시 전 세계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과 라이벌 관계였다. 영국의 생각에 러시아가 한반도를 진출한다면 한반도를 거점 삼아 중국과 일본까지 점령하면 동아시아가 러시아 것이 될 것을 우려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이 불법으로 거문도를 점령한다.
열강들의 전쟁터가 되어 가는 한반도였다.
그때 나왔던 것이 중립론이었다. 열강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정부의 일부는 친러, 누구는 친일, 누구는 친청등 의견이 갈리는 대신들로 의견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 가운데 대한제국은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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