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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뉘른베르크 재판 단 21명 회부 (그 많던 나치 전범들은 어디로 갔나? )

by 365 ^^ 2022.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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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에 폐배하고 최악의 독재자 히틀러가 자살 후 유렵에서 세계대전은 종결된다. 히틀러의 최측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치 전범들의 최후 [벌거벗은 세계사 37-1회]

 

뉘른베르크 

뉘른베르크는 독일적인 분위기가 진한 곳으로 히틀러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도시로 나치 전당 대회가 열렸고 유대인 차별의 근거가 되었던 법 뉘른베르크 인종차별법도 있고 히틀러 사망 후 나치 전범 재판까지 열렸던 곳이다. 나치를 떼어놓고 생각할수 없는 도시 뉘른베르크이다.

 

 

 

 

뉘른베르크 재판

그리고 나치 정권을 단죄하기 위한 역사상 첫 국제군사재판이 열리게 된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린다. 연합국 중 미국, 영국, 소련은 종전 후 나치 독일 전범들의 처리 문제에 관해 협의를 진행한다.  그리고 1945년 11월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재판이 열렸다. 

 

실제 재판이 있었던 600호 법정은 그때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제국의 원수 괴링을 필두로 재판에 회부되었던 나치 전범들 24명 중 나치 정권 정치, 군사, 경계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 21명이 재판에 참석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했다.

 

  1946년 10월 사형 선고 나치 전범의 사형 집행이 이루어졌다. 사형 집행 방법은 교수형이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결과

 

뉘른베르크 재판의 문제점

이 재판은 평화주의 민주주의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라는 관점에서 의의가 있으나 이 재판의 문제점도 있다. 이 재판은 독일 자체에서 이루어진 재판이 아니라 승전국이 패전국을 처벌하는 형식의 재판으로 스스로 잘못을 드러낸 것이 아니였고 소수의 나치 고위직만 처벌한 아쉬움이 컸다.

 

 

재판을 주체한 연합국도 문제가 있었다. 이 재판은 정치 이벤트적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승전국에 의한 보여주기식이었다. 만약 인도적 관점의 재판이었다며 유대인 학살 사건을 중심으로 재판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이 재판에서 유대인 학살 문제로 처형된 사람은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한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전쟁을 일으킨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그 승전국 나라들 안에서도 반유대주의가 강했기 때문에 유대인 학살 문제를 전면에 다루기가 껄끄러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미국과 소련에 신경전이 시작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치 전범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렇다면 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나치 전범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치 전범들이 도망을 간 국가는 남미 국가들로 당시 1940년대 대부분 군사독재 체제였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백인 우월주의 성향이 강했던 나라고 백인 이민을 장려하고 있었다. 

 

남미 나라별 탈출한 나치 전범의 수

 

남미쪽으로 탈출한 사람들 중 멩겔레 의사는 브라질-이탈리아 -아르헨티나로 이동하며 잘 살다 어느 수영장에서 심장마비로 죽은 후 브라질의 한 대학에 시신이 기능되었다. [벌새 37-1 내용있음]

 

또 다른 유명인 중 하나는 아이히만이다. 그를 잡기 위해 오페레이션 피날레라는 작전을 펼쳤다. 아이히만을 체포를 다룬 영화 오퍼레이션 피날레도 있다.

 

아이히만을 체포할때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입을 먼저 막았는데 그때 사용했던 장갑이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독일의 홀로코스트 과거 청산 시작점) [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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