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에서 '매국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이완용이다. 그는 처음에는 친미, 이후 친러를 거쳐 결국 친일파로 변절하며 조선을 일본에 넘기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한때는 조선의 유능한 관료로 인정받았지만, 그의 선택은 나라를 팔아 개인의 부와 권력을 누리는 길이었다. 한일병합의 주역으로 기록된 이완용의 삶을 되짚어보며,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고,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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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어린시절, 성장과정
이완용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6살에 천자문을 익히고, 7살에 <효경>, <소학> 등을 통달했다. 과거에 급제한 후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신학문을 습득하며 근대 교육에 매료되었다. 넉 달 만에 주미공사관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외교관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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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선교사에게 신학문을 습득하면서 근대적 교육 제도에 매료되고 넉 달 만에 주미공사관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곳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며 미국의 선진 문물을 접한 후 30대 중반에 귀국 고종의 친애를 받았다.
정치적 변절 (친미->친러>친일)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세월이 흘러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공사관에 피신시키고 아관파천의 성공 후 정계에서 급부상 한다. 그런데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로 잽싸게 친일파로 변절한다.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본에 최선을 다해 충성한다.
이완용의 친일 행적
- 을사늑약(1905) 체결 주도 –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김
- 정미7조약(1907) 체결 주도 – 대한제국 군대 해산
- 한일병합조약(1910) 체결 주도 –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데 결정적 역할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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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이 누린 부와 권력
이완용은 경성 최고의 현금 부자가 되었으며, 당시 금액으로 현금 자산만 현재 가치로 약 600억 원에 달했다. 또한 여의도 면적의 약 8배에 해당하는 광대한 토지를 소유했다. 광복 직전, 땅의 98%를 매각하여 현금화했고, 재산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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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의 최후와 장례식
1926년 2월 12일 사망한 이완용의 장례식은 조선인의 장례 중 가장 성대하게 치러졌다. 당시 조선총독 사이토를 비롯한 1,300여 명이 조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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