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경주 쪽샘지구와 국립 경주 박물관 탐방 [선녀들 4회]

by 짱신나^^ 2020. 6. 30.
반응형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회]
 
 오늘의 방문지 :경주 쪽샘지구/국립경주 박물관/무열왕릉
 주제: 신라 천년의 역사 경주
    
 출연자: 문근영
 
이번 회차에서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왕릉을 통해 알아볼수 있는 경주를 방문하다. 쪽샘지구 유적발굴관을 방문해 현재 발굴 중인 무덤을 직접 확인하고 신라 무덤의 형식 및 왕릉 발굴 과정에 얽힌 일화등을 이야기한다. 경주 박물관에서는 무덤에 발굴된 금으로 만든 부장품들을 관람한다. 무령왕릉과 김유신 묘를 찾아 당시 삼국 관계 및 김유신의 업적등을 배운다.

 

 
묘,릉,총 구분하기 
 
묘- 무덤의 주인이 분명한것 
-왕족의 무덤
-왕족의 무덤이기는 하나 주인을 모르는 무덤은 
 
무덤을 세는 단위 '기'
 
- 경주에는 총 155기의 무덤이 있고 155호가 천마총이다.
 
 
 
경주의 무덤도 벌초는 할까? 
1년에 3번정도 벌초한다.
2015년 1212명이 신라 임금님 이발해서 최다인원 벌초로 한국 기네스 등록

 

 

 

경주 쪽샘 지구

경주의 쪽샘지구(대능원)는 옛날에 샘이 있었다 하여 쪽샘 지구로 이름 붙였다.

신라의 왕족과 귀족들의 묘역이 모여있던 곳이다. 

 

 
무덤에 얽힌 발굴 일화들 

 

 
일제 강점기때 발굴된 금관총
 
동네 아이들이 귀걸이 들고 놀고 있었는데 경주 박물관 담당과 경찰서장이 출동에서 확인했다. 원래 금관총 자리에 주막이 있었는데 장사가 잘 되서 확장을 하려고 뒤의 터를 고르는 도중 신라 유물이 발굴된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를 보고 4일만에 발굴작업을 끝내버린다. 자세한 발굴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서봉총 
 
고고학자였던 스웨덴 황태자 부부가 일본을 방문 했는데 이들을 경주로 초대해 출토된 금관의 수습 기회를 선물한다. 그래서 서봉총의 서는 스웨덴의 한자표기인 서전의 서, 금관 장식 봉황의 봉으로 무덤이름을 작명했다.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전에 연습 발굴 대상으로 천마총을 발굴했다. 그러나 이 천마총에서 잭팟. 천마총에서만 유물이 약 11,000여점 발굴 (만천점 정도)
 
천마총이 동산인줄 알고 경주 사람들은 바로 옆에서 집짓고 살았다고 한다.
 
천마도는 벽화가 아니고 옛날에 말을 타고 다닐때 안장에 치렁치렁 흙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명 말다래 -> 그 말다래에 그린 그림이 천마도이다. 
 
황남대총
 
황남동에서 제일 큰 무덤이라는 뜻에서 한자의 큰 '대'를 붙였다. 황남대총의 주인을 왕과 왕비로 추청하고 있다.
 
황남대총은 다른 무덤과 다르게 두개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 고분에서는 남성으로 추정되는 치아 발견 북쪽 고분에서는 부인대라고 여성의 허리띠를 뜻하는 부인대를 포함해 여자들의 장신구가 나오는 등 여성의 유물 다수 발굴되었다. 

 

 

쪽샘 유적 발굴관 

 
쪽샘 지구 발굴 현장터 -> 고분 발굴 현장을 볼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삼국의 무덤 형태 

 

 

고구려, 백제는 굴식돌방무덤
 
돌을 쌓아 방을 만들고 영혼이 드나들도록 입구를 만든다. 그러나 도굴꾼들이 드나들기 쉬워 껴묻거리 도굴하기도 쉬운 굴식 돌방무덤

 

신라 돌무지덧널무덤
 
1.관과 껴묻거리함을 놓고 
2.그 위에 덧널(덧관)을 하나 더 씌운다.  
3.그리고 그 위에 자갈을 쌓고 
4.그 위에 흙을 덮는다. 
 
0123
 
도굴이 불가능한 구조이다. 신라가 황금의 도시가 될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소 중의 하나는 신라의 이런 무덤형태 덕분에 깊이 묻혀있던 금관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흰색선은 함몰부로 나무상자가 썩게되면 돌들이 무너지며 내려앉으며 생기는 모양
 
그래서 발굴 당시에는 깨지거나 찌그러진 상태로 손상이 많은 부장품들을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통해 박물관에 전시가 된다. 
 
 
 
신라는 지리적 요소로 인해 교역이 쉽지 않았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분에서 로마의 유리제품이 출토 됐다. 바로 로만글라스.

 

 

 

국립 경주 박물관

 
국립 경주 박물관에 가면 기원전 57년에서 기원후 935년까지 신라의 건국과 번영 과정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전시하였고, 무덤에서 출토된 부장품들을 토대로 ‘황금의 나라, 신라’를 조명하는 전시실을 마련하였다. 
 
국립 경주 박물관 입장료 

무료무료 대상:상설전시관,
어린이박물관, 특별전시
(단, 유료 특별전시는 제외)

 무료관람이라도 관람 질서 유지 및
이용객 안전 등을 위해'무료 관람권'을 발행하므로
무료관람권을 발급받아 입장 하셔야 합니다.

 

성별 구분 없이 귀걸이를 걸던 신라 시대
 
황금의 나라 신라 
중세 이슬람의 지리학자 알 애드리시가 쓴 '천애횡단갈망자의 산책'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경주 박물관의 하일라이트 천마총 금관과 금제 허리띠 

천마총 금관 국보 제 188호 /천마총 금제 허리띠 국보 제190호

 

1973년  대능원에서 천마총 금관이 발견된 것이다. 

Q.발굴된 금관을 최초로 쓴 사람은 누구일까? 
 
A. 때는 일제 강점기였다.  
 
더보기
기생이였다. 평양 부립 박물 관장이던 고이즈미 아키오는 회식자리에서 기생에게 서봉총 금관을 씌우고 금제 장신구 휘감고 기념 사진 촬영을 하며 놀았던 그 사진이 신문에 실린다. 
금관의 파문 : 조선의 국보를 기생의 머리에 씌운 행태를 비난하고 있다. 나라의 보물을 무시한 행태에 온 국민이 분노했던 사건이였다.
 
신라의 번뜩인 예술성, 과학 기술력을 볼 수 있는 반면에 치욕도 동시에 만날수 있는 곳이 신라 경주다. 
 
 이차돈 순교비 앞 
 
신라 불교 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가 이차돈이다. 
 
삼국시대 왕권 강화와 불교의 상관관계?
 
고구려 백제는 중국에서 불교를 바로 수용하고 수용과 동시에 공인이 됐다. 반면 변두리 국가 신라는 수용도 늦고 기존 토착 신앙이 지배적이여서 수용이 힘들었다. 100년후에 법흥왕 때 귀족 이차돈이 자신의 목을 베면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고 사람들은 불교를 수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그의 말에 따라 참수를 했는데 목이 날라가면서 목에서 하얀 우유빛 피가 솟구쳐 올랐고 온 땅이 진동하며 꽃비가 떨어졌다. 귀족들이 놀라서 불교를 수용했다. 
 
비석을 보면 목이 떨어져 있고 솟구치는 우윳빛 피 ,꽃비, 바닥이 일렁이는 것은 천지가 진동까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음
 
이때 왕권이 강해지면서 신라의 전성기로 가는 시기였다. 이차돈의 순교는 왕권강화를 다진 혁명적 사건이였다. 
 
임신서기석 
 
비석의 내용은  임신년 6월 16일 두사람이 맹세하여 쓴다. 유교 경전을 3년 안에 마스터 할것이다.  

신라 청년들의 학구열을 볼수 있는 비석이다. 

 

무열왕릉 

 
태종 무열왕릉 김춘추의 무덤이다. 
 
김춘추는 몰락한 성골의 자손이니 진골 출신으로 신분적 한계가 있었다. 외모와 능력이 출중했고 야심도 있었던 김춘추는 선덕여왕 때에 상당한 정치적 지위에 오른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자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을 맺어 신라를 압박한다. 신라는 국력이 부족하여 외교정치를 펼친다. 고구려를 찾아간 김춘추는 당시 고구려 실세인 연개소문을 만나 고구려와 신라의 군사동맹을 제의한다. 그러자 고구려는 신라의 한강유역 영토를 요구했고 이를 거절하고  김춘추는 다시 당나라로 가서 나당 군사동맹을 체결한다. 그 당시 당 태종은 거듭된 고구려 원정 실패로 김춘추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실리 외교는 살아남는자가 강한것이다.    
 

김유신

 

멸명한 금관가야의 후손이자 신라의 전설의 에이스 김유신 

김춘추를 왕으로 만들고 삼국통일로 이끈 강력한 조력자로 김유신이 있었다. 
 
 
 
김유신의 가장 큰 업적 
 
백제와의 황산벌 전투
 
백제는 5,000 명 대 50,000명이 넘는 신라군 
10배가 넘는 전력차이에도 불구하고 4차례 전투에서 신라군이 번번히 진다.  
 
의자왕은 계백에게 5000 의 군사를 준다.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다. 계백은 가족을 다 죽이고 피를 뒤집어쓰고 나온다. 이에 사생결단으로 뭉친 백제군은 압승을 이어나간다.
 
이에 김유신은 화랑 관창이 출정시키고 소수의 결사대와 함께 적진으로 돌격하던 관창은 백제군에게 생포된다.  당시 16세였던 너무 어린 관창을 보고 백제는 그를 다시 돌려 보낸다. 그러나 돌아온 관창은 물 한모금 마신 뒤 다시 적진으로 뛰어들어 생포후 참수된다. 백제는 참수된 관창의 목을 돌려보내고 이에 관창의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 한다. 이에 5만 화랑들은 사기가 치솟아 백제를 물리치게 된다. 
 
Q.그렇다면 황산벌은 지금의 어디일까? 
 
더보기
A. 화랑 정신이 숨 쉬는 논산 육군 훈련소가 황산벌이었다. 
 
육군훈련소에 입소한 훈련병들은 꼭 한 번씩 부르게 되는 노래. 훈련소 기간병들은 다른 군가 안 부르고 이것만 주구장창 부른다.
 
 

(1절)백제의 옛터전에 계백의 정기 맑고관창의 어린 넋이 지하에 혼연하니웅장한 황산벌에 연무대 높이 섰고대한의 건아들이 서로 모인 이 곳이오오 젊은이의 자랑 육군훈련소.

반응형

댓글