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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우금치 전투와 전봉준 장군 단소 in 동학농민운동 기념관 (4회)

by 짱신나^^ 2020.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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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0회]

 

오늘의 탐사지: 동학농민운동기념관

주제: 우금치전투와 전봉준장군의 최후

 

 

동학농민운동 기념관

 

 

 

 

 

 

 

반외세 항일투쟁

2차 동학농민혁명    

 

경복궁 점거 소식을 들은 농민들은 다시 한번 무기를 든다. 그래서 1894년 9월 왜적을 몰아 내려 전봉준과 농민군은 재집결한다. 당시 동학의 지도자 2대 교주 최시형의 주 활동 지역은 충청도로 [접: 동학 내 조직의 단위

 

북접세력 (충청도가 전라도 북쪽에 있어서) 전라도 (남접 세력)

 

1차 동학농민혁명에 불참했던 북접 세력은 왜놈들을 몰아내기 위해 북접도 함께 동참하기로 한다. 제 2대 교주 최시형은 손병희(훗날 3대 교주)을 보낸다.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군과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군이 그렇게 논산에서 운집한 후 남북접 연합 동학농민군은 최종 목적지 한양으로 향하는데 가는 길에 공주 점령을 위해 우금치 공격을 결정하지만

 

 

 

우금치 고개에 일본과 조선의 관군, 양반들이 자체 결성한 민보군까지 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동학농민군 대 연합군(일본군+조선군)의 혈전이었다.  

 

 

 

우금치 전투 
1894년 11월 한겨울의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들은 농기구 대신 총과 죽창을 들고 조선 땅에서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벌인 동학농민군 최대의 전투이다. 

 

동학농민군 주요 무기는 죽창,낫,활,칼 그리고 화승총으로 유료사거리 약200m (임진왜란때 들어온 총) 총기류이긴 하지만 심지에 불을 붙이고 발사까지 30초 소요 즉 한 발 쏘면 30초 동안은 무방비 상태고 게다가 비라도 내리면 무용지물인 무기였다. 

 



그에 반해 일본군의 무기는 당시 최신형 총기인  스나이더 소총, 무라타 소총 으로 최대 사거리 약 1,800m

 

 

 

우금치 전투에 동원된 또 다른 최신식 무기 개틀링 기관총으로 분당 400발 대 분당 2발은 일방적인 전투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차이 나는 무기 클래스였지만 복장조차도 연합군은 겨울 전투 대비 방한복과 가죽신 완비했으나 농민군은 한겨울 전투 얇디얇은 무명옷에 버선과 짚신이 전부였다.

 

 

 

우금치 전투 상황

 

 

황토현 전투때와는 달리 고지를 선점한 일본군은 높은 곳에서 총을 겨누고 있었고

고지를 선점했던 일본군은 고지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

 

 

칼을 휘두르는 일본군과 죽창을 들고 맞선 농민군은 불리할 수밖에 없던 전투 환경으로

일본군의 칼에 죽창을 들고 맞선 농민군

 

 

공주 우금치에서 2천여 명의 연합군에게 그야말로 학살당한다. 

 

농민군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고 우금치가 하얀 시체로 뒤덮였고 계곡에 빨간 핏물이 며칠을 흘렀다.

 

 

 

 

 

 

우금치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겪은 뒤 패배한 이후에도 최후의 항쟁이라고 해서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다. 장흥,강진 등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싸워온 농민군은 결국 그곳에서 해산을 하고 일부가 11월 중순경부터 대둔산 정상 험한 암벽으로 이루어진 천연요새에서 도피하고 있었다.  다시 조선군 일본군 연합군이  형성하고 공격하여 1895년 2월 17일 전원 몰상당하였다. 

 

 

 

 

그 당시 일본군 총지휘자 가와카미 병참총감은 "모조리 살육하라" 고 명령을 내렸다. 

 

 

그 당시 희생 당한 동학농민군의 수가 3~5만명으로 추정된다. 청일전쟁에서 죽은 일본 군이나 청나라 군보다 많은 숫자였다. 백성을 보호해야 할 관군이 백성을 학살하다니 당시 조선은 일본을 통제할 힘이 없었고 그냥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무능한 나라였다. 모든 과정을 지켜본 전봉준 장군은 농민들의 희생을 막고 그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결국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명령한다. 


전봉준 장군의 단소

전봉준을 녹두 장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키가 녹두알같이 작아 얻은 별명이다.

 

 

1895년 3월 처형된 후 시신을 찾지 못해 제단과 허묘로 이루어진 전봉준 장군의 무덤이다.


체포된 전봉준


1894년 12월2일 길고 긴 투쟁 끝에 일본군에 붙잡힌 전봉준 장군은 붙잡힌 과정에 관련된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별장 이종록으로 별장이란 종 9품 무관직으로 조선 시대 지방의 산성,나루 등의 수비를 맡고 있었는데 일본군의 눈을 피해 그가 지키던 입암산성으로 피신한 전봉준을 신고하지 않고 숨겨줬던 인물이다. 

 

 

 

 

며칠 후 전봉준은 김경천(전봉준의 부하)의 집으로 피신한다.전봉준을 잡은 이에게 원하는 지역의 군수 자리를 준다는 말에 전라 감영 군관을 지내다 은퇴한 한신현에게 바로 밀고를한다. 믿었던 부하에게 배신당한 것이다. 김경천은 현상금은 커녕 사람들의 손가락질만 받고 이리저리 떠돌다 굶어 죽었다고 한다. 체포된 걸 방으로 붙이니 수많은 백성들이 원통한 현실에 땅을 치며 통곡했고 그 후 서울로 압송된다.  

 

 

 

이 비석에 상반신만 새겨진 이유는 사실 다리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재판을 받을 때도 들것에 실려 재판을 받는다. 

 

서울 일본 영사관에서 취조를 받은 뒤 들것에 실려 이송되는 모습

 

전봉준 공초 (조서)

 

이 조서로 전봉준의  발자취를 알 수 있었다.

 

 

동학은 과거 잘못된 세상을 고쳐 다시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나선 것이다. 민중에 해독되는 탐관오리를 베고 일반 인민이 평등하게 대우 받도록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악한 정부를 고쳐 선한 정부를 만들고자 함이 무엇이 잘못이냐! 자국의 백성을 쳐 없애기 위하여 일본놈들을 불러들였나니 너희들 죄가 가장 중죄한지라 도리어 나를 죄인이라 이르느냐? 

-정봉준 공초 내용 

 

 

전봉준 장군의 최후

 

일본 정부의 양해를 얻어볼 것을 권고했으나 유혹을 뿌리치고 결국 일본군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지는 상황에서도 "올바른 도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하지 않으나 오직 역적의 누명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 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가 했던 마지막 말이다. 

 

그와 함께 한 동료들 

교수형에 처해진 손화중
효수형 당한 김개남

 

 

이후에 동학 농민의 잔여 세력은 계속해서 독자적으로 항일 운동을 하며 1919년 삼일 운동의 기반을 마련한다. 민주주의의 뿌리와 정신으로 남은 동학농민 혁명으로 그렇기 때문에 승리의 역사다 .

 

어찌 이름 있는 꽃만 아름답다 할 수 있겠습니까!  영웅들과 함께 이름 없이 사그러져간 수많은 녹두꽃들 그들을 마음속 깊이 기억하겠습니다.

 

 

 

 


4부 끝.

 

▼동학농민운동 관련 내용

 

☞ 무장포고문 in 동학농민운동 기포지/ 교조신원운동/선운사 마애불 비기(1)

 

전봉준 고부농민봉기(고부민란)/사발통문/ 고부군수 조병갑의 만석보사건 (2)

 

 황토현 전투 in 황토현 전적지 /동학농민운동 기념관/전주화약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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