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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개로왕-성왕 이야기 (백제왕들은 어쩌다 전투에서 죽음을 당했나? )

by 365 ^^ 2021. 9. 10.

[315회]

 

한강을 지배한 자 한반도를 지배한다. 475년부터 규칙을 깨기 시작한 고구려, 백제, 신라는 이전에는 왕을 포로로 잡더라도 정치적 협상을 위해 풀어주거나 했으나 이때부터 한강 유역에서 약 80년간 반복된 삼국의 복수 혈전이 시작된다. 삼국시대 전장에서 전사한 왕은 4명이 있는데 (책계왕(백제), 고국원왕(고구려), 개로왕(백제), 성왕(백제) ) 이중에 백제왕만 3명이나 죽었다.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사(371년) ->광개토대왕 복수

고구려 건국한 주몽(동명성왕)의 아들 온조가 세운 나라 백제인데 371 근초고왕이 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한다. 이 과정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한다. 고구려에서 왕이 전사한 사례는 고국원왕이 유일하다. 그래서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선 고국원왕의 손자 광개토대왕이 396년에 백제의 아신왕을 무릎 꿇게 하고 항복을 얻어낸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백제를 낮춰 부른 백잔(백제 찌끄러기)  이라는 기록이 있다. 

 

 

개로왕의 죽음의 원인들

 

우리나라 최초의 스파이 '도림'

470년 초 백제 개로왕에게 승려 도림이 찾아온다. 개로왕에게 도림은 자신을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도망친 승려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승려 도림은 고구려 장수왕의 스파이였다.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스파이가 바로 도림이다.  

 

 

개로왕의 마음을 얻은 도림

도림은 개로왕에게 접근하기 위해 5년 이상 장기간 준비를 했다. 개로왕의 바둑사랑은 멀리 고구려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유명했는데 그걸 알고 있었던 고구려의 스파이 ‘도림’은 뛰어난 바둑 실력을 무기로 개로왕에게 접근한다.  드디어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도림은 백제의 중요한 정책에 훈수를 두듯이 하나씩 하나씩 개입하기 시작한다.   

 

도림의 훈수로 국가 위기를 초래하는 무리한 대규모 토목 공사를 진행하였고 이에 충언을 하는 신하들을 도림은 누명을 씌워 개로왕의 눈과 귀를 막아버린다. 그러나 개로왕도 나름의 노력을 했던 왕인데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 신라, 북위와 우호적인 관계 유지에 노력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472년에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외교문서에 쓴 내용이 고구려 장수왕의 귀에 들어간다. 

 

472년에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외교문서

막을 내린 백제 한성시대

결국 개로왕은 고구려와의 전쟁 속에서 죽음을 당하고 백제는 한강을 상실하면서 한성 백제 시대는 막을 내린다. (백제는 한번 망한 것이다)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서 굴욕적인 죽음을 맞이한 개로왕이었다

 

개로왕의 죽음

기록을 보면 고구려 장수였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 개로왕을 잡아 개로왕 얼굴에 침을 세번 뱉은 후 아차성(지금의 워커힐 호텔 장소) 에서 죽게 한다.  사실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고구려로 망명한 백제 장수였었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개로왕의 목숨과 함께 백제의 한강 유역을 차지한다.

 

 

백제 웅진 천도

그 후 475년 백제는 웅진 (공주)로 천도한다. 한강 백제에 비해 웅진 백제는 국력이 약해진다. 그 후에 백제의 목표는 한강유역 탈환이었다. 백제 선왕들의 무덤 또한 모두 한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다. (현재 서울시 송파구에 집중된 백제의 왕릉)  근초고왕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도 석촌동에 있다.  

 

 

나제 동맹

선왕 제사도 치르지 못하고 무덤이 훼손돼도 막을 수 없어 백제는 신라와 나제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대항하기 위해 힘을 합친다. 433년 백제 비유왕과 신라 눌지왕이 고구려를 대항하기 위해 맺은 동맹이다. 동맹의 유지의 가장 좋은 방법은 혼인을 통하는 것으로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493년 동성왕 시기에 혼인 동맹을 맺었다. 

 

 

나제 동맹으로 한강유역 탈환 

그리고 드디어 백제가 고구려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551년 손을 잡은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나제 동맹군의 목표는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을 노리는 것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돌궐의 압박과 왕이 개정을 둘러싼 내분으로 나제 연합군에 패배하고 만다. 

 

백제는 한강하류 6개군, 신라는 한강 상류 10군을 차지한다. 백제는 한성함락 이후 76년 만에 한강 수복과  고구려 응징에 성공한 것이다. 

 

백제 성왕  죽음의 원인들

 

성왕과 개로왕의 관계에 대한 기록과 연구는 나뉘지만 손자와 할아버지의 관계일 가능성이 높다.  '성스럽다'는 이름에 걸맞게 불법을 널리 전파하고 538년 사비(부여)로 수도를 천도해 계획도시를 조성했고 일본에 선진문물. 국가 시스템을 전달했던 왕으로 고구려, 신라에서도 인정했던 동북아시아 최고의 모범 군주였다.  

 

백제와 신라는 별다른 갈등없이 551년 한강 유역을 한강하류 6개군, 신라는 한강 상류 10군 나눠 갖는다. 한강 유역의 핵심은 백제가 차지한 하류로 특히 중국으로 향하는 당항성(화성)이 핵심이었다. 그 점에서 백제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가 패배한 이유

내부 왕족간의 분열, 왕위 쟁탈전이 치열했던 시기로 외부 북제와 돌궐족의 끊임없는 압박으로 한강유역에 대한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고구려는 땅을 뺏앗기더라도 치열한 전투보다는 소강상태를 유지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신라의 목표 

진흥왕의 최종 목표는 한강 하류였다. 백제 성왕이 기세를 몰아 평양 공격을 제안하지만 진흥왕의 생각은 달랐다. 이 제안을 거절한 진흥왕이었다.  

 

 

고구려. 신라의 밀약 

당시 진흥왕은 20대 초반의 나이에도 주변 상황과 자신의 목표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고구려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고 고구려는 신라보다는 백제가 더 거슬렸다는 것을 알고 신라와 고구려가 손을 잡는 것을 선택한다. 551년 한강 확보와 동시에 이뤄진 고구려. 신라의 밀약을 맺고 오히려 백제가 고립되게 된다. 120년 동안 이어졌던 나제동맹을 깨버린 진흥왕이었다.  

 

475년 빼앗겼던 한강 하류를 고구려 장수왕에게 76년 만에 백제 성왕이 되찾고(551년) 다시 2년만인 553년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다.

당시 신라는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어서 중국과 연결된 한강 하류 확보가 중요했다. 백제 성왕과 손을 잡고 한강유역을 차지했으나 2년뒤 553년 한강 하류를 점령해버린 신라였다. 백제와 혼인 동맹까지 깨며 고구려와 손잡은 신라였다. 한강 하류 확보 후 이 지역에 신주를 설치하고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 장군을 총 책임자로 임명했다.  

 

 신라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반도 동쪽에 고립돼 선진문물을 접할 기회가 적어 한반도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한강 하류 확보는 필연적인 것이였다.  

자신의 딸을 보낸 성왕

그러나 백제 성황은 3개월 전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 하류를 신라에게 내어 준 후 자신의 딸 부여 씨를 신라 진흥왕에게 두번째 부인으로 보낸다. 그리고 시간을 벌어 성왕은 왜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진흥왕도 성왕의 의도를 간파하고 경주를 지키는 명활산성을 고치면서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관산성 전투

554년 신라의 관산성(충북 옥천) 을 공격한 백제, 왜, 대가야 연합군은 백제의 태자 부여창이 이끄는 군대는 파죽지세로 몰아붙이고 전투초반 백제군의 승리로 기울고 있었다. 관산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진흥왕은 한강 신주에 김무력 장군을 불러들인다.  

 

백제 성왕의 비극적 죽음

이때 뜻밖의 사건이 발생한다. 태자 부여창을 격려하기 위해 고작 군사 50여명을 이끌고 전장으로 향하던 성왕이 매복해 있던 신라군에 붙잡힌다. 성왕 역시 개로왕과 마찬가지로 미천했던 노비 출신 도도에게 참수를 당한다. 그러나 더욱 비극적인 것은 성왕의 유해를 굴욕적으로 처리한 신라였다. 성왕의 몸은 백제로 보내고 머리는 신라로 가져와 신라의 정사를 보는 왕궁 계단 아래 묻어서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한 것이다.

 

이 시기의 진흥왕은 직접 정사를 보기 시작하는 시기로 기존의 막강한 원로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성왕의 목을 가져온 것으로 추측된다. 

 

성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성왕은 왕에 걸맞은 죽음을 부탁했지만 노비출신에게 참수당하며 거절당한다.

 

성왕  전사 이유

관산성 전투는 성왕의 아들 부여 창의 강한 의지로 1년만에 전쟁을 벌인 것이다.  성왕의 첫번째 실수는 아들을 너무 믿은 것이고 당시 곳곳에 스파이가 횡행하던 전쟁 상황에 50명의 기병만 거느리고 출전한 성왕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신라군에게 붙잡힌 것이다. 

 

 

태자 창은 아버지의 죽음을 듣게 되고 고대 전쟁에서 왕의 사망은 군사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키는 것으로 괴멸적 타격을 받은 백제는 거의 전원이 사망하는 전멸에 가까운 패배였고 태자 창도 겨우 탈출 하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로 괴로워하던 태자는 불교에 귀의하려한다. 그러나 백제 27대 왕 위덕왕이 된다.  

 

신라의 전성기 도래

이후에 백제는 한강 탈환을 위한 외교 관계를 통해 재도약을 꿈꾸지만 쉽지 않았고 554년 관산성 전투 이후 진흥왕은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562년 대가야 정복하고 낙동강 지역 마져 장악한 후 심지어 고구려 영토인 함경도 지방 함흥평야까지 진출하면서 신라 최대의 영토를 이뤄낸다. (6세기 진흥왕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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