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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메이지 유신 뼛속까지 서구화~ (일본의 제국주의,군국주의 흥망성쇠 역사)

by 365 ^^ 2022. 3. 3.

↓메이지 유신 배경 

요시다 쇼인 정한론, 존왕양이 조선 침략 (36-1)

 

왕정복고-> 메이지 유신 시대 시작
시모노세키 전쟁 후 천왕이 천 년간 기거하던 교토를 떠나 도쿄 입성하면서 왕정복고 : 1868년 1월 3일 애도 막부를 폐지하고 천황 중심의 새 정부 수립을 선언한다. 이렇게 260년간 지속된 에도 막부시대는 그들이 지배했던 존왕양이 사무라이들에 의해 무너지고 사무라이들이 세운 정권이 바로 메이지 유신이다. 

 


메이지 유신 정부는 천황 중심의 강력한 국가를 만드는 데 주력한다. 개혁의 중심에는 천황이 있었고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을 하나로 결집하기 시작한다.  이전의 각 번의 자치적 운영체제에서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 '현'으로 개편된다. 그리고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는 중앙집권 체제와 온 세상이 천황의 한 핏줄이라는 '만세일계' 사상을 강조하면서 천황중심의 시대가 완성된다   

 

 

메이지 유신 개혁

외모 변화

이렇게 천황을 중심으로 서양을 따라 외적인 모습부터 바꾸기 시작한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외적 변화만이 아니였다. 일상의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한다.  

 

천황의 서양식 의복 착용 모습(불과 1년밖에 차이가 나이 않는 복장)

 

 

육식문화 정착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식으로 바꾸려고 한 것 중에 가장 논란을 불러 일으킨 문화는 육식문화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뼛속까지 서양인이 되고자 했고 그래서 서양인의 음식까지 똑같이 먹기 시작한다. 일본은 675년에 불교를 국교화 시키면서 농경 국가이기에 가축이 중요했던 일본 데무 천황이 육식 금지령을 선포했었다. 

 

서양인과 일본인의 체격차이


그러나 메이지 유신이후 국민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육류 섭취를 권장했다. 고기를 먹인 이유는 서양인에 비해 체구가 왜소했기 때문에 그 원인이 육식에 있다고 판단해 육식을 권장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육식으로 적응하기 위해 일본식 전골에 고기를 추가해서 끓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일본식 쇠고기 전골 메이지 유신의 산물 스키야키이다. 그 결과 도쿄에 처음 문을 열었던 스키야키 가게가 1870년대 말에는 500 여 군데로 확장될 정도로 일본인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서양문명을 배우자
일본은 이렇게 천황을 중심으로 서양식으로 바꿔나가는 작업을 하게 되고 1871년에 관료 46명, 수행원 18명, 유학생 43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꾸려 미국과 유럽 각국으로 보내게 되고 이들이 메이지 유신을 이끈 주요 인물들이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정부의 고관을 차지했던 다섯 명이다.

 

메이지 유신을 이끈 주요 인물들

 

이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 12개 나라를 1년 10개월 동안 사찰한다. 그리고 영국제 철도 기관차, 군함, 대포를 수입한다.

 

-철도 산업 본격화
서양의 증기기관차에 충격을 받아 과거 막부와 번이 갖고 있던 토지세 징수권을 정부가 독점을 하게 되고 곧바로 산업에 투자해 철도 산업을 본격화해서 1872년 최초의 상업용 철도를 개통, 그 이후 교토와 오사카 고베를 잇는 철도를 개설하게 된다. 이렇게 개항장과 중심도시를 연결시켜나가면서 운송업을 손쉽게 만들기 시작한다. 

 

 

-군사공업의 급발전

철도산업의 개발은 광산 개발도 같이 발전 시켰고 더 많은 제철소와 방적 공장, 조선소가 생기며 군사 공업도 급속도로 성장한다. 그때 만들어진 기업중 미쯔비시 기업이 있는데 군함과 전투기 생산으로 군수 산업을 뒷받침했고 1876년에 미쓰이 은행을 설립, 광업, 은행, 무역에 진출한 기업이다. 

 

-군사제도 재정비
또한 1871년 메이지 유신 이후 영국 해군교사단의 수장으로 온 한 인물이 체계적으로 해군 교육 제도를 재정비하면서 정부는 안밖으로 서양문물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무라이들의 불만 증가
그러나 이러한 발전을 못마당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천황 아래는 모두 평등하다고 하니 사무라이들의 특권이 사라지면서 불만이 쌓이기 시작한다. 사무라이 특권 중의 하나가 바로 군인이 될수 있는 특권이 있었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 누구나 할수 있게 된 군인이었다.  또한 이전에는 칼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소지권과 즉결 처분이 가능한 특권이 가능했는데 메이지 유신이후 사무라이의 칼 소지권을 빼앗아 버린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다. 

 

쇼윈의 정한론 부활
이에 사무라이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잠재울 방법으로 조선과의 전쟁을 주장했다.  쇼윈의 정한론이 부활한 것이다. 자신이 사절단으로 조선을 도발할 테니 그를 명분 삼아 전쟁을 일으키자는 것이었다. 내란이 폭발하기 전에 그 에너지를 조선으로 타킷을 변경한 것이다.

 


세이난 전쟁 (1877년)
그러나 이를 반대하던 세력으로 조선의 침략은 무산이 되었고  전쟁을 기대했던 사무라이들은 다시한번 불만을 품게 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휘하의 병력을 데리고 고향인 가고시마로 낙향한다.  그곳에서 군사를 양성한 후 1877년 결국 반란을 일으킨다.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정책을 동조하지 않던 사이고 다카모리와 사무라이들이 일으킨 일본 최후의 내전으로 정부군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사이고 다카모리의 병력은 패배하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할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일본의 첫번째 침략 전쟁 대만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 논쟁으로 혼란에 빠진 일본은 내부 결속을 위해 결국 조선 침략 전쟁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신식무기와 군대 체계를 시험하기 위해 일본의 첫 번째 침략 전쟁 목적지는 대만(=타이완)이었다. 

1871년 독립 국가였던 지금 일본의 오키나와인 류큐왕국은 일본과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던 왕국이었는데 어느 날 류큐 왕국 백성 66명이 대만에 표류하게 된다. 그러나 류큐 왕국 백성 66명 중 54명이 대만 현지인에 의해 살해 당한다. 당시 대만은 청나라가 통치하던 때였고 일본이 청나라에 이 사건에 대해 항의하자 청나라는 원주민들은 자신들과 상관이 없다고 말하니 일본은 이를 기회로 류큐 왕국을 일본으로 병합시킨 후 대만에 대한 전쟁을 준비했고 1874년 일본은 3000여 명의 병사를 투입해 대만을 침공에 나선다. 오키나와는 일본에 병합된지 불과 143년 밖에 되지 않았다.   

 

이 그림은 미국의 페리제독이 말했듯이 대만 침공후 원주민에게 자신들의 옷을 입히면서 문명화되지 않은 나라를 문명화시켜준다는 침공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그림


당시 청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두고 프랑스와 대치 중이었기때문에 대만을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고 청나라 '변경'에서는 회교도의 반란도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청나라는 일본에 약 50만 냥의 배상금을 지불 (약 67만 엔)하면서 마무리된다.    

 

조선 침략 강행 

일본은 이 전쟁을 통해 전쟁을 하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쟁을 통해 돈을 받으면 국민의 삶도 부강해질수 있다고 선전하면서 군인들을 모집했고 대만 침공 후 일본은 미뤄놨던 숙원 사업인 조선 침략을 감행한다. 

 

 



운요호 사건
1875년 대만을 침공한 지 1년 됐을 무렵 일본은 운요호 군함을 강화도 앞바다로 보내게 된다. 일본이 미국에 당했던것과 같이 조선에 통상 교역을 요구하게 된다. 일본은 무단으로 조선에 상륙을 시도했고 조선은 자기방어 차원에서 조선군은 일본을 향해 포격을 했다.

 

강화도 조약

교전 끝에 35명의 조선인이 살상과 약탈이 자행되었고 일본은 이것을 빌미로 6개월 뒤 일본의 함대 6척을 이끌고 와서 강화도 해상에서 대포로 위협을 했다. 결국 무력 침공으로 일본은 조선과 통상 조약을 체결한다. 조약 또한 미국에 당했던 불평등 조약과 동일하게 체결하였다. 쇼윈의 정한론이 강화도 조약을 기점으로 구체화되고 실현된 것이다. 

 

미국에 당했던 데로 똑같이 불평등 조약 체결.

 

제국주의, 군국주의의 필요성

일본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근간이 된 정한론은 일본이 서양처럼 부국강병을 위해 전쟁을 선택했던 것이다.  진정한 전쟁 국가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전쟁은 이로움을 준다는 군국주의 정신이 필요했다. 국가와 천왕의 목표가 곧 일본 국민 개인의 목표인 것처럼 받아들이도록 했고 자연스럽게 군국주의 사상을 주입받은 일본 국민들은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는 일본의 군국주의의 절정을 맞이하게 된다. 

 

청일전쟁
1894년 대만 침공때 맞붙었던 청나라와의 결판은 조선에서 다시 맞붙게 되고 이것이 청일 전쟁이다. 결과는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전함의 평균 속도도 훨씬 빨랐고 일본의 속사포 공격에 청나라 함대는 침몰되거나 파손되면서 청나라는 대패하게 된다. 

 

청일 전쟁 주력 무기
1875년 프랑스와 독일 스웨덴을 순방하며 300정의 소총을 가지고 귀국 후 분해해서 연구한 후 1880년 일본 최초의 자국산 제식 소총인 무라타 소총을 만들게 된다. 1880년~1886년까지 약 10만정 생산되었고 1889년 연발총으로도 만들어진 무라타 소총은 청일 전쟁 주력 무기로 사용되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이 얻은 것은? 
일본의 압승으로 끝이난 이 전쟁으로 배상금과 함께 청나라의 영토인 랴오둥반도와 대만 펑후섬을 넘겨받게 된다. 그리고 청일 전쟁 후 받은 배상금은 약 2억 3천만 냥으로 이것은 당시 일본 1년 예산의 약 4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전쟁 배상금에 맛을 들인 일본은 이제 국민들까지 합심해 일본 정부의 대외 팽창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러일 전쟁 준비

그러나 독일, 프랑스, 러시아 삼국 간섭으로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다시 반환하게 되면서 랴오둥반도 반환을 주도했던 러시아와의 전쟁이 국민 사이에 공론화되었고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게 된다. 그러면서 일본의 군사비를 늘리기 시작했고 국가의 모든 전력을 군사비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국가 재정지출의 80%

 

러일 전쟁 승리

하지만 전쟁 비용을 내부에서 모두 감당할수 없던 일본은 외국 자본까지 도입해 약 14억 엔의 빚까지 지게 된다.  1904년 일본은 막대한 군 장비를 투입해 러일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막대한 전력을 쏟아부은 러시아와의 전쟁은 약 1년 만에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다.

 

포츠머스회담
일본은 전쟁을 계속할 능력과 재정이 고갈되서 1905년 미국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와 회담을 추진한다.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러일 전쟁 종결을 위해 미국 대통령 중재로 열린 회담이다. 그러나 전쟁 배상금 지급 조건에서 난항이 발생하면서 이를 계기로 국제 여론마저 일본에 불리하기 시작하면서 전쟁 배상금 없이 사할린 남부와 대한제국 지배권을 받고 마무리하게 된다. 

 

 

러일전쟁 후 상황
그러나 배상금을 받지 못하고 돌아온 것에 대한 불만으로 일본인들은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은 당시 예산의 7년치에 해당하는 약 19억 엔의 전비를 사용했고 게다가 8만여 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했는데 희생의 대가가 너무 작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전비 충당을 위해 각종 전쟁 세금을 부담하고 있던 일본 국민들은 전쟁 배상금없는 납득할수 없는 조약 내용에 분노했다.  

 

제국주의 클럽에 일본이 끼어드는 모습을 풍자

 

1910년 한일병탄 조약 
러일 전쟁을 끝낸 일본은 1910년에 한일 병탄조약을 통과시키면서 조선은 일제 강점기로 들어가게 된다. 마침내 일본은 페리에 의해 시작된 불평등 조약을 완전한 평등 조약으로 개정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 자발적 참전

그리고 일본은 자발적으로 더 전쟁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1914년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영일 동맹을 맺고 있었던 일본은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선포하게 되는데 당시 일본의 정치가이지 원로 이노우에가오루는 전쟁 참여를 적극적으로 찬성했고 영국, 프랑스 등 협상국에 가담하여 독일과 전쟁을 치르고 동아시아에서 몰아냈다. 

 

 

1차 세계대전 후 일본 경제 호황

전쟁 후 일본은 영국 미국에 버금가는 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독일이 지배하던 태평양 섬인 남양군도와 중국의 산둥반도를 지배하게 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 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일본 경제였다. 유럽 상품을 대신해 일본 면직물의 수출이 증가하게 되면서 무역 및 일본의 해운업, 조선업은 호황을 누리게 된다. 철강업, 화학공업, 전력사업등 중화학 공업의 발전으로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공업 생산액이 농업 생산액을 앞지르기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 참전 

1차 세계대전후 재정위기를 극복한 일본은 미쓰비시 기업 등을 통해 제로센 전투기를 제작하며 제 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하게 된다. 개항 초기 일본은 서양 세력의 침략을 막기 위한 군비 확충을 주장했으나 자기방어가 가능해진 19세기 말부터는 대외 팽창 정책을 선택하게 된다. 

 

제국주의,군국주의의 말로
일본은 스스로 선택한 전쟁으로 일본의 군국주의를 탄생시켰고 일본에 의해 약 3백만 명의 자국민과 약 2천만 명의 아시아인이 죽고 한반도와 많은 국가가 희생을 당하게 된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메이지 유신 이후로 쌓아 올린 전쟁국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전쟁으로 흥하여 전쟁으로 망한 일본
일본의 선택으로 맞이하게 된 것은 세계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전에 투입된 핵무기로 인한 참혹한 패망이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으로 지옥으로 변한 일본의 두 도시 시로시마와 나가사키, 그리고 1947년 새로 시행된 일본의 새 헌법에는 일본은 이제 전쟁을 영구히 포기하고 육해공군의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 것도 명시하게 된다.

 

 

일본의 끝나지 않은 전쟁 야욕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본에는 군국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시간이 흐르고 일본의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군대 보유 금지와 교전권 포기 원칙은 무너진 상황이다. 이미 막강한 전력을 보유한 일본의 군사력은 불안정한 아시아 정세속에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쟁에 몰입하며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던 메이지 유신시대부터 과거 전쟁을 통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해왔던 일본이기에 한반도를 포함해 전 세계가 진장을 늦출 수 없는 상태이고 긴밀한 국제 정세를 통해 계속 지켜봐야 할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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