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동학농민운동 기포지,무장포고문/ 교조신원운동/선운사 마애불 비기(1부)

by 365 ^^ 2020. 9. 10.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39회]

 

오늘의 탐사지: 전북 고창 동학농민운동 기포지-선운사

주제: 동학농민운동(=혁명)의 배경

출연자: 정유미, 김호중 

 

 

 

조선 최고 격동의 해 

1894년 

 

 

고종 31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청일전쟁 발발하고 정치,경제,사회에 걸친 갑오개혁을 실행하여 신분의 계급이 사라지고 동학농민운동까지 격변의 해였다.

 

 

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혁명으로 명칭 변경 

 

 

동학을 신봉하는 농민들의 반란이란 뜻의

 동학난

이라는 부정적인 명칭을 사용했고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도 반란군의 수괴라 칭하고 자손들도 불명예를 씻을 수 없었다.  2004년에 동학농민운동 참여자 등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그때부터

동학농민혁명

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동학 농민운동의 고장 전북 고창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 장군의 출생지가 고창이다. 

 

무장 동학농민운동 기포지

전라북도 기념물 제129호 고창

 

전라도의 한 지역이었던 무장에서 동학의 조직인 포(包)를 중심으로 하여 봉기(蜂起)를 일으킨 장소를 말한다. 그들의 기포지에서 항쟁 의지를 담은 무장 포고문을 발표한다. 

 

 


무장포고문 내용 

01234

 





동학이란?  동학 창시자는 경주 출신의 몰락 양반이었던 교조 최제우에 의해 만들어 졌고 1860년에 민족 종교 천도교의 전신이 동학인데 민간신앙,유교,불교,도교등을 융합해 서학인 천주교에 대항하는 동쪽에서 일어난 가르침이란 뜻의 민족 종교가 동학이다. 


동학 사상의 발전 단계
시천주 신분이나 계급을 초월해 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한다. 

 

사인여천 

동학의 중심 교리인 시천주 사상(사람을 하늘처럼 모셔야 한다.) 

 

인내천 이 점차 발전해 나가면서 '사람이 하늘이다. '

 

인내천 사상은 인간은 평등하다는 의미로 조선의 신분 제도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동학 혁명의 배경
정조의 죽음 이후 왕위는 11살 순조(조선 23대왕), 그 다음 왕은 8살 헌종에 이어 25대 왕 19살 철종(강화도령)까지 60년 동안 나이 어린 왕이 오르니 외척들이 득세하기 시작한다. 이들의 국정 농단은 고종 때까지 계속된다. 과거 시험 또한 형식일 뿐 합격자는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삼정의 문란
평민이 지던 세 가지의 세금 - 전정,군정,환곡의 세 가지가 있었는데 삼정을 악용한 부정부패로 인해 전 백성들은 고통 받고 있던 혼란의 시기 조선 후기였다.  
전정 농사짓는 땅에 매기는 토지세로 많이 가진 사람이 많이 내야 하는데 양반 지주보다 더 많은 토지세를 농민에게 부과하게 했다. 
군정 남자들의 병역 대신 (군포=옷감)을 남부하는 제도로 병역의무가 없는 어린아이에게 징수(황구첨정) 죽은 사람까지 세금 징수(백골징포) 등의 횡포로 농민들의 삶은 고통 속에 있었고  

환정(=환곡)의 문란 3,4월 흉년이나 보릿고개때 나라의 곡식을 대출해주고 추수할때 갚게 하는 것 (춘대추납)으로 원래는 농민구제가 목적인데 빌리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도 관리들이 강제로 대출하게 하고 그 마져도 좀먹은 쌀이었다. 그러고는 이자를 거두는 가을이 되면 높은 이자로 수탈 부패한 관리들의 탐욕으로 고리대로 변질돼 버린 환곡 제도는 가난한 농민의 삶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제도였다. 
이렇게 권력 있는 관리들의 수탈과 더불어 흉년에 따른 굶주림, 전염병에 따른 죽음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하고 고통스러웠다. 
이 시대가 60여 년간 이어진 세도 정치 기간이었다.

 

세도 정치의 부정부패 및 타락을 의미하는 세도로 변질되었다. 이렇게 안으로는 세도 정치 밖으로는 서세동점이라 

 

일찍이 산업화를 이룬 서양 열강은 개항을 요구하며 동아시아로 밀려 들었는데 첫 번째로 영국이 청나라의 문을 두드렸지만 아편 밀수입 문제로 무역을 거부했다. 그러나 아편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고 1842년 난징 조약으로 결국 청나라는 강제 개항을 한다. 1854년 옆 나라 일본까지 미국에게 개항된다.

 

서양의 침략 위협으로 대외적 위기감이 높아지면서 나라 안팎의 위기로 불안에 떨고 있는 그때 즈음 민족 종교가 등장하고 부정부패와 불평등에 반대하는 반봉건과 외세의 폭력적 침략에 반대하는 반외세의 민족 종교 동학이 탄생하게 된다. 

 

선운사

 

전북 고창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선운사는 577년 백제 위덕왕 때 세워진 이후 1500여 년 역사를 품고 있는 사찰이다.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
 

마애불은 자연 암벽에 조각한 불상이란 뜻으로 마애불의 복장(가슴 한복판)에 비기가 숨겨져 있다고 한다 .  

 

마애불의 가슴 한복판 복장에 숨겨진 미래를 예언해 놓은 비기(비밀스런 기록)는 

 

1820년 전라 감사 이서구가 기록을 꺼내보려다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치는 바람에 "이서구가 열어본다는 "는 대목만 보고 넣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애불의 비기를 꺼내간 사람이 있는데 바로 손화중으로 동학의 접주(책임자) 3인방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동학농민운동(=혁명)을 이끈 세 사람 중 한 명이다. 

 

 

 

비기의 전설은 '세상이 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는 내용으로 당시 이상 세계를 꿈꾸던 동학도들의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기를 열어볼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 1892년 8월 어느 날 동학 접주 손화중이 동학도 300여 명을 이끌고 마애불의 비기를 꺼내고 당시 동학이 천지개벽의 비결을 입수했다는 소문이 돌고 그 후 급격히 늘어나게 되는 동학도의 수와 함께 기대감도 커지게 된다. 
 

 

 

그 당시 18세 김구 선생이 동학에 입교한다. 동학 입교 전 본명은 김창암(입교 후 김창수) 이었고

 

 

동학농민운동(=혁명)에서도 맹활약 동학군의 선봉장이 된다. 김구 선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동학에 입교하면서 18세 김구는 입교 하자마자 접주(책임자)가 된다. 그래서 별명이 아기 접주였다. 

 
정감록이란?
 
무격신앙(민속신앙) 이라고 정도령이라는 인물이 나타나 새로운 세상을 열것이라는 조선 시대에 민간에 유포된 예언서였다. 

 

조선 후기 무속 신앙 같은 것들이 급격히 떠오른 이유는 흉년과 전염병 관리들의 수탈과 핍박으로 고통 받던 19세기 후반 조선의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현실이 너무도 힘들었던 것이다. 
 
이때 민간신앙 유교, 불교,도교 등을 융합한 민족 종교 동학이 만들어지고 사람이 곧 하늘이다. 평등 사상을 내세운 동학은 신분 제도의 굴레에 갇혀 고통 받던 백성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교조신원운동
 
삼례집회
1892년 동학 혁명 2년 전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를 여는데 동학에 대한 탑압 중지를 요구와 1대 교주 최제우(교조)의 원통한 죽음을 풀어달라(신원)는 교조신원운동이었다. 

 

 
신분제를 뒤흔드는 동학이 확산되자 지방의 관리들은 이를 지켜보지 않고 1대 교주 최제우는 사악한 종교로 백성들을 현혹했다는 이유로 처형한다. 이후 동학은 일체 금지되고 이단이라는 빌미로 탄압을 받기 시작한다. 
 
 
재산 몰수는 기본이고 마을에서 추방 당하기도 했던 동학도들은 삶의 터전인 마을에서 쫓겨난다는 건 사회,경제적 기반을 모두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궁지로 몰린 동학도들은 화전민이 되거나 유랑민이 되어 힘든 생활을 이어 나갔지만 이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동학은 더욱 확장되기 시작했다. 
 
 
 
 
 
 
수천 명 동학도들의 기세에 당시 전라  감사는 관할 지역 내에서 동학도들에 대한 수탈 금지를 약속한다. 이에 지방 관리를 상대로 올린 성과에 힘입어 임금인 고종에게 동학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기 위해 대표 40명을 뽑아 1대 교주 최제우의 교조 신원과 동학에 대한 탄압 중지를 요청하는 복합 상소(대궐 앞에 엎드려 하는)를 올린다. 
 
그러나 고종은 동학도들의 요청을 거부

 

 

보은 집회

 
오히려 주모자를 잡아 들이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이에 분노한 동학도들은 2대 교주 최시형의 명령 아래 1893년 충청도 보은에 교단의 중심 세력을 집결한다. 

 

이때 생긴 동학의 변화는 순수 종교집단 +탐관오리를 처벌하라 +척왜양창의  

 

 

이러한 슬로건을 내세운 정치적 집단으로 변화한 동학은 동학농민운동(=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그렇다면 동학 역사상 전봉준의 등장은 언제부터? 
 
 
1892년 동학도들의 삼례 집회 때 동학 탄압 중지 소장을 올려야 하는데 계속된 탄압으로 나서기를 두려워하던 동학도들 중에 앞장선 전봉준은 훗날 동학농민운동(=혁명)을 주도한  녹두장군 전봉준의 시작이었다. 
 

 

 

1부 끝

 

 

 

▼동학농민혁명 관련 내용

 

 ☞고부농민봉기(고부민란) (2부)

 

황토현 전투 in 황토현 전적지 /동학농민운동 기념관/전주화약 (3부)

 

우금치 전투와 전봉준 장군 단소 in 동학농민운동 기념관 (4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