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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나치 전범들의 최후 [벌거벗은 세계사 37-1회]

by 365 ^^ 2022.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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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를 주도한 인물 희대의 악마 아돌프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의 주범으로 얘기된다. 그러나 히틀러와 그의 측근 몇몇이 이 일을 감당했다고 하기엔 600만이라는 숫자는 어머어마한 숫자이다. 이런 대량 학살은 한사람의 의지로 관철될 수 없는 일이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동의와 지지를 기반으로 유지되었다고 볼수 있다. 

 

* 독일은 왜 나치를 미워했나? 

홀로코스트 !! 히틀러 유대인 학살 이유와 역사

 

홀로코스트 !! 히틀러 유대인 학살 이유와 역사

고대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해 지금의 이스라엘에 정착해 살다가 2000년 전에 로마에 의해 팔레스타인 지방(지금의 이스라엘 영토와 팔레스타인 국의 구역) 밖으로 쫓겨난 후 2천 년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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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전범들의 최후 

 

나치 정권을 지키면서 전쟁과 학살을 이끌었던 사람들을 나치 전범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나치 정권과 함께 몰락했지만 그들이 사라졌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2차 세계대전 이후 폐망한 독일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힘든 상태였다. 이럴때 독일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나치당(=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은 1920년에 만들어졌지만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게르만 민족 공동체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독일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들의 공동적으로 유대인을 선정했다. 

 

나치당 심볼

 

 

선동의 대가 괴벨스 

독일인들의 상심과 불안을 유대인으로 몰라가면서 나치당의 유대인 희생량 전략은 나치당 집권의 큰 발판이 되었다. 이들은 살인을 산업화해 조직적으로 유대인을 학살했는데 이 과정의 첫 단계를 담당한 조직과 인물인 제국선전부의 괴벨스였다.

 

 

탁월한 선동 능력으로 인해 선동의 대가, 선동의 제왕으로 불리며 신문 라디오를 통해 대중들에게 홀로코스트와 전쟁의 당위성을 선동한 인물이다. 괴벨스는 나치정권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이 누구보다 강했다. 또한 유대인에 대한 증오감도 남달리 강했던 사람이다. 

 

 

유대인에 대한 증오감을 부추기기 위해 영화를 활용했다. 영화를 선전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극장을 통폐합하고 영화 제작에 투입되는 감독, 배우를 일일이 다 지시하고 감독했다. 

 

 

괴벨스의 최후

나치 선동에 앞장섰던 괴벨스는 히틀러가 사망한 후 자신도 아이들 포함 가족 모두와 함께 음독 자살을 했다.  

 

괴벨스와 그의 가족 최후 모습 괴벨스의 시신은 타다남았다.

 

 

나치의 선전 영화  

의지의 승리라는 영화는 1934년 나치당 전당대회를 기록한 내용으로 레니 리펜슈탈이 감독한 영화이다. 1930년대 30여 대의 카메라를 투입 다양한 전문 인력으로 탄생한 영화이다.

 

 

나치 친위대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조직으로 나치 친위대가 있다.  나치 친위대는 원래 히틀러를 호위하던 당내 조직으로 처음 만들어졌다. 그러나 나치 집권 이후 전면적으로 유대인 학살에 나선 당이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 각지에 독일 점령지에서 유대인 학살을 주도했다. 그리고 그 친위대에 중심에는 히틀러 최측근의 두 사람이 있었다.

 

 

빌헬름 괴링

나치 정권의 제국원수 헤르만 빌헬름 괴링은 독일 군대의 최고위 계급인 제국 원수이자 공군 총사령관이었다. 한때 히틀러의 후계자로 불릴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나치당의 초기 시절부터 각종 정책을 짜고 나치 친위대 창설에도 기여했던 인물이다.

 

 

또한 국가 비밀경찰인 게슈타포를 재창설했다. 게슈타포는 나치 친위대 소속이지만 독자적 활동 권한이 있었다. 유대인 공산주의자, 지식인 등 반체제 인사를 고문하고 처형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A급 전범을 언급할때 반드시 나오는 인물이다. 

 

 

괴링은 2차 대전 이후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그 중에 괴링은 자신의 일을 부정하지 않았고 어떤 사과나 변명도 하지 않았다. 이런 괴링이 유일하게 유감을 표명한 일이 있다.

 

 

괴링은 군인으로써 교수형은 명예롭지 못하다고 하여 총살을 요청했으나 기각되니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힘러

괴링은 나치 공군 창설에 집중하기 위해 나치 친위대 권한을 측근에게 넘긴다.  그 측근이 바로 하인리히 루이트폴트 힘러이다.  유대인 학살에 최고위 직급 실무책임자라고 할수 있는 힘러는 학살을 이끌었던 인물답게 유대인에 대한 혐오가 남달랐다.

 

 

그리고 그는 나치 최초의 수용소인 다하우 수용소를 설립 이후에 설립된 모든 수용소들의 기본 모델이 된 수용소이다.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포함한 반체제 인사 및 이민자. 동성애자. 종교인 등이 수감되었고 이 중 4만 명 이상이 강제노역, 영양실조 질병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힘러의 최후

2차 대전 이후 나치 친위대를 이끈 힘러는 독일 헌병으로 위장 탈출을 시도했으나 영국군의 검문소를 지나던 중 붙잡히자 입안에 숨겨둔 청산가리 캡슐을 깨물어 자살했다. 이들은 어떠한 반성도 없이 자살로 생을 마무리했다.

 

 

다하우 수용소

다하우 수용소처럼 강제노동이 주목적인 수용소도 있으나 학살 자체가 주목적인 절멸 수용소도 있었다. 유대인 학살의 상징으로 알려진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강제노동과 학살이 동시에 이뤄진 악명높은 수용소이다. 건강한 사람에게 일을 시키고 일을 할 수 없으면 학살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제일 먼저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 나치는 폴란드 여러 도시에 유대인을 격리한다. 이것이 바로 게토(GHETTO)이다. 게토는 1930년 말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 그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이 바르샤바 게토로 최대 수용인 50만 명까지 있던 적이 있다. 게토에 들어가는 식량을 제안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질병과 굶주림에 방치된 채 죽어갔다.

 

 

최종 해결

이런 게토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시작에 불과했다. 1941년 말에 나치는 유대인 문제에 '최종 해결'이란 정책을 내놓는다. 이때 나치 친위대 내부에 소위 기동학살부대가 전면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 죽음의 부대를 이끈 인물이 바로 힘러였다. 이 기동 학살부대는 초기에는 숲속에서 유대인을 총살했었으나 나중에는 구덩이를 파고 바로 총살시켜 바로 묻어버렸다. 

 

 

존더코만도

이런 식으로 죽이는 것은 많이 죽이지 못하고 총알이 낭비된다고 생각해 새로운 방법을 사용한다. 트럭 화물칸에 배기가스를 연결한 가스차를 발명한 것이다. 이 가스차는 대량 학살로 이어지는 전환점이 된다. 이 가스차 방식은 절멸 수용소에서 가스실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가스실에서 죽음을 당하기 전에 머리카락을 자르고 이 머리카락으로 카펫, 옷등을 만들어 사용했다. 죽은 후에는 금니까지 뽑혔고 화장 후 생긴 재는 비료로 사용했다.

 

 

이 과정을 친위대가 직접하지 않고 존더코만도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들은 유대인이었다. 같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이 끔직한 일을 하게 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3~4개월 단위로 교체가 되었는데 이들도 정기적으로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멩겔레 

그러나 절멸수용도에서 이루어진 끔찍한 일이 하나 더 있는데 유대인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아우슈비츠에서 활동했던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을 가진 요제프 멩겔레 의사이다. 

 

그는 쌍둥이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 열을 올렸고 인종적 차이에 관심이 많았던 멩겔러는 열등과 우등의 인종으로 구별된다는 논문으로 박사 박위를 받았고 나치 정책도 북유럽의 게르만족을 일컫는 아리아인이 우월하다고 믿는 우생학을 국가 보건 정책으로 삼았고 순수 혈통 아리아인의 출생률 증가에 열을 올렸다.  순수 독일 혈통 쌍둥이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서 여러 실험을 자행했던 멩겔레였다.

 

브라질에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어떤 쌍둥이들은 죽을때까지 뽑을 수 있는 혈액의 양을 체크하거나 심지어는 쌍둥이의 혈관과 기관을 붙여서 샴쌍둥이를 만드는 시도까지 했다.  멩겔레의 실험에 이용된 쌍둥이만 해도 1500여명이었고 장애인과 정신질환자 등에 안락사 까지 시행하는 안락사 프로그램을 실현하기까지 했다.  

 

멩겔레 최후

멩겔레는 나치 독일 패망 후 아르헨티나로 탈출한다. 이 후 목수, 농기구 판매원등 여러가지 일을 했는데 나중에 아르헨티나 정부의 자료에 따르면 불법 인공임신중절술을 집행했고 1956년 서독대사관을 통해 실명으로 외국인 거주증 발급을 받아 스위스와 독일 등 유럽 여행을 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10년을 잘 살다가 1979년 수영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멩겔레의 유해는 브라질의 한 대학에서 법의학적 표본으로 사용되었다. 

 

 

유대인 학살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서 각 전문가들의 치밀한 움직임 속에 자행되었던 홀로코스트이다. 그 결과 약 600만이라는 유대인 대학살을 낳았다. 

 

->재판 단 21명 회부 (그 많던 나치 전범들은 어디로 갔나? )[37-2]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독일의 홀로코스트 과거 청산 시작점) [37-3]

 

 

유대인 수용소 작센 하우젠

 

유대인 수용소 작센 하우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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