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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전봉준 고부농민봉기(고부민란)/사발통문/ 고부군수 조병갑의 만석보사건 (2부)

by 짱신나^^ 2020.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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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39,40회]

 

오늘의 탐사지: 정읍시 고부면 

주제: 고부농민봉기 배경과 조병갑의 만행
출연자: 설민석 

 

 

 

고부농민봉기의 고장 

 

고부면 

 

동학혁명의 도화선의 첫 번째 불꽃이 된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난 곳이 바로 정읍시에 위치한 고부면이다. 

 

 

 

과거 고부는 정읍시만큼 큰 마을이었다. 인근 지역 쌀이 모두 모이는 곳이 고부였고 쌀이 모인다는 것은 돈이 모이는 지역이고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했고 정읍 보다 더 큰 세력의 고을이었던 '고부' 였다. 

 

 

 

 

고부가 정읍으로 편입된 이유는? 
 
일제 강점기 때 일제는 행정적 편의적인 이유라는 핑계로 민족 정기를 끊기 위해 지방 제도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고부군을 없애고 정읍에 편입시켜 버린다. 
 
▽아래 지도의 노란선이 호남평야이다. 

 

현재 정읍시 안에 위치한 고부면과 고부 위로 흐르고 있는 동진강을 보면 고부는 딱 호남평야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동진강을 젖줄 삼아 언제나 풍작을 이루는 황금 곡창 지대로 여름엔 초록빛 가득한 대초원이 되고

 

 

가을이 되면 거대한 황금 물결이 출렁이는 호남평야 

 

 

 
항상 풍년이 펼쳐지는 옥토에서 종사 짓는 농민들은 행복해야 했지만 많이 생산한 만큼 많이 수탈 당한 농민들은 일을 열심히 할수록 더 괴롭기만 했던 현실 속에 살았었다. 호남 평야 지역에 부임한다는 것은 모든 탐관오리들의 꿈이었다. 
 
 
 
 
 
<참요>란?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퍼졌던 민요의 한 종류로 주로 시대의 변천상이나 정치적인 징후를 암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새야 새야 파랑새야> 의 의미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첫 번째 의미

파랑새가 의미하는 것은 파랑-> 팔왕->전봉준으로 여덟 팔 임금 왕이 합쳐져서 전봉준의 전(온전할 전)자가 되니

 

팔왕은 전봉준 녹두장군을 의미하고 파랑새는 그를 따르는 민중을 지칭해서 동학군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만류하는 내용이라는 추측이 있다. 

 

두 번째 의미

파랑새는 외세(청나라 or 일본)를 의미하고 녹두는 전봉준 장군을 의미 청포는 민중을 의미하는 것으로 

 

청나라, 일본아 

 

 

녹두꽃이 떨어지는 전봉준 장군의 동학농민혁명이 외세에 의해 실패하자 많은 민중이 눈물을 흘렸다는 동학농민혁명의 말로를 노래한 곡이다. 

 

 

 

탐관오리의 상징 
고부 군수 조병갑
 
양반 집안의 서자로 태어난 조병갑은 '서자'라는 콤플렉스는 있었지만 그의 일생은 탄탄대로였다. 흥선대원군 집권 시절 영의정을 지냈던 조두순의 조카였던 조병갑 잘나가는 집안 덕에 천안 군수로 부임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사고가 일어난다. 수감 하던 죄수를 이송 중 죄수가 탈주 해 버린다. 직무유기+근무태만=파직된다. 조병갑은 의금부로 끌려가 곤장 맞고 직위도 강등된다.
 
파직 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1884년 당시 충청 감사가 고종을 만나 조병갑을 다시 중용할 것을 건의하고 고종은그렇게 조병갑을 다시 불러들인다. 그리고 다시 지방 사또로 발령이 된다. 그러나 조병갑은 발령 받을 때마다 부임을 거부한다. 부임지가 경상, 강원 지역이어서 척박해서 수탈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발령 난 부임지가 또 다른 곡창 지대 김해로 발령을 받는다. 수탈 거리를 찾아 김해로 가지만 조병갑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결국 호남 평야 최고의 노른자 고부 군수로 발령을 받는다. 조병갑은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는데도 뇌물과 인맥으로 얻어낸 관직이었다. 
 
 
조병갑의  대표적인 악행
 
만석보 사건 
 
동진강 유역 배들 평야에 농민들은 농사를 짓고 살았다. 왼쪽으로 정읍천이 흐르고 있다.

 

고부사람들은 정읍천 위쪽에 보를 쌓고 물을 대서 평야에 농사를 지었다. 그 물만으로도 만석이나 되는 농사를 지을수 있다고 해서 만석보라고 불렀다. 

물길을 막아 만드는 작은 댐인 '보'(=뚝)

 

 

그런데 1892년 정읍에 부임한 조병갑이 정읍천 밑에 또 다른 보를 쌓으면서 역사가 바뀐다. 기존의 만석보 만으로 농사에는 문제없는 상태인데 이미 보가 있는 상태에서 기존의 만석보 밑에 똑같은 것을 또 만들고는


 

원래 보에 가둔 물을 사용하면 물 세를 지불해야 하는데 새로 보를 짓는 대가 품삯도 주고 첫해의 물 세도 면제라고 해 놓고 품삯도 주지 않고 첫 해부터 물 세를 받기 시작한다. 
 
 
조병갑 만행 리스트 

 

 

 

고려 시대부터 농업을 장려하며 농민에게 나누어 줬던 개간지인데 세금 면제는 커녕 개간지까지 뺏어간 조병갑은이런 식으로 강탈한 재물이 2만냥 지금 가치로 14억 원으로 추정된다.  

 

부임하자 마자 아버지 조규순의 영원히 세세 손손 잊지 말자(영세불망비) 짓기 위해 걷은 세금만 1000냥 현재 가치 7천만 원으로 추정된다.

 

 

또한 일반적으로 선정을 베푼 관리를 기념하여 세우는 선정비를 백성들을 수탈 해 자신의 선정비까지 세운 조병갑이었다. 

 

경상남도 함양읍에 있음

 

정상적인 경우라면 상급 관리 뿐 아니라  이런 일을 보고해야 되는 암행 어사 마저 똑같이 부패했었다. 어느 하나 의지 할 곳 없었던 백성들이었다.  
 
 
 
 
 
개혁의 길을 선택한 전봉준
 
1893년 흉년에 전염병까지 겹쳐 궁지에 몰린 농민들의 생활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도 가혹하게 부과된 만석보의 물 세로 인한 비참한 현실을 고부 군수에게 알리기로 하고 두 차례나 고부 관아로 찾아가 뜻을 전달한 100여 명의 농민들이었다. 
 
그때 농민들의 선봉에 있었던 전봉준의 아버지(전창혁)와 농민들은 조병갑을 찾아가 농민들의 현실을 고했으나 몽둥이찜질로 농민들을 쫓아낸다. 주동자라는 이유로 고문까지 받게 된 전창혁은 심한 곤장을 맞은 뒤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이 전봉준에게 동학 농민혁명의 불씨가 되었을 것이다. 
 
전봉준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현실을 개혁하는 길을 택한다. 
 
 
 
 


사발통문
 
전봉준을 필두로 한 동학교도들은 봉기의 뜻을 담은 결의문 <사발통문>을 작성하여 주모자를 알 수 없게 만들기 위해 사발을 뒤집은 원에 참여자의 이름을 적는다.

 

그렇게 고부농민봉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말목장터와 감나무 
고부농민봉기가 시작된 곳

 

고부농민봉기가 시작되기 전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이 모여 <사발통문>의 계획을 실현한 동학농민군의 첫 집결지 말목 장터이다. 부안.태인,정읍으로 가는 삼거리에 형성된 시장인 말 목장이 있던 자리이다.
 
 
말목장터로 집결한 이유는?
 

 

각 지역에서 고부 관아로 가는 길목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전봉준 주변의 인원으로는 고부 관아를 치기에는 부족했으므로 동학 대접주(책임자) 중 한 명인 손화중(마애불의 비기를 꺼내간 인물)을 찾아간다. 손화중은 당시 전라도에서 최대의 동학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인물로 전봉준은 세력 확장을 위해 손화중을 이끌어 내려 했으나 시기가 맞지 않는다고 결렬됐다. 
 
 
 
동학동민운동의 배경
고부농민 봉기 
 
그러나 탐관오리 조병갑의 처단을 미룰 수 없었던 전봉준은 1894년 1월 10일 새벽 말목장터에 모인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은 조병갑의 비리를 낱낱이 들춰내며 그를 몰아내야 함을 진정성있게 설득하여 군중의 마음을 움직여 고부농민봉기가 시작된다. 
 
성난 군중들은 고부 관아로 몰려갔으나 조병갑은 이미 눈치를 체고 변장을 한 후 도망친 뒤였다. 고부 관아를 점령 한 후 제일 먼저 창고에 쌓인 곡식을 가난한 백성에게 나눠준다. 이후 말목 장터를 지위 본부로 삼아 장두청을 만들어 진을 쳤다. 
 
 
 
 
고부농민봉기가 장기화되자 신임 군수 박원명을 임명하는데 상대적으로 온화한 성품의 군수였다. 동학농민군들을 위로하고 관리로서 소통하려 노력하며 농민들을 위해 잔치까지 벌이는데  군수의 호의적인 행동에 농민들은 동요했고 농민들은 그 즈음에 화해를 하려 했고 하나 둘 씩 해산하게 되었다. 
 
 
농민군 해산 
 
그 이유는 
지방에서 벼슬 길에 오르지 못한 양반인 향반 출신이 대다수였는데 이들에게 가장 불명예는 역적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자신들을 수탈 했던 조병갑은 몰아냈고 봉기가 마을 바깥까지 가게 돼서 역모의 누명을 쓰는 것이 꺼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학농민군들 중 동학교도들은 적고 원한을 가진 농민들이 많아서 탐관오리 조병갑을 몰아낸 것에 만족하며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
 
새로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온다. 안핵사란 조선 후기 지방에서 발생한 사건 처리를 위해 파견한 임시 관직 조서관으로 고부농민봉기의 진상 조사를 위해 파견되었던 안핵사 이용태는 처음에는 민란이 벌어지는 동안 숨어서 눈치만 보다가 화해 모드로 전환 될 때쯤 수백 명의 군졸을 이끌고 당당하게 들어온다. 그리고는 신분제를 흐리는 반란이라는 명분으로 주모자를 찾아내려고 마을 사람들을 구타하고 심지어 부녀자들을 겁탈하기까지 하는 파렴치한 악행을 저지른다. 전봉준이 잡히지 않자 전봉준 집에 불을 지르라고 지시한다. 
 
 
 
 
 
 
다시 조직화 된 농민군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전봉준은 사람들을 모으기로 결심 1894년 3월 무장 기포 단계에 이르러 전봉준 주변에 모인 인원은 4000명에 이르렀다. 그렇게 모인 사람은 조직화가 되어 꾸려진 군대였다. 총사령관 전봉준 부사령관에는 손화중과 김개남이었다.
 

 

 
안핵사 이용태는 고부농민봉기를 국가 규모의 동학농민혁으로 키워서 파직 후 유배를 당했으나 고종의 신임을 받았는지 관직으로 화려하게 복귀 후 친일파가 되어 이완용 내각의 고위관료로 활동하고 일제 강점기의 시작이 된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에도 일조해서 현재는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친일파 이용태이다. 

 

 
 
조병갑의 말년은? 
 
전주로 도망갔지만 끝내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나 동학 운동이 1894년 1월 고부민란을 중심으로 1894년 12월 전봉준 장군 체포까지 약 1년 동안 전개되었다. 1895년 7월 이듬해 죄수의 형벌을 면제하는 대사령 공포가 있었다. 고종의 대사령으로 일 년 만에 석방된 조병갑은 승승장구해서 고등법원판사로 임명된다. 그리고 1898년 재판에서 만난 한 피고인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탄압의 주범이었던 조병갑이 동학의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 선고를 판결한 것이다.  권선징악이 뒤바뀐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2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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