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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남이섬 속 남이 장군 혜성과 함께 사라지다. (진짜 무덤은 어디에?)

by 365 ^^ 2022. 4. 19.

남이섬은 한류열풍으로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섬이지만 남이섬의 이름이 남이 장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이 않다. 남이 장군은 세조 말의 인물이다.

 

겨울 연가로 유명한 남이섬

 

남이 장군은 누구? 

남이 장군은 17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당시 무과 급제자 평균 연령이 30세였기에 17세는 상당히 빠르다고 볼수 있다.

 

남이 장군 이력

남이 장군은 권람의 권력가의 딸과 결혼했다. 권람은 세조 계유정란 이후 정난공신1등, 세조 즉위 후에는 좌익공신 1등의 권세가로 남이에게 대단한 후광으로 작용을 했을 것이다. 남이의 할머니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로 태종의 외증손에 해당하는 인물로 남이의 가문도 좋았다. 

 

 

19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여진족 정벌에서도 아주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28세 1468년에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임명된지 15일 만에 자신의 후견인 세조가 승하하게 되면서 유자광의 역모 고변으로 처형당하게 된다.



이시애의 난
세조 13년 함경도 호족 이시애가 북방 압박정책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남이 장군은 27세의 젊은 나이로 출정 단 3개월 만에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곧이어 남만주를 장악해 국경을 위협하던 건주여진 정벌에 나섰고 건주여진 추장 이민주 일파를 참살했다. 건주여진 정벌의 의미는 100년간 여진족 세력이 약화되어 만주지역의 전세를 뒤바꿔놨다.  두 번의 대전투로 남이는 조선의 영웅이 된다. 

 


남이의 성격
남이의 성격은 급하다, 거칠다는 기록이 많아 무신으로써는 좋은 성격이나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이 결국은 구세력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유자광은 누구? 
조선의 간신 3인방 하면 한명회, 유자광, 임사홍이 있다.  유자광은 머리도 총명했고 문무를 두루 겸비한 인물로 대궐의 섬돌을 뛰어 넘어 기둥을 잡고 지붕으로 올라갔을 정도였다.  이 당시 이시애난을 평정하면서 세조 후반기 신세력의 중심으로 어린 나이에 승승장구하는 남이를 구공신(한명회, 신숙주)등도 견제를 하고 있었다. 

 

유자광이 제시한 남이 장군 반역죄 증거

 

이 상황을 포착한 유자광이 남이 장군을 제거하기 위해 역모죄를 씌워 남이 장군을 제거한다. 

 

불길한 징조의 혜성
이 무렵 세조 14년 혜성이 관측되었는데 유자광이 고변을 하면서 남이 장군을 모함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혜성이 불길한 징조였다.

 


삼국시대 고려시대는 60여개의 혜성이 관측되었고 조선시대에는 80여개의 혜성이 관측되었고 1300여개의 기록이 남아있는데 옛날에 혜성이 의미하는 것은 전쟁, 반란, 전염병등 불길한 징조였다. 혜성이 발견되면 서울과 변방의 경계를 강화하고 죄인을 사면했으며 억울한 재판과 처벌을 방지했다. 

 

조선 시대 혜성 색깔에 따른 불길한 징조 의미


남이 장군 시기의 혜성은 푸르스름한 흰색이었다. 당시 혜성이 나타난 시기는 1468년 9월 2일이었고 9월 7일 예종이 즉위하고 그 다음날 9월 8일 세조가 사망했다. 남이는 세조가 키운 인물이었기 때문에 예종 즉위 날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해임시킨다.

 

남이 장군의 북정가

남이 장군은 글 솜씨도 좋았다.

미평국(나라를 평안케하다)의 글자를 미득국(나라를 얻다)으로 바꿈

그러나 이 시가 욕모의 증거로 악용이 되었다. 남아이십 미평국 글자-> 미득국으로 바꿔서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얻지 못한다면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요라는 야심을 키웠다고 반역의 증거로 유자광이 삼았다. 

 

역모죄로 죽음을 당한 남이 장군

역모죄는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를 주기위해 잔혹한 고문으로 다리가 부러지기도 한 남이장군이었다. 역모죄는 고문에 의해서던 아니던 모두 증거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잔혹한 고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 역모죄로 신공신 남이,강순, 구성군은 혜성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병조판서가 된 지 2달, 고변 후 3일만에 남이 장군은 죽임을 당한다. 이때 남이 장군은 거열형 팔, 다리, 머리에 수레를 연결해 달려 찢어 죽이는 형벌을 당했다. 

 


남이 장군 묘 

남이 장군묘는 경기도 화성과 남이섬 두 군데 있다. 화성의 남이 장군 묘는 쌍무덤이다. 남이 장군은 거열형으로 사지가 찢어져서 시신을 수습하는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그래서 어느 곳이 진짜인지는 알수가 없다.

 

남이섬에 가면 남이 장군 묘를 볼수 있다. 남이 장군을 모실때 머리부분이 없어 금으로 머리 부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남이 장군의 묘 이곳에는 문인석이 존재, 문인석의 의복, 양식이 당시의 시기를 반영하고 있고 남이장군묘가 이곳이라고 문중 족보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남이 장군 사당은 용산에 있어 매년 대제를 지내고 있다.

용산구 남이 장군 사당


남이 장군의 집터 
서울 사근동에서는 남이 장군이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얘기가 있다.

 

서울 종로구 연건동에 위치한 남이 장군 집터


세조 대는 무인이 많이 필요하던 시대였으나 예종-성종때는 정국이 안정되면서 무인이 그렇게 필요없어지는 시대의 희생자로 여기고 있다. 최고의 무장이 정국의 희생자로 여겨지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여러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역사저널 그날 22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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