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요시다 쇼인 정한론, 존왕양이 조선 침략 발상의 근간 (미국 따라한 죄?!)[벌거벗은 세계사 36-1]

by 365 ^^ 2022. 3. 3.
반응형

일본은 이전부터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는 모습을 보여 국제적인 질타를 받고 있는 상태였고 최근에 또 한번 논란이 되고 있는 사건인 조선인의 지옥섬 군함도를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시키려고 했었고 제2의 군함도 사태인 사도광산이 있다.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하는 이유 (일본이 독일처럼 사과 할수 없는이유)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하는 이유 (일본이 독일처럼 사과 할수 없는이유)

일본은 2번의 원폭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2차 세계대전에 패망하면서 전범 처리 재판을 진행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전쟁 속에 위안부, 가미카제, 식민지 원주민 대학살, 난징대학살, 생

jangane.tistory.com


사도광산은 태평양 전쟁 당시 전쟁 물자를 캐는 광산으로 활용되었던 곳으로 약 1200여 명의 조선인을 강제 징용한 곳을 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고 하고있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메이지 유신 배경

일본의 군국주의, 제국주의 뿌리인 메이지 유신 시작점
일본의 이런 행보는 일본의 근대화 시작점인 메이지 유신때부터이다. 메이지 유신은 약 20여년간 추진되었던 부국강병 산업 육성 등 서양을 따라가는 문명 개화의 시기를 말한다.

 

메이지 유신이 탄생한 곳 미국 국방의 요충지 버지니아주이다. 1607년 영국인 이민자 정착지로 미국 역사의 시작점이 된 곳으로 미국 최대 해군기지가 있는 항구도시 노퍽이 있고 미 국방성 펜타곤이 위치한 곳이다.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출발한 함선으로부터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다. 

 

기사 속 인물은 미.해군 제독 메튜 페리라는 인물

 

미국의 일본 침공

페리제독은 버지니아에서 출발해 장장 8개월의 긴 항해 끝에 인도양 대서양을 지나 1853년 7월 지금의 도쿄만 입구인 우라가항에 진입한다. 이들이 일본에 간 목적은 일본을 문명화를 하겠다는 명분이었다. 

미국의 군함은 무력 시위를 하며 일본 앞바다로 빠른 속도로 접근해 왔다. 미국의 증기선을 처음 본 일본인의 반응은 그림으로 나타난다. 

 

검은 연기를 뿜으며 대포까지 정착한 약 2500톤의 증기선을 악마, 괴물등의 낯선 두려움을 표현

 

페리제독은 일본 도깨비와 비슷하게 그렸다. 일본은 페리제독이 상륙했던 지역에서는 흑선 개항을 기념하는 축제도 열리는 요코스카와 시모다 

 


당시 일본 상황 (에도 막부 시대)
당시 일본은 군부 시대로 사무라이가 지배하던 막부시대였다. 막부는 '장군의 진영'이라는 뜻으로 12~19세기까지 존재한 일본의 무사 정권이다. 페리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에도막부 시기이다.  에도 막부의 구조는 쇼군(대장군), 다이묘(영주)가 같이 공존하던 시대로 중앙 막부+지방자치 번= 막번 체제였다.

 

 

가장 위 권력에는 천황이 있었으나 천황의 권력은 그렇게 크지 않았고, 실제 권력은 막부가 중심이었다. 단 쇼군의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던 천황은 막부가 통치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나라가 어지러워 질 경우 그 권력을 다시 천황에게 내놓아야 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막부에 더 위협적인 존재는 다이묘 영주들이었다. 다이묘 이들은 막부 밑에 있었지만 번의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영주였고 그중 몇몇은 막부 몰래 서양과의 교역 등을 통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막부 체제가 흔들리는 것을 막고자 서양과의 교역을 금지했다. 그러나 딱 한 곳 일본의 유일한 서양 교역 창구였던 서양과 일본을 연결해 준 인공섬 나가사키 데지마 상관에서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허용했다.  이렇게 에도 막부는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1852년 일본은 네덜란드로 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미국 증기선이 곧 일본에 도착한다고 네덜란드가 미리 정보를줬음에도 불구하고 막부는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다. 13세기 강대국 몽골 원나라의 침입 이후 해외 침입이 전무했던 일본은 제대로 된 군함도 없었고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미일화친조약 
서구 열강들의 뒤를 쫓아 아시아 시장으로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당시 서양 제국들에게 동아시아는 침략의 대상이었다.  미국이 아시아로 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석탄, 물 식량등을 제공할 보급기지가 필요했고 그 보급기지로 일본을 선택했던 것이다.  군사력의 차이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서 가나가와에서 미일화친조약을 맺게 되었고  이것이 일본이 서양과 최초로 체결한 조약이다.  

미일수호통상 조약
1854년 3월 30일 쇄국정책을 펼쳤던 에도 막부는 이 조약으로 미국의 두 개의 항구(하코다테, 시모다 항)를  미국의 개항지로 개방한다. 그러나 미국의 요구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4년 만에 다시 돌아온 미국은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무역을 하자고 요구한다. 

이때 미국은 청 나라 관원이 미국 배의 선원을 체포하면서 생긴 갈등으로 제2 차 아편전쟁의 계기로 번진 사건을 언급하면서 청나라 처럼 되지 않으려면 빨리 우리와 조약을 맺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강요하였다. 결국 1858년 7월 29일 또 다시 미 일 수호 통상 조약을 맺게 된다.

 

미일수호통상조약 주요내용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막부에 대한 불만이 커지게 되었다. 막부는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을 때 천왕은 반대를 했었고 천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막부는 조약을 맺어 벌임으로써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이로 인해 막부를 비난하기 시작한 사무라이들이다.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

 

막부가 맺은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그동안 쌓여있던 불만이 독단적 개항을 빌미로 터지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이 서양 식의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외침략을 통해 나라의 힘을 기르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당한 만큼 똑같은 방법으로 해보자는 것이 해결책이었다. 이 방법을 제시한 인물이 요시다 쇼인(1830~1859)이었다.  

 

아베 전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 유수록의 내용


강력한 군사력을 갖춰서 양만큼 강해져 해외 정보를 해야한다고 주장한 책이다. 이 사상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쇼인의 글은 훗날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정당화 논리인 정한론, 즉 일본을 서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한반도를 점령해야 한다는 논리와 함께 훗날 동아시아 전쟁을 정당화하는 대동아공영 논의 근거로 일본의 식민 지배 논리의 토대가 되는 사상이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
일본의 군국주의를 이끈 두 인물로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던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청일 전쟁 당시 제 1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로 이후 조선의 침략 전쟁을 주도하던 인물이다. 

 

 

존왕양이 운동 

쇼인의 또 다른 주장은 메이지 유신을 이끄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미국과의 불평등 조약 이후 막부에 불만이 커지게 되자 사무라이들 사이에 하나의 사상으로 막부를 타도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천황의 뜻을 받들어서 서양 세력을 무찌르자는 존왕양이 사상이 일어나고 존왕양이 운동이 시작된다.

 

(안세이 대옥 1858~1859)  

이렇게 존왕양이 세력은 천황을 구심점으로 힘을 합쳐 막부를 공격한다. 이에 막부세력은 강경하게 자신의 반대 세력을 모두 숙청을 하고 쇼인도 이때 숙청된다. 이때 사무라이들 100여명이 목숨을 잃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막부에 대항하는 막강한 세력이 두 지역을 중심으로 등장한다. 첫 번째 지역은 아베 전 총리의 정치적 고향인 조슈번이고 다른 한 곳은 사쓰마번(=가고시마현)으로 제2차 세계대전때 가미카제 특공대의 기지였던 곳이다. 

 

 

서양세력과 무력충돌


프랑스와 충돌 시모노세키 전쟁
조슈번의 경우 1863년 자신의 앞바다를 지나가던 프랑스 함대를 일방적으로 공격하면서 프랑스와 죠슈번은 무력충돌이 생기고 이것이 시모노세키 전쟁이다. 프랑스 사람에 대한 포격으로 (1863~1864) 프랑스, 영국, 미국, 네덜란드 연합군과 조슈번 사이에서 일어난 무력 충돌로 조슈번은 패배한다. 

 

영국과 충돌

영국인 찰리 리처드슨 무역상을 쓰시마번의 사무라이들이 죽이는 사건이 벌어진다. 영국인은 영주가 지나가는 모습을 말을 타고 똑바로 쳐다보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에 영국은 전함 7척과 병력 4000여 명을 출동시켜 사쓰마 번의 증기군함 3척을 불태워 버렸다. 이틀동안 이어졌던 포격전으로 사쓰마번의 곳곳이 파괴되었다.  이들은 오랑캐를 무찌르려는 전쟁을 일으켰다가 공격당하게 된 상황이었다. 

 

 

서양문물 적극 수용
이에 오랑캐를 무찌를 수 없다고 판단해 이를 받아들여 서양의 군사력으로 막부를 처단하기로 결정한다. 그때 부터 적극적으로 서양의 문물과 무기를 받아들인다. 먼저 서양식 진법으로 군사 훈련을 도입하고 서양 무기 상인들이 다니는 나가사키에서 무기와 선박 및 최신식 무기를 도입하고 조슈-사쓰마번의 사무라이들을 영국으로 몰래 유학을 보내게 되고 그 중의 한 명이 이토히로부미이다. 

막강한 서양식 무기와 인재로 힘을 기른 조슈-사쓰마번은 힘들 길려 막부에 대항하고 막부는 이에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 일부를 돌려주면서 반대파 세력을 잠재우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회유책에도 조슈-사쓰마번은 공격을 감행해 1868년 존왕양이 세력은 교토를 포위하여 권력을 잡는다. 

 

[36-2]

메이지 유신 뼛속까지 서구화~ (일본의 제국주의,군국주의 흥망성쇠 역사)

 

메이지 유신 뼛속까지 서구화~ (일본의 제국주의,군국주의 흥망성쇠 역사)

↓메이지 유신 배경 요시다 쇼인 정한론, 존왕양이 조선 침략 (36-1) 왕정복고-> 메이지 유신 시대 시작 시모노세키 전쟁 후 천왕이 천 년간 기거하던 교토를 떠나 도쿄 입성하면서 왕정복고 : 1868

jangane.tistory.com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