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0회]
오늘의 탐사지: 황토현 전적지- 동학농민운동 기념관
주제: 동학농민혁명과정과 전봉준 장군
출연자: 설민석
황토현 전적지
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1차 동학농민운동
백산집회
전봉준, 손화중,김개남은 1894년 이용태를 몰아내고 고부 관아를 재점령한다. 이후 백산에서 4대 격문을 발표하는데 사상 최대 8000여 명의 농민 집결 기세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백산대회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
백산 창의문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른 것은
그 본뜻이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내쫓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에게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관찰사와 수령의 밑에 굴욕을 받는 낮은 벼슬아치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을 것이니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한편 농민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태인,부안 점령) 전라도 관군이 진압을 위해 내려왔는데 약 1500 명의 연합 부대로 이뤄진 관군이 내려오고 농민군과 관군의 전력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고부 관아에서 확보한 무기로는 역부족이었다 .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최초의 전투
황토현 전투
해발고도 35.5m 황토로 이루어진 고개 황토현
농민들은 왜 황토현에 올랐을까?
원래 동학농민의 목표는 전라도를 관할하는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로 향하려고 했는데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전라도 관군이 내려오고 있었다. 일단 관군과 맞 상대하고 전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황토현에 매복을 하고 있었다.
갑오동학 농민혁명 기념탑
동학농민운동의 슬로건이자 명분, 이유가 되었던 여덟글자
동학농민혁명의 뜻을 기려 국가에서 처음 만든 기념탑
제폭구민
폭정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한다
보국안민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다.
1894년 4월 7일
이곳 황토현에서 매복 중이던 농민군은 농민군 선발대가 먼저 출격한다 .하지만 관군을 만난 선발대는 곧바로 퇴각한다. 힘없이 도망가는 농민군을 보고 관군은 곧바로 그들을 추격하는데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황톳길
마른 땅도 발이 푹푹 빠지는데 관군의 체력이 급격히 소모되고 추격 속도도 저하된다. 농민군의 숨겨진 비밀이자 숨은 아군이었던 황톳길이다.
관군의 체력 소모를 노린 농민군의 치밀한 전력 기술이었던 것이다. 황토현의 고지를 미리 선점하고 관군이 오는 경로를 지켜보고 있었다. 관군이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넘어가고 있었고 농민군은 황토재 위 관군은 황토재 아래서 서로 대치하게 된다.
역사학자 황현 선생이 저술한 <오하기문>에 따르면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관군이 불을 올려보니 비 온 직후라 안개가 자욱한 상태여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그때 농민군이 기습 공격한다. 그들은 언덕 위에서 쓰나미처럼 쏟아져 내려온다. 관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결국 굴욕적인 패배했다.
이렇게 황토현 전투는 동학 농민군의 첫 승리 전투였다.
2019년 5월 11일에 황토현 전승일을 기념해 국가 기념일로 지정해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지정했다.
매년 5월 11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황토현 전투)
실제 전투일은 음력 1894년 4월 7일 이지만 기념일은 양력 기준으로 5월11일이다.
전주성 점령
황토현의 승리 이후 농민군들은 전주성으로 향했다.
왜 전주성을 가려는가?
오늘날 도청급인 전라 감영 소재지로 전라도 최고 행정기관 전라 감영은 경제,군사,정치의 중심지로 봉기를 확대 하기 위한 필수 관문으로 상징적으로 전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전주 이씨 이성계의 영정과 시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이고 조선 왕조의 발상지를 농민군이 점령한다면 실질적, 상징적으로 조정에 큰 충격을 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전주성에 도착 순간 이미 위장해서 들어간 농민군과 내통하던 향리들에 의해 성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4월27일 전주성에 무혈 입성하게 된다.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던 전주성이었다. 전라 감사가 제일 먼저 도망갔다. 고부농민봉기는 4개월 여 만에 1차 목표를 이룬다.
외세의 개입
한편 이 소식은 정부에 전달된다. 이에 임금은 정부에 대한 전면적 저항으로 받아들이고 농민군 제압을 위해 정부가 했던 일은 청나라 군대를 들인 것이다.
10년 전 1882년 차별 대우를 받은 구식군인들의 반란(임오군란)과 1884년 일본을 끌어들인 급진 개화파의 정변(갑신정변) 때 조선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들어와 그 혼란을 잠재운 것이 청나라였다. 갑신정변을 계기로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청 대 일제의 눈치 싸움으로 양국이 충돌할 가능성을 없애고자 청나라와 일제는 톈진조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한다.
톈진조약 내용은 조선에 파병하면 상대국에 알리기로 했다. 자진해서 나간 외세를 다시 불러 들인 고종이었다. 이에 조선을 장악할 기회로 삼고 청나라는 파병을 결정한다.
1894년 5월 청군 1500여 명 이상이 충남 아산에 상륙
한편 톈진조약에 따라 파병소식을 들은 일제는
조선 내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8000여 명에 달하는 병력이 인천에 상륙한다. 일제의 선을 넘는 대규모 병력은 처음부터 청과 전쟁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안으로는 농민군, 밖으로는 외세
당황한 고종은 청.일 군대를 철수 시키기 위해 동학농민군과 휴전을 서두른다.
전주화약
전주에서 화해의 약속을 서두르는데 1894년 5월 농민군-조선 정부 전주 화약을 체결한다.
잘못된 정치의 개혁을 요구하며
동학농민군이 내세운
폐정개혁안 27개조
탐관오리를 처벌한다.
가혹한 세금 징수를 없앨 것
동학교도 가운데 무고하게 살육당하고 수감되어 있는 자들의 억울함을 풀어 줄 것
외국인들은 개항장에서만 거처를 정하고 서울로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
등등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한다. 정부는 폐정 개혁을 실시하겠다고 약속한다.
농민군이 전주화약을 맺은 이유는?
청.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왔으니 외세 침략부터 대비해야 했고 대다수 농민이었고 5월에 보리를 수확해야 벼를 심을 수 있는 시기였기 때문- 농경 국가에서는 생계가 달린 농번기였다.
집강소 설치
전주화약 이후 전라도에 50여 개의 집강소 설치하고 농민들이 자체적으로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는 농민자치기관를 설치한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시초이자 동학농민혁명의 가장 큰 성과였다.
일본의 경복궁 점령
상황이 안정되자 조선 정부는 청군과 일본군에 철수 요구한다. 그러나 일본이 철수 거부하고 농민들의 반란은 조선의 정치 제도가 잘못됐기 때문이라며 일본군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한다. 이렇게 혼란을 틈타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시작된다. 조선을 개화 시켜준다는 명목으로 김홍집의 친일 내각을 구성하는 등 일제의 입맛대로 전개되자 청나라도 발끈하며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청 대 일 이 힘겨루기를 하게 된다.
청일 전쟁
그러다 1894년 6월 선전포고 없이 시작된 청일전쟁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태평양 전쟁까지 모두 선전포고 없이 이루어졌다. 이름은 청일 전쟁인데 청나라와 일본이 전투를 벌어진 곳은 조선이었다. 나라가 전쟁터로 변해 농민들도 큰 피해 입고 있었다.
3부 끝
동학농민운동 관련 내용 ▼
☞전봉준 고부농민봉기(고부민란)/사발통문/ 고부군수 조병갑의 만석보사건 (2부)
☞우금치 전투와 전봉준 장군 단소 in 동학농민운동 기념관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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